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쇼브라더스의 합작영화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의 주연으로 데뷔한 신인 배우가 있다. 바로 태권도와 무협 액션이 가능했던 연기자 김정란이다.
(그림1)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 국내 포스터
그녀는 다양한 액션과 대규모 폭파장면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영화 <여신탐>에 결코 운으로 캐스팅되지 않았다. 연기력과 액션 실력에 더해 해외 거주 경험과 여권까지, 이 영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배우였다.
그녀가 22세에 <여신탐>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자.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 원로 방송작가 김희창 선생으로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열두냥짜리 인생>(이만희, 1963), <또순이>(박상호, 1963) 등의 영화 각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린시절부터 연출자와 배우들을 접해왔고 이런 점은 그녀가 영화나 방송계에 편입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워낙 엄격하고 작품당 휴지기를 길게 두는 편이라 실질적인 생활은 어머니가 이끌었다.
(그림2) 부친 김희창 작가와 연출가 허규
1960년대 중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동남아 등 해외 각국으로 기술 이민을 권장하던 때, 그녀의 어머니는 부르나이 여학교에 교사로 파견된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청소년기를 부르나이에서 보냈고 19세에 귀국한 뒤에는 외국으로 미술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한다. 그런데 마침 다니던 화실 아래층에 연출가 허규의 극단 새문화스튜디오 연습실이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극단에 발을 디뎠고 문하생이 되었으며 수련과정을 거쳐 연극에 출연하게 된다.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와 극단 민예 소속 배우로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에 도시코 역으로, <고려인 떡쇠>에는 찌몽 역으로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한다. <고려인 떡쇠>는 아버지인 김희창 작가의 작품이다.
(그림3)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의 연극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의 한 장면
1974년에는 스승인 연출가 허규의 제안으로 KBS 오디션 프로그램 <신인탄생>에 출연해 입상하며 KBS 탤런트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엄격한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그녀의 활동을 반대했고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으며 방송국 내에서도 거리를 두었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인 시절을 보내던 중 그녀는 태권도 도장을 다니게 된다. 태권도 도장에서 요가를 알려주는데 요가를 하면 살이 빠진다는 당시의 속설 때문이었다. 하다 보니 송판 두어 장과 기와 일곱 장 정도는 깰 실력이 되었고 국기원에서 초단 단증도 받게 된다. 꽃꽂이와 뜨개질이 아닌 태권도가 특기라 하니 기자들은 당장 과장을 섞어 그녀를 태권도 3, 4단의 실력자로 소개했다. 1974~5년은 태권도 액션 영화가 등장해 흥행했고 발차기가 아름다운 챠리 셀(한용철) 같은 신인 남자배우가 인기를 얻던 시절이다. 태권도가 특기인 그녀에게도 곧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는 1976년 태권도 도장 관장님의 다급한 부탁으로 해외에 태권도를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문화영화에 출연한다. 원래 예정되었던 여자선수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대신 나갔던 것인데 ‘KBS 탤런트 김정란, 태권도 문화영화 <동과정>에 출연’이라는 소식이 작게 신문에도 실리게 된다. 얼마 후 영화사인 우성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긴급하게 우성사 사무실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다. 홍콩 쇼브라더스로 가 영화를 찍을, 액션이 되는 여배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우성사 사무실에는 김용덕 대표와 홍콩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배우이자 <여신탐>에 함께 출연한 남석훈이 그녀 앞에 있었다.
(그림4)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남석훈과 김정란. 뒤편으로 불타는 홍콩 쇼브라더스의 오픈세트가 보인다.
우성사에서는 오디션이랄 것도 없이 함께 인삼차를 마시며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그녀가 외국 유학을 준비 중이라 이미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김용덕과 남석훈은 더욱더 그녀를 반겼다. 당시는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외국에 거주 중인 신원보증인의 초청장과 재무보증 등이 필요해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너 외국 갈 수 있니?” “네”. “당장 갈 수 있니?” “네” “그러면 준비해라”
너무 쉽게 끝난 것 같지만 사실 그녀는 우성사가 찾던 배우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오디션 프로 <신인탄생>에서 검증한 연기력과 태권도 실력은 물론 여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홀로 홍콩 쇼브라더스로 출발한다.
