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코미디언 약사(略史) 2 – 백금녀, 그 이후

by.박선영(영화사연구자) 2019-02-13
장소팔 고춘자
앞선 여성코미디언 약사 1에서는 박옥초와 백금녀의 영화에서의 활약을 살펴보았다. 악극단의 스타였던 박옥초가 영화로 무대를 옮기고 난 뒤 70여 편의 영화에서 개성 있는 조연과 단역을 맡아 신 스틸러가 되었다면, 백금녀는 확실한 자신만의 코미디 콘텐츠를 가지고 주연과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았던 경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여성 코미디언들은 영화보다는 라디오, TV 등 여타의 매체에서 더 돋보이는 활약을 하였거나, TV에서의 스타성을 가지고 영화로 영역을 넓힌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코미디영화 전성기에 남성 코미디언들이 주인공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동안, 백금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 코미디언들은 조연이나 단역 이상의 역할을 맡지 못했다. 이들은 악극단의 전성기와 라디오 시대를 거치며 눈부신 활약을 했으나 흥행 시장이 영화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주변화 되었거나 영화를 건너뛴 채 쇼 무대에서 TV로 이동하여 스타덤을 이어갔다. 

물론, 코미디의 영역 자체에서 여성들은 대체로 남성들에 비해 좁은 입지를 가져왔던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가부장제 하의 젠더 규범에서 여성성은 “겸손함과 어여쁨”으로 규정되어 왔기 때문에 “광대짓 하기나 바보짓 하기”는 여성들의 행동으로 부적절하게 여겨져 왔다. 즉, 여성이 코미디 발화의 주체가 되는 것은 “문화적으로 결정된, 이상적인 여성 행위에 대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1) 우리나라뿐 아니라 영미권이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코미디 산업의 모든 영역에서 오랫동안 남성들이 지배적인 것이 일반적2)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코미디 산업에서 남성의 우세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본다 하더라도, 한국 코미디영화와 여성코미디언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적인 측면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 해에 평균 10편 이상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이 기간 동안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언코미디가 50여 편 가까이 제작되었던 상황에서, 여성 코미디언이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영화는 매우 드물었다. 단편적인 무대 코미디나 만담, 쇼 등에서는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여성 코미디언들은 거의 대부분의 코미디영화에서 조연이나 단역에 머물렀다. 두 번째,  코미디영화 속 여성 재현의 문제이다. 프로이트는 두 남성 사이의 농담에서 여성의 역할이 “적대적이고 성적인 공격의 대상”3)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1950-1970년대 한국의 코미디영화 속 여성들 역시 대체로 프로이트적 규정 안에서 유형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남자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미용사> 등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들이 매우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여성 캐릭터들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른바 ‘남자 시리즈’ 속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교화’되어야 할 대상이자 남성 주인공의 사회적 성취와 더불어 주어지는 ‘성적 보상’으로 객체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영화의 여성 주인공은 대부분 미모가 두드러지는 젊은 여성 배우들이었고, 여성 코미디언들은 외모로 웃음을 담당하는 조연이나 단역으로 역할이 한정되었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영화의 존재는 매우 이채로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의 코미디영화 안에서의 여성 코미디언들의 문제적 위치와 재현 양상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코미디 배우들의 존재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고 제한된 영역 안에서나마 다양한 웃음의 코드들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기억되어야 한다. 이들은 박옥초와 백금녀 만큼의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 스타였다고 할 수는 없어도, 무대에서 혹은 TV에서 매우 강렬한 웃음을 만들어 내었던, 우리 시대의 코미디언들이었다. 

가장 먼저 언급할 사람은 고춘자(1922-1995)이다. 고춘자는 장소팔과 함께 콤비를 이루어 1950-60년대 만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고춘자와 장소팔의 활약은 e-영상역사관에 남아 있는 몇 편의 문화영화, <내고향 좋을시고>와 <민요잔치> 등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고춘자는 활동 초기에는 장소팔, 후기에는 김영운과 짝을 이루어 대화만담과 민요만담 등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영화 출연은 콤비였던 장소팔에 비해서도 훨씬 뒤늦은 편이었다. 장소팔은 <여성 코미디언 약사> 1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처가>(김수용, 1958)에서 백금녀와 함께 주연을 맡아 출연한 기록이 있는데, 고춘자의 경우에는 196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단 한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김화랑 감독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1965)가 그것인데, 여기서 고춘자는 장소팔과 함께 실명 그대로의 만담가로 단역 출연했다.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 포스터
(그림1)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김화랑, 1965)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 컬러사진으로 실린 인물은 안경쓴 서영춘과 김희갑, 그 밑이 구봉서.
'쥐’라는 글자 바로 왼쪽이 황정순, 황정순 왼쪽으로 두 번째가 고춘자이다.

