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해방이 됐으나 영화계는 휴면상태였다. 옛 조선영화사 자리에 영화건설본부라는 문패를 달고 만든 25분 분량의 <해방뉴스>(촬영 김학성, 편집 박기채)가 공개된 게 고작이었다(중앙신문, 「일요특집, 찬란한 예원(藝苑) 풍경」, 1945.1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우리의 영화가 생산된 것(최용달 「해방뉴스 평」, 예술통신, 1945.10.25.)이 기꺼울 정도였다.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로이드의 구두방>(해롤드 로이드 주연) 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나 <소년의 거리>(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와 같은 외국영화가 볼거리였다. 이런 시대에 1946년 최초의 항일 광복영화가 나왔다.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가 그것이다. 이해 3월부터 10월 사이에 거의 두 달 간격으로 나온 기록영화 <안중근 사기(史記)>(이구영), <제주도 풍토기>(이용민)와 아동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에 이은 네 번째 한국영화계의 결실이다. 미군정 치하였다. 불과 1년 전 일본제국 의 특공대 지원을 촉구하는 <사랑과 맹서>(1945)와 같은 어용영화를 만든 최 감독이 광복영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진 1] 해방 후 최초의 극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의 한 장면
묻힐 뻔했던 ‘자유만세’의 단역
<자유만세>에는 한동안 한국영화사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물이 등장한다. 폭약을 운반한 죄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끌려가다가 감옥에서 탈출한 지하 조직책 최한승(전창근)에 의해 구출되는 중절모의 사나이, 바로 박동지 역의 김승호가 그 사람이다.
1 보잘 것 없는 이 단역배우가 뒷날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주역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2] <자유만세>에 출연한 김승호. 영화로는 데뷔작이다
아무튼 김승호는 이듬해 <자유만세>의 주인공 전창근에 의해 16밀리 농촌계몽영화 <해방된 내 고향>(1947)과 밀수의 근절을 촉구하는 경찰청 지원의 <밤의 태양>(1948, 박기채)에 각기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 뒤 10여 년 동안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사이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8월 김승호는 서울에 남아 있는 영화, 연극인들과 함께 명동성당에 갇혔다. 해방 후 월북했던 배우 심영이 인민군 중좌의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때 북으로 끌려갈 뻔했다. 하지만 의정부 근교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1.4후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정부가 환도할 무렵 그는 대전에 머물며 자신이 창단한 극단 ‘배협’의 공연을 계속했다. <망향>(1952, 대전시공관), <허무한 사랑>, <그들의 가는 길>(1953, 시공관), <유관순>(1954, 대전극장) 등이 이때의 레퍼토리이다(도완석, 「대전·충청 연예인실록, 전쟁참화 속에서 ‘배협’ 무대 이어져」 중도일보, 2016.4.30.). <허무한 사랑>에서는 연출을 담당했다.
그가 다시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55년 김기영의 감독 데뷔작 <양산도>(김기영, 1955)부터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웃을래야 웃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영화’(허백년, 「양산도가 제기한 문제점」, 조선일보, 1955.11.6.)라는 등의 혹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데 1년 뒤 출연한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1956)이 작품성과 함께 그가 주연한 맹진사의 연기가 호평을 받으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풍토색이 강한 민속극으로서도 일류의 가치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유머요 풍자가 이만큼 자연스럽게 표현된 국산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신영화, 풍토색 강한 민속극」, 한국일보, 1957.2.14.)는 작품평에 이어 “더욱이 맹진사(김승호)의 숙달된 연기는 영화를 결정적으로 살려주었다”(「신영화, 한국적 아이로니, 시집가는 날」 조선일보, 1957.2.15.)는 과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봉래 역시 “연기 면에 있어서는 김승호의 역연이 압권이었다. 자기 역에 대한 해석이 정확하였고 등장인물과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그 호흡이 잘 어울렸다”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67.2.19)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3] <시집가는 날>에서 맹진사 역으로 출연한 김승호
조선조 때 맹진사댁과 김판서 댁의 혼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양반사회의 위선과 구습, 결혼제도의 모순을 희극적 아이러니로 빚어낸 <시집가는 날>(오영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의 개명)은 결국 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희극상을 받음으로써 국내 작품이 해외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로 기록된다.
