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키스 신의 수혜자에서 이완용 단골 배우로
해방 후 미군정기(1945년 9월 9일~ 48년 8월 15일)까지 제작된 영화는 최인규 감독의 <독립전야>(1948)까지 29편에 이른다. 이 가운데 경찰의 지원 아래 만든 정책 계몽영화가 <밤의 태양>(박기채, 1948), <수우(愁雨)>(안종화, 1948), <여명>(안진상, 1948) 등 세 편이다.
이향(李鄕)은 이 가운데 <밤의 태양>(1948)으로 영화계에 이름 석 자를 올렸다. ‘7’이라는 별명을 가진 불량배 역할이었다. 그는 영화를 찍는 동안 박기채 감독의 유난스런 호각 소리를 여러 번 들어야 했다. 박 감독은 일반적으로 쓰는 ‘레디고’대신 먼저 ‘레디’라 외친 뒤 호각을 불었다. 이 영화를 촬영할 때 모조품이 아닌 각종 총기가 소품으로 사용되었다. 특수효과 기술이 빈약해 실탄을 넣고 쓰다 보니 배우들이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향, 「예(藝)에 살다, 연기일생(12)」 , 『일간스포츠』, 1980.1.18)
그는 <밤의 태양>에 이어 김성민 감독의 <사랑의 교실>(1948)과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마테오 팔코네」를 번안 각색한 <심판자>(1949)에 출연했다. 이렇게 조연에 머물렀던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에 고학생으로 위장한 방첩대 대위 신영철 역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는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됐을 때 자신을 구해준 술집 종업원 마가렛(윤인자)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가 위장 대남 간첩(정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권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향은 그 여간첩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결말 부분의 키스 신을 찍기 위해 감독과 함께 1주일 동안 상대역인 윤인자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스라고 해야 겨우 입술만 댔을 뿐인 어설픈 이 장면이 한국 최초의 키스신이 된 배경이다.
[사진] 최초의 키스신으로 알려진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한 장면
이향은 <운명의 손> 이후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마의태자>(전창근, 1956),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58), <형제>(김성민, 1958) 등에 주연으로 기용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인생역마차>에서는 암흑가의 두목과 신문기자 1인 2역을, <마의태자>에서는 타이틀 롤을, <검사와 여선생>에서는 은혜를 입은 옛 은사를 법정에 세워야하는 검사 역을 맡고, <형제>에서는 남의 아내가 된 옛 애인 앞에 살인강도가 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이와 같은 기회를 준 것은 <사랑의 교실>부터 <형제>까지 네 편에 불러준 김성민 감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 후의 배역들이 앞의 작품들에 비해 비중이 떨어지거나 비호감형, 악역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멜로드라마 보다 시대극이나 활극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진] <형제>(김성민, 1958)에 출연한 이향_사진제공 김종원
그 예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의 일본 경찰 주임, <한말풍운과 민충정공>(윤봉춘, 남홍일, 1959)의 강압적인 일본 사신 하야시, <아아, 백범 김구 선생>(전창근, 1960)의 저격 미수범 한태구, <안개 낀 거리>(강범구, 1963)의 살인 청부 역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1959) 이후에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등 이완용 배역만 무려 여섯 번이나 맡아 ‘이완용 단골 배우’가 되었다.(이향, 「예에 살다, 연기일생」 (19) 『일간스포츠』, 1980.1.27) 그는 1964년 한 해 동안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등 11편에 출연, 최다기록을 세우며 1991년 7월 29일 알츠하이머로 77세의 삶을 마칠 때까지 <원점>(이만희, 1967), <검은 장갑을 껴라>(이상언, 1971), <악인의 계곡>(김묵, 1974), <족보>(임권택, 1978),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 <초대받은 성웅들>(최하원, 1984) 등 모두 131편의 영화를 남겼다.
[사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58)의 한 장면
단련된 몸으로 이미 맛본 단역 경험
독특한 저음이 만들어내는 광물성의 강한 목소리, 날카로운 눈매로 36년 동안 한국영화계의 길목을 지킨 이향은 1914년 2월 8일 서울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근식(李根植)이다. 그는 아홉 살 때까지 강원도 홍청군 서면 동막리에서 자랐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자신은 일본 사람을 상대로 모피 장사를 했다. 이 소년은 집근처인 연동교회에 다니며 뒷날 부통령이 된 함태영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풍족한 아버지 덕에 서울주교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경신(儆信)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학기 초에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축구선수로 스카우트되는 바람에 학교를 옮겨야만 했다. 그런데 축구가 싫어졌다. 이 학교를 나와 들어간 곳이 연희전문학교 별과(別科)였다. 별과란 축구와 야구선수로 구성된 일종의 특기 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연극에 있었다.
[사진] <이름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 출연한 이향
이 무렵 낭만좌(座)라는 극단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조연 배우가 나가는 바람에 급히 자리를 메워야 한다며 출연을 권했다. 그 대타로 나가게 된 것이 <아편전쟁>의 쿠리 역이었다. 작은 역할이었으나 칭찬을 받게 되자 학업마저 중단했다. 연극 일이 늘면서 한 선배가 그에게 “고향을 그리듯이 조국을 잊지 말라”며 시골 향(鄕)자가 들어간 예명을 지어 주었다.
이향은 <밤의 태양>에 앞서 해방 전 눈에 안 띄는 배역이지만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스물다섯 살 때였다. 하루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제작부장(이백산)이 불러 만났더니 영화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맡겨진 배역은 갑, 을, 병 세 명의 농부 가운데 한 명인 농민 역, 김유영 감독의 <수선화>(1940)였다. 의정부 촬영장으로 나갔더니 감독의 지시라며 바지저고리부터 입게 하고는 4, 5일 동안을 땅바닥에서 지내게 했다. 그래야만 농부의 분위가 몸에 밴다는 것이었다. 황달병을 앓고 있던 김 감독은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들것에 실려 나와서도 극성스럽게 현장을 지휘했다.(이향, 「예에 살다, 연기 일생(8)」 『일간스포츠』, 1980.1.14)
이향은 그 뒤 연극계의 선배인 극작가 이광래의 소개로 연극지망생인 처녀와 사귀었다. 1949년 ‘제3무대’라는 극단을 만들어 공연 준비에 한창 바쁠 때였다. 손 씨인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대한통운의 전무였고 오빠는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집안에선 그들의 교제를 적극 반대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동거로 맞섰다. 첫딸이 네 살이 되어서야 겨우 승낙을 받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1970년 이향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병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보살폈던 그런 아내도 6남매를 남긴 채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