홍콩 쇼브라더스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오픈세트에는 강과 산, 탑, 폭파시킬 별장과 여러 건물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촬영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사용해 이뤄졌다. 가히 동양의 할리우드였다. 그리고 그녀는 쇼브라더스 영화의 주연배우 대우를 톡톡히 받았다. 숙소와 자동차, 의상과 분장 그녀에게 제공된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를 스튜디오 분장실로 데려갔다. 그녀가 분장과 의상을 마치면 때로 옆 방으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기자들과 간단하게 촬영과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차에 오르면 그녀를 촬영장으로 데려갔다. 촬영장에서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있어 그녀는 감독의 지시대로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연기가 끝나고 그녀가 카메라 뒤로 빠져나오면 현장의 전담 매니저가 김정란 이름이 새겨진 의자를 펴주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이 보장되었고 촬영은 늘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림5)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벨트에서 화살을 꺼낸 뒤 석궁을 쏘는 장면이다.
(그림6)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오토바이 액션을 보여주고 있다.
<여신탐>은 일본과 홍콩, 한국의 여형사로 구성된 특별수사반이 스코틀랜드 출신 형사반장과 함께 보석밀매와 납치를 일삼는 범죄조직을 소탕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여형사들에게는 각자의 장기가 있는데 김정란이 연기한 한국형사 고은미는 석궁과 태권도가 특기이다.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국내장면에서 범죄조직에 위장 잠입한 그녀는 한국의 악당들을 태권도로 홀로 소탕하며 몸을 사라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후반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석궁을 쏘며 몸을 날리는 등의 화려한 액션이 등장한다.
(그림7)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 홍콩 포스터
<여신탐>은 홍콩개봉 당시 영어 제목이 <Deadly Angels>였는데, 세 명의 미녀들이 악당을 퇴치한다는 설정이 1976년에 방영된 미국 abc 방송국의 드라마 <Charlie's Angels(미녀삼총사)>와 유사하다. 당시 쇼브라더스는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킹콩>(1976)의 흥행을 보고 <성성왕>(1977)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쇼브라더스는 국제적인 흥행의 흐름을 발 빠르게 파악하고 제작, 배급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한국의 영화사들도 이런 흐름에 공동제작 혹은 투자의 형태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림8)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 홍콩 촬영 중 이한상 감독에게 출연 섭외를 받은 김정란.1)
그녀는 내심 홍콩에서 촬영을 마친 후 바로 유학을 가려 했지만 촬영 중에도 영화출연 섭외가 쇄도했다. <여신탐> 촬영 중 홍콩의 명감독 이한상으로부터 <백사전>(이한상·최동준, 1978)의 출연제의를 받았지만 노출장면 때문에 거절했는데 그 역할은 대만 배우 임청하에게 돌아갔다. 국내 영화사들의 계속된 출연요청으로 그녀는 <여신탐>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특명>(김선경, 1976),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정무문(속)>(남석훈·초석, 1977), <금호문>(김선경, 1977), <용왕 삼태자>(최동준, 1977) 등 쉴 새 없이 작품을 이어갔다.
(그림9)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포스터.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상관영봉이고 흰옷을 입은 이가 김정란이다. 상관영봉의 화려한 손모양이 포스터에도 드러난다.
1977년 출연한 <소림사 흑표>는 당시 무협영화의 히로인이었던 대만 출신 배우 상관영봉과 공동 주연한 작품이다. 상관영봉은 이미 <소림사 18동인>(1976) 등의 영화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무협 배우였고 쿵푸 액션을 하다 보니 이 작품에서는 그녀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쿵푸는 손동작이 화려하고 사전 동작이 많다 보니 카메라 앞에서 주목을 받기 쉬운 반면 태권도는 발차기 위주여서 액션을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화면에서 얼굴이 멀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일단 중국식 의복을 입으면 연기가 달라졌다. 액션을 하려면 목을 한 바퀴 돌려 긴 머리카락을 감아서 정돈한 뒤 옷을 접고 대사를 하고 손동작을 하는 식으로 사전 동작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얼굴이 화면에 더 오래 나갈 수 있었지만 태권도는 한번 자세를 잡으면 바로 발차기를 하고 주먹이 나가는 식이었다. 이런 동작의 차이 때문에 화면에서 돋보이기 힘들어 그녀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으로 기억한다.