김승호는 이런 후광에 힘입어 1957년 한 해 동안 <오해마세요>(권영순)를 비롯한 <봉이 김선달>(한홍열), <아리랑>(김소동), <풍운의 궁전>(정창화) 등 15편, 58년엔 <돈>(김소동), <초설>(김기영),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생명>(이강천), <인생차압>(유현목), <마도의 향불>(신경균) 등 20편에 출연하고, 59년엔 <곰>(조긍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육체의 길>(조긍하) <불멸의 성좌>(유진식) 등으로 비로소 30편선(34편)을 돌파하여 ‘김승호 시대’를 예고한다. 1960년에는 <피 묻은 대결>(김묵), <로맨스 빠빠>(신상옥), <흙>(권영순), <박서방>(강대진), <저 언덕을 넘어서>(박성복) 등 25편으로 전년도에 비해 10여 편이 줄긴 했으나 61년부터 <주마등>(이만희), <마부>(강대진). <삼등과장>(이봉래). <노다지>(정창화), <어부들>(강대진),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등 32편에 이어 62년 <월급쟁이>(이봉래), <전쟁과 노인>(임권택), <감나무골의 공서방>(김응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권영순) 등 다시 34편을 소화하는 저력을 과시한다.
[사진 4] <돈>(김소동, 1958)에 출연한 김승호.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일확천금을 꿈꾸다 사기 당하는 순박한 농민 역을 맡았다
63년에는 <굴비>(김수용), <로맨스그레이>(신상옥), <아버지 결혼하세요>(김용덕), <혈맥>(김수용) 등 23편(총 제작 편수 148편)에 출연했는데, 이 결과는 <가정교사>와 <청춘교실>로 청춘영화 붐을 일으키며 인기 스타로 떠오른 신인 신성일이 이 해에 출연한 21편보다 많은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46세에 이른 중년이었다. 64년에는 <월급봉투>(김수용), <비련의 왕비 달기>(최인현, 약풍), <명동에 밤이 오면>(이형표) 등 33편, 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 나봉한), <마포 사는 황부자>(이봉래), <배비장>(신상옥) 등 35편, 66년 <하루살이 인생>(권혁진), <아빠의 청춘>(정승문), <대폭군>(1966, 임원식) 등 26편, 67년 <만선>(김수용), <역마>(김강윤), <돌무지>(정창화) 등 17편, 68년 <장군의 수염>(이성구), <풍운>(권영순), <영원한 모정>(김기덕) 등 9편, 69년 <허공에 진 청춘>(정원), <사화산>(고영남), <마법선>(이창근) 등 2편, 1971년 <족보>(고영남) 1편 등 이렇게 김승호는 23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통해 모두 3백14편을 남겼다.