다음으로는 백금녀를 벤치마킹하여 등장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이 있다. 가장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것은 오천평(1943- )이었는데, 오천평의 본명은 장정숙으로 오천평이라는 예명 자체가 그의 캐릭터를 대변해주었다. 박영한 작가의 『머나먼 쏭바강』의 한 대목을 보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사들을 위문하러 갔던 위문 공연단의 공연을 보면서 한 병사가 저 기막히게 잘 하는 여자가 누구냐고 질문하자, 바로 오천평이라고 대답하면서 ‘자네는 TV도 안 보나’라고 반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천평은 1970년대 TV에서 ‘기막히게 잘하는’,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유명 연예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오천평은 그 존재감이 TV에서만큼은 크지 않았다. 오천평이 출연했던 첫 영화는 이규웅 감독의 코미디 <치마바람>(1967)이었는데, 여기서 오천평은 주인공 김지미와 계원들이 놀러간 바닷가에서 마주친 여성으로, 서영춘과 함께 ‘역할전도’ 코미디를 선보였다. “밴드! Love Portion Number 9!”이라고 소리치며 무리 안으로 뛰어든 오천평은 서영춘과 말싸움을 하다가 서영춘을 어깨에 둘러메고 바닷물에 내팽개친다. 바닷물에서 정신을 잃은 서영춘을 다시 어깨에 메고 모래사장으로 돌아온 오천평은 서영춘의 배를 누르고, 서영춘의 배에서는 물과 함께 물고기들이 튀어나온다. 만화적 상상력을 보여주며 폭소를 유발하는 이 장면은 백금녀-서영춘 콤비 코미디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천평은 이 영화에서 백금녀의 역할을 이어 받아 서영춘과 대구를 이루는 코미디를 보여주었다.

치마바람 스틸
(그림2) <치마바람>(이규웅, 1967)의 한장면.
가운데 하얀 가운 차림의 김지미, 그 오른편 뒤쪽으로 오천평과 서영춘, 그 앞쪽으로 김지미에게 오른팔을 두른 사람이 도금봉이다.

오천평의 영화 속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스틸 사진은 임권택 감독의 1969년 코미디영화 <신세 좀 지자구요>에서인데, 이 스틸사진에 찍힌 오천평의 모습은 실제 영화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신세 좀 지자구요 오천평
(그림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의 오천평 정면 스틸 사진.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천평 등장하는 장면을 실제 존재하지 않으며, 아마도 편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오천평이 등장했던 영화로는 <공주님의 짝사랑>(최은희, 1967), <가요반세기>(김광수, 1968), <남정임 여군에 가다>(김화랑, 1968), <타잔 한국에 오다>(김화랑, 1971), <삼일천하>(신상옥, 1973), <청춘25시>(이기영, 1973),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 <관광대행진>(이명식) 등이 있는데, <공주님의 짝사랑>에서는 철없는 공주 남정임 때문에 골탕을 먹는 정상궁 역을, <남정임 여군에 가다>에서는 남정임과 함께 입대하여 훈련을 받는 계모임의 일원 역을, <타잔 한국에 오다>에서는 배삼룡을 사랑하는 뚱순이 역을 맡아 웃음을 유발했다. 오천평의 출연작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은 <삼일천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오천평은 궁녀 혁명가 ‘고대수’로 열연하여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한 고대수(오천평)는 괴력을 가진 여성으로 등장하여, 굶주린 평민 남성들을 상대로 거친 액션신을 벌이고 이어 등장한 변수(박노식)에 의해 각성한 뒤 개화당을 도와 혁명을 이끄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이어지는 고문과 탈주, 그 뒤 거리에서 백성들의 돌에 맞아 비장한 최후를 맞게 되는 고대수 역은 오천평의 뛰어난 연기력과 색다른 연기의 지평을 보여줄 수 있는 주요작이다.
 