(그림10)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의 한 장면. 검은 옷을 입은 상관영봉과 흰 옷을 입은 김정란
쿵푸가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액션의 합을 그대로 외우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국내촬영은 장비도 열악하고 준비도 오래 걸리다보니 무조건 몰아찍기를 해야 되었기에 한번 찍을 때 최대한 길게 촬영했다. 그러니 액션도 길어져 합은 열 동작 이상이었다. 사전에 액션 연습도 없이 촬영 직전 현장에서 처음으로 열 동작 이상을 알려주면 그대로 외워 촬영했고 한 동작이라도 틀리면 사고와 부상으로 이어졌다.
큰 사고는 <금호문>(김선경, 1977)에서 발생했다. 소품이 부족해 촬영용 칼이 아닌 육중한 무쇠칼을 사용했던 게 화근이었다. 상대 배우가 무쇠칼로 액션을 하다 타이밍을 놓쳐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게 된 것이다. 머리에 둘렀던 진주 장식이 터지고 머리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촬영지가 고창 정읍의 선운사다 보니 열악한 교통상황에서 급히 갈 수 있는 병원조차 없었다. 제작진은 담배를 으깨 피가 나는 머리를 지혈한 뒤 그녀를 리어카에 실어 가축병원으로 옮겼다. 마취도 없이 환부를 꿰매는 것으로 처치를 마친 후 현장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다음날부터 촬영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미 개봉일이 잡혀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장 스태프들은 그나마 진주 머리 장식이 있어 큰 화를 면했다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부은 얼굴로 고통 속에서 촬영을 이어갔다. 촬영을 마쳐갈 즈음 꿈을 꾸고 찾아온 어머니와 함께 겨우 서울로 올라와 제대로 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안전장치 하나 없던 열악한 촬영 환경에서 사고의 위험은 도처에 있었고 사고 후의 수습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다. 그녀뿐 아니라 무협액션장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 모두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사나 작품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협액션영화 촬영현장의 조건이나 대우는 국내가 홍콩이나 대만보다 훨씬 열악했다. 당시 무협액션영화에 대한 국내 영화계의 천대가 촬영현장의 열악함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림11) <금호문>(김선경, 1977)의 한 장면. 사고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진주머리 장식이 눈에 띈다.
대만에서는 로웨이가 제작한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과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을 촬영했다. 두 편 모두 성룡과 함께 출연했는데 <사학비권>에서는 성룡에게서 권보를 빼내기 위해 소년처럼 남장을 하고 접근하는 역할이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진행되는 합작영화의 경우 사전에 시나리오를 보기가 힘들었다. 보통 합작영화 제작 시 한국 영화사가 전담했던 한국 로케이션 장면의 대본 정도만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대만의 영화사가 전담한 대만 촬영분량에서는 역할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현장에서 캐릭터를 파악하고 연기해야 했다. <사학비권> 또한 대만 촬영현장에서 당일 그날의 의상을 보고서야 남장소년 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장 통역조차 한국말이 서툰 화교라 대부분 눈치껏 해석하고 연기해야 했다. 가령 “여자인데 남자로 분장했어. 배고파. 빵 먹고 싶어.” 라는 통역된 감독의 말만 듣고 ‘남장을 하고 빵을 훔쳐먹어야 하는 장면’이라 판단하고 연기했다. 그러다 옆에서 한국말을 조금 아는 성룡이 “귀여워” 라고 첨언하면 그녀는 귀여운 표정이나 코를 치는 연기를 더하는 식이었다. 정보 없이 현장에서 눈치껏 연기하다 보니 촬영 중인 화면의 사이즈를 알리도 만무했다. 그 덕에 자신이 찍히지 않는 쇼트에서도 혼자 열심히 연기해 감독이 몇 장면 더 찍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12)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소년처럼 남장한 모습이 잘 어울린다.
