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움직이는 홍길동! 한국 최초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신동헌

by.심혜경(영화사연구자) 2019-02-11
신동헌 감독
만화영화 홍길동 신문광고
(그림1) <홍길동>(신동헌, 1967) 신문광고, ‘한국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나왔다 홍길동’1)

호피와 차돌바위 신문광고
(그림2) <호피와 차돌바위>(신동헌, 1967) 신문광고.
 ‘약속대로 또 나왔다!’ 영화의 예고편을 TBC-TV를 통해 매일저녁 광고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2)

어쩌면 ‘홍길동(洪吉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홍길동’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견본용 이름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의를 실천하고자 한 가상의 위인이자 의적(義賊, Dark Hero), 홍길동이 평범한 인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16세기 경)에서 탄생한 홍길동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아마 이 두 형제의 역할이 혁혁하지 않았을까.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1300여회 연재)에서 홍길동은 그 모습을 찾고, 형 신동헌 감독의 한국 최초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에서는 드디어,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던 그 <홍길동>이 2008년 5월 41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소년 용자 길동(少年勇者ギルドン)>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이 영화는 일본 오사카 필름아카이브에 일본어판 16밀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를 복제해 한국에 남아있던 사운드 필름과 동기화시켜 복원, 10년 전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
(그림3) 신동우의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연재)3)

당시 신문기사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듯이 <홍길동>이 개봉된 1967년은 ‘특수오락영화 붐’이었다. 특수영화란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같은 공상과학 영화, <흥부와 놀부>(강태웅) 같은 인형극 영화는 물론 <홍길동>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의 영화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특수영화는 ‘사랑 타령의 극영화에 식상한 관객에게 무한한 공상과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4)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장르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관객으로 하는 장르로 일컬어지던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렇게 특수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신문들을 보고 자라 나름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일군의 관객으로 성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 상영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에 선두로 나섰다. 신동헌의 <홍길동>은 1967년 1월 21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만들어진 <호피와 차돌바위>는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 15일 또 다시 스크린에서 어린이 관객과 만났다.   
 
훼스탈 광고의 신동헌 감독
(그림4) 당시 방송인 전영우, 여성 산악인 김정심, 한글학자 양주동, 극작가 이서구 같은 명사들이 등장해 광고했던
한독약품의 소화제 훼스탈 광고에 신동헌 감독도 기용되었다.5)

화백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화의 모든 유형-만화 삽화와 한 칸 만화, 서술형 만화와 단행본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까지-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한 가히, 한국만화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다. 벽성공립보통학교와 회령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부, 도서부, 미술부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학생잡지 《형설시대》와 《학생》에는 그가 그려 보낸 만화가 당선되어 실린 적도 있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의 교편을 잡다가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내려와서는 학원 교재 삽화일과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대학교 예과 이과 갑류에 진학하였다. 충무로에서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을 만나 인연을 맺어 『스티브의 모험』(1947)을 간행한 것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대부분은 인천, 거제, 동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부산 《연합신문》 문화부에 전속만화가로 근무하면서 4컷 만화 「주태백」을 그렸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신동헌은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잡지 《여원》, 《새벗》, 《학원》 등에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그가 신문사의 전속만화가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옮겨가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해 3월부터 극장과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달부의 ‘럭키 치약’ 애니메이션 광고, 엄도식의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인기를 끌었고, 신동헌 역시 진로소주의 제안으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에 뛰어들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1961년 12월 KBS가 개국하면서 이를 텔레비전용 16미리로 축소 프린트로 만들어 송출했다.6) 그는 자신의 집에 ‘신동헌프로덕션’을 차려놓고, 해외 전문 서적을 찾아가며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연구했다. 신능파(넬슨 신), 정병권, 김대중, 신동철, 신동우 등 애니메이터와 컬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진로소주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다. 