삼일천하-1
삼일천하-2
(그림4)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장면.
 굶주린 평민 남성들이 궁중에서 나온 음식들을 버리려는 궁녀 고대수(오천평)에게 덤벼들자 이들을 제압하는 장면. 이후 고대수는 각성하고 혁명에 동참한다.

오천평의 뒤를 잇는 ‘뚱순이’ 캐릭터로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써 나갔던 배우 중 한 사람은 최용순(1946-2000)이었다. 최용순 역시 영화보다 TV에서 더 존재감을 드러냈던 배우였다. 1969년 KBS 탤런트 공채로 시작하여 각종 TV 코미디에서 인기를 모은 최용순은, 이후 브라운관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에 진출한 경우였다.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용순은 탄탄한 연기력과 귀염성 있는 외모로, 결혼과 연애 서사 코미디에서 주, 조연을 맡곤 했다.

 
나의 인생고백 2탄
(그림5)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결혼 후 본가에 온 최용순과 그의 부모. 오천평은 이 영화에서 최용순은 엄마로 등장했다. 사진 중간이 오천평, 오른쪽 최용순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최용순은 <산에 가야 범을 잡지>(이형표, 1969)를 시작으로, <팔도 며느리>(심우섭,1970),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 <너는 여자 나는 남자>(김응천, 1979), <서울은 여자를 좋아해>(남기남, 1987)까지 총 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팔도며느리
(그림6) <팔도며느리>(심우섭, 1970)의 한 장면.
최용순은 김지미, 사미자, 여운계 등과 함께 김희갑의 팔도며느리 중 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맨 왼쪽부터 최용순, 사미자, 김지미

잘했군 좋았군
(그림7) <잘했군 좋았군>(고승호) 포스터. 가운데 부분 왼쪽 원안에 파란색 치마 한복을 입은 여성이 최용순이다.

그 중 <나의 인생고백 제2탄>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배삼룡을 주인공으로, 최용순이 상대역을 맡았다. 배삼룡과 최용순을 투 톱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35세의 노총각 배삼룡이 최용순과 결혼한 뒤 벌어지는 여러 가지 소동을 그렸다. 순진한 노총각 배삼룡은 최용순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의 부모와 섣부른 약속을 한 터라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다. 신혼 첫 날 밤부터 왕성한 식욕과 성욕을 과다 노출하는 최용순의 캐릭터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며, 또한 이를 통해 자신의 코미디를 연출한다. 예컨대, 끝없이 음식을 먹는 장면이나 배삼룡에게 억지로 섹스를 강요하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한다. 최용순이 출산으로 인해 집을 비웠던 사이에 배삼룡은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데, 모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순간에 아기를 안고 등장한 최용순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다짐을 늘어놓는다.

나의 인생고백 2탄
(그림8) <나의 인생고백 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신혼여행 첫 날 밤의 배삼룡과 최용순.

<나의 인생고백>에 등장하는 최용순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과다한 식욕과 성욕의 소유자로 단순화되고 대상화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영화 자체가 남성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신체적 우위를 내세운 최용순의 욕망은 항상 즉각적으로 충족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일방향적이고 일시적인 충족에 불과하다. 배삼룡이 끊임없이 새로운 여성을 욕망하고 최용순을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배삼룡이 진심으로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과 동시에 최용순은 ‘좋은 아내’가 되기를 약속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그들 사이의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아이까지 업은 배삼룡과 군것질을 하면서 지나가는 최용순의 대조적인 모습이 엔딩씬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나의 인생고백 2탄
(그림9) <나의 인생고백 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신혼 첫날밤부터 식욕과 성욕을 과다노출하는 최용순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이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나의 인생 고백 2탄>은 최용순이라는 인기 TV 코미디언과 당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배삼룡을 스크린으로 불러 왔지만, 최용순의 연기력이나 매력을 전혀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가하면, 배삼룡은 항상적 우울증을 가진 사람처럼 무기력하고 고독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다소 엉뚱하고 바보스러운 ‘비실이’ 캐릭터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이 영화의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영화는 건장한 신체를 가진 여성 코미디언을 활용하는 가장 손쉽운 방식을 택하여,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시켰다. 한국 영화 산업 자체의 위기를 겪게 되는 1970년대를 거치며 코미디영화들은 1960년대 코미디들이 주었던 동일시의 위안이나 전복의 쾌감을 줄 수 없는, 기묘한 웃음의 코드들만 남긴 채 사라져갔다.
 
