<그들이 가는 길>로 입문한 이집길

by.김종원(영화사연구자) 2019-12-20
[사진] <성벽의 뚫고>(한형모, 1949)에 출연한 이집길
 
이집길(李集吉)은 한림, 최은희와 간발의 차이로 1947년 <그들이 가는 길>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무성영화시대 나운규의 <아리랑>(1926)과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 마부와 건축기사로 나왔던 단역배우 임운학이 처음 만든 감독 진출작이었다. 세트장치 없이 뚝섬 근처의 절에서 야외 촬영한 이 16밀리 영화는 부친(정민)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친구의 아들을 데려다 길러 평양감사가 되도록 만들었으나 키운 보람도 없이 외면당하자 암행어사가 된 그의 아들(임운학)이 배은망덕한 평양감사를 응징한다는 얘기다. 권선징악적 요소가 강한 이 이조(李朝) 야사의 악역인 평양감사에 이집길이 발탁된 것이다. 엑스트라가 모자라 경동중학 연극부 학생까지 동원했다고 한다.(임운학 「예(藝)에 살다(16) 영화배우 55년」 일간스포츠, 1979.8.11)
   
일본대학 산업경영과를 다닌 한림과 마찬가지로, 일본국제음악학교에서 공부한 해외 유학파인 이집길이 영화배우가 된 것은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무튼 그는 이듬해 이만흥 감독의 <끊어진 항로>(1948)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밀수범으로 변신한다. 성실히 살아가는 직장인인 친구(이강천)는 바르게 살자고 설득하지만 이집길은 정부(유계선)와 공모하여 밀수품을 실어놓은 배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끈질긴 친구의 노력으로 생각을 바꿔 당국에 자수한다. 그의 친구 역할과 함께 미술을 담당한 이강천은 5년 후 <아리랑>으로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이집길은 1년 후 <자유만세>를 찍은 촬영기사 한형모의 감독 데뷔작 <성벽을 뚫고>(1949)의 출연을 계기로 연기에 열정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가는 길>이나 <끊어진 항로>가 16밀리 무성영화인데다 반응이 좋지 않았던 반면 이 영화는 이미 검증 받은 한 감독의 35밀리 영화였기 때문이다. 1948년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에 의해 촉발된 제주 4,3사건과 10월 19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계기로 일기 시작한 공산주의 배격의 흐름은 결국 <성벽을 뚫고>와 같은 반공영화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산주의자인 매부(권영팔)는 육군 소위인 처남(이집길)을 매수하려 하고 또 처남은 처남대로 매부를 설득하려 들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서로 총을 겨누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영화에 이어 그는 이만흥 감독의 <애정산맥>, <청춘>(이상 1953), <탁류>(1954) 등 3편과 홍성기 감독의 <출격명령>(1954), <열애>(1955) 등 2편에 출연하여 편수는 많지 않으나 꾸준히 배우의 길을 걸었다. <애정산맥>은 전투 경찰과 공비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친구의 이야기로 <성벽을 뚫고>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 다만 그들 사이에 마을 처녀와의 삼각관계가 설정되고 그의 배역이 육군 장교에서 전투경찰관으로 바뀌었을 정도의 차이다. <청춘>에서는 음악교사인 여선생을 둘러싸고 영어교사(황남)와 사랑싸움을 벌이는 체육교사로, <탁류>에서는 공비들에게 공급할 무기를 들여오려던 간첩단을 일망타진케 하는 방첩대원으로, <출국명령>에서는 적탄에 맞아 떨어진 라이벌인 조종사(전택이)를 죽음을 무릅쓰고 구출해내는 공군 조종사로 등장한다.   




<출격명령>(홍성기, 1954)에 출연한 이집길, 왼쪽은 배우 전택이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어버린 <열애>에서는 나병을 앓으면서도 한 여인(염매리)을 포기하지 못했던 화가 박혁의 불우한 삶을 온몸을 사르다시피 연기했다. 그는 간장염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 그의 아버지 박혁 목사 역을 맡은 나운규 시대의 배우 이금룡도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고, 그 역시 같은 해 11월 세상을 떠났다.  


술에 젖은 말년의 삶 

이집길은 1923년 서울 혜화동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고향이 전라북도 군산이라는 말도 있다.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제국음악학교 성악과를 다니다가 일본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데뷔 당시에는 ‘교양을 갖춘 침착하고도 겸양한 인품, 근대인으로서의 지성과 샤프한 신경, 무엇보다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굴곡 있는 입체적인 선 등이 조화된 한국영화계의 호프’로 기대를 모았다.(한국일보, 「금주의 스타, 이집길」 1954, 11,29) 그러나 그는 배우로서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키가 작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단점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연기에 임했고 구두 뒤축을 두 개나 달고 다닐 정도로 키에 신경을 썼다. 말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젖어 지내다시피 했다. 이즈음 시골에 있던 아내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상경하여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열애>를 유작으로 11월 11일 오후 2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운명하였다. 한창 활동할 나이인 32세였다. 원인은 간장염이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아내의 손을 잡고 과거의 무절제한 생활과 과오에 대해 사죄했다고 한다.(한재수, 「배우로 본 한국영화 광복 50년」 『월간 영화』 1975년 3월호. 78쪽)
 


유작이 된 <열애>(홍성기, 1955)의 한 장면(아래쪽이 이집길)
 
뒷날 감독이 된 영화평론가 유두연은 그의 죽음에 대해 “영화인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겨우 장만한 소나무판 관을 메고 가서 해골 같이 말라버린 시체를 끌어안고 ‘영원의 출연’을 위한 메이크업을 시켜주고 있는 뼈 저리는 마음을 알고 있기에 이 붓을 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추도문을 마무리했다. 
 
-그 몸뚱이와 넋을 원통 필름에 발라버렸다. 그가 생전에 출연했던 영화를 더듬어 보면 그 얼마나 대중들의 마음이 그가 움직이는 그림자 속에 뭉쳐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성벽을 뚫고>에서의 이집길은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정신의 심벌이었다. 지리산 암벽에서 공비로 화한 친우와 대결하는 국군 소위의 검은 눈동자는 우정도 감상도 범할 수 없는 정의에 번쩍이고 있었다. <출격명령>의 항공 대위는 그 두꺼운 가슴팍에 자유를 갈구하는 민족의 마음을 안고 적진에 포탄을 퍼붓다가 드디어 산화하고 말았다. <열애>의 이집길은 파멸하여가는 육신을 이끌고 인간성의 존엄을 긍정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생을 찾는 문둥병 환자였다. 모두가 다 절실한 환경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 얼마나 성실하게 대중들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이렇던 이집길도 가버렸다.   
- 「젊은 배우의 죽음 , 곡(哭) 이집길의 사(死)」 조선일보, 1955.11.15-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