(그림13)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비호성주의 딸 황주로 돌아온 모습이다.
<사학비권>과 <오룡대협>의 대만 촬영현장은 의사소통이 어려울 뿐 분위기나 대우는 좋았다. 분야별로 준비가 잘 되어있어 진행이 순조로웠고 식사를 굶거나 밤을 새는 경우도 없어 좋은 컨디션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촬영장에서 그녀 뒤에는 언제나 발받침과 차를 담은 보온병이 졸졸졸 쫓아왔는데 키가 작은 그녀를 위해 전담 스태프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발받침을 가지고 따라다녔다. 뿐만아니라 대만 제작팀은 당시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스폰지 속굽이 있는 키높이 부츠를 특별히 제작해줄 정도로 세심하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줬다.
(그림14)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 대만 촬영현장. 방수일, 성룡, 진지화 감독, 김정란.
김정란의 오른쪽에는 촬영장에서 항상 그녀를 따라다니던 발받침과 보온병이 있다.
하지만 액션에 대한 부담은 여전했다. 덤블링을 하고 2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정도의 액션은 직접 연기해야 되었고 그 수준을 넘는 경우는 대역이 대신했다. 중국에는 무술 인구가 많아 대역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한국에는 무술이 가능한 키 작은 사람이 없어 난감할 때가 많았다.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보물이 든 궤를 차지하기 위해 남자배우들과 결투를 벌이다 죽임을 당하는데 결투 내내 맞고 쓰러지는 액션을 해야 했다. 대역이 있다 해도 어지간한 액션은 모두 해야 되었기에 비가 오면 아파서 울 정도로 늘 근육통에 시달렸다.
(그림15)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 촬영현장에서 김정란과 대만의 무술감독.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에 난감해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몇 편의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이 그중 한 편이다. 술집 작부와 정신이상자라는 1인 2역을 맡았는데 조연이긴 했지만 개성 있는 역할이라 선뜻 응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파에 시달린 인물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해냈다. 무엇보다 연기만 하면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고 ‘어우, 나도 막 이런 연기가 되네.’ 라며 신나서 한 역할이었다.
(그림16)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의 한 장면
<신궁>(임권택, 1979)에서는 술집 주인으로, <짝코>(임권택, 1980)에서는 짝코의 애인 역으로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남겼다. <짝코>는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능청맞은 연기로 어둡고 진지한 극의 분위기를 재치있게 살렸는데 그녀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림17) <짝코>(임권택, 1980)의 한 장면
연기에 재미를 느낀 그녀는 작은 역이라도 열심히 참여했다. <물보라>(김수용, 1980)에서는 동네 아낙으로 출연했는데 바닷가에서 여자들이 뛰어와 서는 장면에서 그녀는 제일 끝에 서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녀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촬영 전, 다른 배우들에게만 땀처럼 보이도록 얼굴에 물을 뿌려준 상태였다. ‘나도 땀을 흘렸어야 되는데…’ 걱정이 된 그녀는 얼른 바위틈 웅덩이로 뛰어가 고여있는 물을 찍어 얼굴에 뿌렸다. 그걸 본 김수용 감독이 웃으며 “정란이까지 찍어줘”라고 해서 출연장면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림18)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의 한 장면
(그림19) TBC 드라마 <대춘향전>(1980)의 한 장면. 왼쪽 끝이 향단 역의 김정란, 오른쪽 끝이 춘향 역의 이경표이다.
그녀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텔레비전 방송 활동도 겸했다.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에는 정순누나 역으로, TBC 특집 드라마 <대춘향전>(1980)에는 향단역으로 출연했으며 꾸준히 방송 섭외를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집안에서 그녀의 결혼을 서둘렀고 1981년 결혼 후 남편의 반대와 육아로 자연스럽게 은퇴하게 된다.
그녀는 영화계에서 약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굵직한 무협 액션 영화에 출연하며 1970년대 액션 여배우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의 작품활동은 국내 무협액션영화의 특징과 여성 연기자의 조건, 합작영화의 제작 관행 등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그녀의 지난 활동이 앞으로도 꾸준히 조명받기를 바란다.
1) 경향신문 1976년 9월 20일 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