그밖에 김희자(1934~ )는 1950년대 후반 HLKZ-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일한 여성 고정출연자였는데, 서영춘과 함께 무대에 올라 빠르게 주고받는 코미디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입담을 자랑했다. 그 역시 1950년대 악극단에서 데뷔하였고 TV코미디로 큰 인기를 누렸다. 김희자는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기록이 있다. <선화공주>(최성관, 1957),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 <관광대행진>(이명식, 제작년도 미상)인데, 세 편 모두에서 주요 배역을 담당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중 김희갑과 함께 출연했던 <선화공주>, <관광대행진>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서는 김희자가 어떤 역을 맡았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며, <우리강산 차차차>의 경우에는 단역으로 출연한 김희자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강산 차차차
(그림10)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 맨 오른쪽 김희갑 옆에서 춤추는 이가 김희자, 김희자 옆에는 백금녀가 보인다.

이순주(1942~ )는 쇼 무대와 라디오의 전문 여성 MC로 활약했으며 주로 TV 코미디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순주는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 <생활의 명랑화>, <팔도노랭이>, <당나귀 무법자>, <타잔 한국에 오다> 등 5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팔도노랭이>는 <팔도강산>의 아류작 중 하나로, 김희갑과 박옥초가 부부로 등장하여 결혼한 일곱 딸들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전반적인 구성이다. 이순주는 코미디 콤비인 송해와 함께 넷째 딸 부부로 등장하여 비교적 비중 있는 역할을 소화했다. <당나귀 무법자>에서는 서영춘과 사랑을 나누는 술집 여성인 단역을 맡았다.

팔도 노랭이 포스터
(그림11) <팔도노랭이> 포스터.
가운데 김희갑을 중심으로 왼편 위에서부터 세 번째, 구봉서, 서영춘 다음이 이순주, 그 밑이 안인숙. 오른쪽 맨 밑이 백금녀이다.

김희자와 이순주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상대역 여성들이 박옥초와 고춘자에서 김희자와 이순주로, 거의 20살 차이가 나는 젊은 세대로 바뀌는 동안에도 여전히 남성 코미디언들은 취직과 결혼이 지상과제인 ‘청춘’ 주인공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에 주로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은 주로 단역을 맡으며 영화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 초를 마지막으로, 한국영화사에서 코미디영화 제작은 더 이상 호황이 아니었다. 매우 드물게, 이전 작품들의 리메이크가 만들어졌고 심우섭, 이형표 등의 감독들만이 1년에 한 작품 정도로 코미디영화 제작의 맥을 이어가는 형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여성 코미디 배우들의 입지는 또 다시 변화한다. 배연정과 권귀옥이 등장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에 대한 코미디 의존도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를 영화 속에 각인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배연정(1952- )은 1969년 가수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가 1971년 MBC 공채 코미디언 1기로 정식 데뷔하였다. 당시 MBC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던 <웃으면 복이와요>에 김희자의 대타로 출연하였다가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으며, 1973년 TBC로 옮기면서 배일집과 함께 ‘고전유머극장’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 이들은 ‘코미디계의 신성일, 엄앵란’으로 불리며 1970-80년대 TV 코미디의 전성기를 누렸다.4) 배연정 역시 TV에서의 인기를 업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1970년대 말부터 약 10년간 총 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는 주지하다시피 한국영화의 침체기였고, 특히 코미디영화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 배연정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1960년대 코미디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이었던 심우섭, 이형표가 자신들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들에서 배연정은 코미디영화의 주연배우 혹은 비중 있는 조연배우로 등장했다. 출연작은 <마음 약해서>(심우섭, 1979),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형님먼저 아우먼저>(심우섭, 1980), <청춘을 뜨겁게>(심우섭, 1981),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 <전설철인 키매랑>(은희복, 1989) 등의 7편이다.
 
이 중에서 배연정을 주연으로 한 <난 모르겠네>는 태권도 유단자인 말괄량이 배연정의 연애와 결혼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였다.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했던 TV 스타 배연정은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청춘 코미디’, 즉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을 맡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배연정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일인 쇼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동양재벌 사장 딸이지만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인 동자(배연정)는 아버지가 정해준 신랑감 후보들을 모두 물리치고 쥐포장수로 변장하고 있었던 병태(장고웅)와 사랑하게 된다. 설정부터 결말까지,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한국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난 모르겠네 포스터
(그림12)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포스터. 위편 왼쪽에서 태권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바지 입은 여성이 배연정.
 