김승호표 서민영화의 형성과 넉살
후시 녹음시대였지만 그는 거의 성우에 의존하지 않았다. 표피적인 몸의 표현만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음성연기까지 갖춘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사극에서는 서민연기와는 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전창근), <요화 배정자>(1966, 이규웅)의 고종황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1962, 권영순)의 진시황제는 물론 <대폭군>(1966)의 묘장왕,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 임원식)의 대원군, 그 밖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 김소동), <평양기생 계월향>(1962, 이태환)의 배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5] <대폭군>에 출연한 김승호
김승호 연기의 또 다른 면모는 넉살과 딴청으로 비벼낸 해학과 풍자이다. 무남독녀를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려다 오히려 제가 만든 덫에 걸리고 마는 <시집가는 날>(1956)의 맹 진사, 돈 에 눈이 멀어 횡령, 공문서 위조 따위의 불법 행위를 벌이다가 법망에 걸리자 위장 자살극을 벌이는 <인생차압>(1958)의 모리배 이중생, 새 부임지에 와서도 엽색행각을 버리지 못하는 <배비장>(1958)의 제주 목사 등이 이런 유형이다. 특히 <인생차압>은 금전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타산적인 탐욕의 허상을 시니컬하게 표출하여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그의 연기 본령은 서민의 애환과 삶을 꿰뚫어 보고 엮어내는 데에 있다. 사채 꾼의 꼬임에 빠져 노름판에 끼어들었다가 재산을 날리는 <돈>(1958)의 농사꾼, 술에 찌들어 살아가는 <곰>(1959)의 무식한 목수, 우직하고 성실하나 가족에게 유독 권위적인 <박서방>(1960)의 연탄아궁이 수리공, 두 남매를 키워 아들을 고등고시에 합격시킨 <마부>(1961)의 홀아비, 밀수배의 농간에 놀아나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감나무골의 공서방>(1962)의 고리대금업자, 복덕방 간판을 내걸었으나 찾는 사람이 없는 <혈맥>(1963)의 복덕방 영감, 리어카를 장만하는 것이 소망인 한강 다리 밑의 <지게꾼>(1963), 아내와 함께 서울에 사는 자식들을 보러 왔다가 수모를 겪고 돌아가는 <굴비>(1963)의 시골 노인, 고된 일을 하며 아들을 성공시킨 <하루살이 인생>(1966)의 하역부, 두 명의 자식을 바다에 잃고도 어부 일을 버리지 못한 <만선>(1967)의 곰치, 옛정을 찾아 시골장터를 찾는 <역마(驛馬)>(1967)의 체 장수 노인 등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비록 <로맨스 빠빠>(보험회사의 직원)나 <삼등과장>(운수회사 출장소장)의 경우처럼 그럴 듯하게 보인 도시의 샐러리맨도 불황으로 실직하거나 상관의 눈치나 보는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관상 한복과 양복의 차이가 있을 분 이런 배역들이 김승호표 서민영화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했다.
[사진 6]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성실한 가장의 역할로 출연한 <로맨스 빠빠>의 김승호
[사진 7] 시대에 뒤떨어진 마부의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맏아들 역할의 신영균
그의 출연작 중에는 영화사에서 언급되는 대다수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단 한 번의 외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시골 은행 간부의 인생유전기 <육체의 길>(1959)을 비롯한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박서방>, <로맨스 빠빠>, <마부>, <삼등과장>, <굴비>, <로맨스그레이>, <혈맥> 등 흑백영화와 노련한 형사 역을 맡아 사진작가(신성일)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쳐 나간 유일한 색채영화 <장군의 수염>(1968, 이성구)이 그 예이다. 이상의 작품은 바로 김승호 연기의 베스트10에 해당된다.
[사진 8] <장군의 수염>에서 노련한 형사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김성옥
듬직한 체구와 선이 굵은 얼굴, 특유의 발성과 연기력으로 서민적 애환을 만들어낸 연기파 김승호는 오손 웰스다운 중후함과 찰리 채플린적 풍자의 양면성을 보여 주었다(김종원, 「서민적 체취와 정서 녹여낸 늦둥이 국민배우: 김승호의 생애와 연기」 문화관광부 선정 문화인물 ‘김승호 회고전’ 책자). 그의 영화 활동은 광복의 격동기에 시작되어 1950년대의 도약기를 거쳐 60년대에 피크를 이루며 대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어떤 시련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서민의 삶과 정서로 녹여내려 했다. 당면한 현실을 이해타산으로 넘기려 하기 보다는 운명으로 수용하고 굽힌 자세로 헤쳐 나가려 했다. 때로는 <육체의 길>의 경우처럼 과장된 연기로 리얼리티를 떨어트리기도 했지만 <인생차압>의 이중생이나 <로맨스그레이>의 저명교수처럼 임기응변과 넉살로 극복하려 했다. 그래서 김승호 연기에는 해학적인 요소와 함께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
1.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삼애사, 1969, 157쪽)에는 전창근 감독의 <해방된 내 고향>(1947)이, 또 다른 그의 저서 『평전 한국영화인 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265쪽) 김승호 편에는 <밤의 태양>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술하였다. 그 밖의 연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