이후의 출연작에서 배연정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여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다음 작품이었던 <마음 약해서> 역시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임희춘 등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TV 코미디의 남성 스타들과 배연정, 권귀옥 등의 여성 코미디 스타들을 총 출동시켜 얽히고 설킨 연애담을 보여주는 청춘 코미디였다. 배연정은 까다로운 ‘올드 미스’로, 권귀옥은 결혼상담소 소장 서영춘의 딸이자 ‘조사부장’으로 등장했다.

마음약해서 포스터
(그림13) <마음약해서>(심우섭, 1973) 포스터
가운데 안경 쓴 구봉서의 얼굴 왼쪽이 임희춘이고, 그 옆에 임희춘과 결혼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배연정이다.
구봉서와 임희춘 바로 밑이 이기동과 권귀옥이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더 좋아>는 김기풍 감독의 동명의 영화(1965년)의 리메이크로, 원작은 여장남자 코미디의 열풍을 불러왔던 서영춘의 출세작이었다. 이 전설적인 영화의 리메이크작이었던 1983년 <여자가 더 좋아>에서 배연정은 여장남자 식모인 장고웅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주인집 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여자가 더 좋아-1
여자가 더 좋아-2
여자가 더 좋아-3
(그림 14) 1965년의 전설적인 코미디영화 <여자가 더 좋아>의 리메이크 작인 1983년 <여자가 더 좋아>에서
배연정은 여장남자 식모 장고웅의 잔소리, 장고웅에게 반한 남편 주병진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며느리 역을 맡았다.

 
권귀옥(1950~ )은 MBC 탤런트 공채2기로 1970년 데뷔한 이후 코미디언으로 전향하여, 1973년부터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기동과 함께 ‘땅딸이와 늘씬 미녀’로 활약했던 권귀옥 역시 TV 코미디로 전국적 인지도를 올리고 난 뒤 영화로 진출한 경우였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는 총 4편으로 <나에게 조건은 없다>(강대선, 1971), <시집갈래요>(이상언, 1974), <마음약해서>(심우섭, 1979), <아리송해>(심우섭, 1979) 등이었다. 이 중 코미디언으로 전향하기 전에 출연했던 <나에게 조건은 없다> 한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편은 코미디영화들인데, 권귀옥은 <아리송해>의 주연을 맡아 이기동과의 콤비 연기를 영화로 옮겨 보여주었다.
 
아리송해 포스터
(그림15) <아리송해>(심우섭, 1979)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 권귀옥.
권귀옥의 트레이드 마크인 표정 연기와 ‘늘씬 미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몸매를 부각시킨 포스터이다.

이 영화는 <초우>(정진우, 1964)의 설정을 빌어와 가정부 정옥(권귀옥)과 운전사 두만(이기동)의 가짜 연애, 그리고 가수로 성공하는 정옥의 성장담을 담았는데 무엇보다 권귀옥의 매력에 기댄 영화였다. 주인집 가족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당당한 ‘식모’ 역할은 당시 영화 속에서 하층계급 여성을 그리는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으며, 권귀옥 코미디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이 영화를 끝으로, 권귀옥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1980년 결혼과 함께 배우 생활을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약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영화에서의 활약상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고춘자, 박옥초와 같은 조연급 출연자들부터 백금녀, 오천평, 최용순과 같이 건장한 신체를 가진 코미디언들이 맡았던 역할들, 이순주, 배연정, 권귀옥 등 미모를 앞세운 코미디언들이 보여줄 수 있었던 코미디의 스타일은 매우 다른 것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코미디의 원천으로 삼아 확실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했고, 그 결과 다양한 스펙트럼의 코미디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한국영화 코미디사에서 이들이 구축했던 캐릭터와 웃음의 방식들은 시대적 한계와 함께 다시 한 번 더 논의되고, 좀 더 기억되어야 한다.

1) Kott hoff, Helga,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Elsevier B.V, 2006, p.12.
2) Inger-Lise Kalviknes Bore, “(Un)funny Women: TV Comedy Audiences and the Gendering of Humour”,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no.13(2), Sage Publications, 2010.
3)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 6.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임인주 옮김, 열린책들, 2007(4쇄), 129쪽.
4) “[문화] 오랜만입니다. 배연정씨가 걸어온 길”, 『문화일보』, 201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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