진로소주광고2-1
진로소주광고2-2
진로소주광고2-3
(그림5) 진로소주 두 번째 광고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

진로소주광고3-1
진로소주광고3-2
진로소주광고3-3
(그림6) 진로소주 세 번째 광고 ‘파라다이스’

첫 번째 광고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에 연료로 진로소주를 넣는 것이 그 내용이고, 두 번째는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라는 내레이션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직장인들이 진로소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제작한 ‘파라다이스’ 광고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라는 광고 음악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선원들이 파라다이스 섬에 내려 그곳의 여인들과 소주를 즐기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신문사 기자의 자격으로 해군 함정을 타고 하와이까지 항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이 광고에 삽입한 음악은 부산 MBC 피디였던 손권식이 작사하고, 허영철이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이 방식, ‘선녹음 후작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텔레비전 광고로서는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었다. 음악과 동작이 리듬감 있게 맞아떨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이후 신동헌프로덕션에는 제약회사, 양조회사, 섬유회사, 전자회사의 극장용·방송용 애니메이션 광고 문의가 쇄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사용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일부와 애니메이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어린이 대상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애니메이션의 제작의 포문을 열은 영화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계몽이나 선전을 위한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던 국립영화제작소를 제외하면 민간에서는 애니메이션 광고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계몽과 상품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는 중요한 매체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들은 애니메이션과 대중을 보다 친숙하게 해주는 매개였던 데다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인력들의 실질적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선거 홍보 애니메이션 <공명선거의 노래>-1
선거 홍보 애니메이션 <공명선거의 노래>-2
선거 홍보 애니메이션 <공명선거의 노래>-3
(그림7) 신동헌이 제작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중,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이 제공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갖인 이 한표로’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장면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장면 정부는 공명선거 중요성 인식을 위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7)의 제작을 신동헌프로덕션에 의뢰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국립영화제작소 이전의 담당기관)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공명선거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이후 새롭게 제정된 양원제를 담은 선거법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이 문화영화의 후반부 3분가량의 애니메이션은, ‘선거일 7월 29일이 참다운 민주주의 기초를 이룩할 뜻 같은 날이므로,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의사로 공명한 선거를 실시해야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두 번의 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와 정부 부처에서 의뢰하는 문화영화의 애니메이션 부분 제작을 통해 신동헌은 24프레임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렇게 경험이 무르익은 그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영화에 도전한다. 영화 선진국에서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홍길동 1권 표지
(그림8) 신동우의 연재만화 단행본 『홍길동』 1권 표지(근일문화사, 1968년 발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전」이 만화가 신동헌 씨의 총지휘로 완성되었다.
상영시간 1시간 15분의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양민을 괴롭히는 양반에 소년 「홍길동」이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에 현대적인 「코믹」 「스타일」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66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만 여 장의 그림을 그려 7개월 만에 제작 완료되었다.
일반영화완 달리 연기 「로케」 「세트」 등이 필요 없지만 「홍길동전」엔 백 8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애니메이터」 50여 명, 채색원 130여 명).
한국에선 처음 시도된 일이라 상상 이상의 노력이 들었고 많은 NG를 내야했다는 것. 화면의 한 동작에 필요한 그림이 60여 장씩이나 들었다고 한다.
녹음도 「배터런」성우인 김수일·이춘사 등이 맡았고 음악은 전정근. 【세기상사 제작】
8)

1967년 1월 21일 공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해 8만 5천 명을 동원하는 파격적인 흥행을 거두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상도 수상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은 1966년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수십 명의 동화부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간 애니메이션 광고 작업을 진행해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지만 장편 영화를 위해서는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보름이나 개봉을 연기하며 작업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긴 셀룰로이드 위에 비닐 컬러 (vinyl color) 물감이 없어 포스터 컬러(poster color) 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채화용 포스터 컬러 물감은 뜨거운 카메라 조명 아래서 금방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컬러리스트가 붓을 들고 촬영 현장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애니메이션 홍길동-1
애니메이션 홍길동-2
애니메이션 홍길동-3
애니메이션 홍길동-4
애니메이션 홍길동-5
애니메이션 홍길동-6
애니메이션 홍길동-7
애니메이션 홍길동-8
(그림9) <홍길동>의 주요 장면.

잘 알려졌다시피 원작 「풍운아 홍길동」은 신동헌의 동생인 만화가 신동우(1936~1994)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티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동우가 원작자였지만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는 신동헌의 조수로 활약했다. 지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는 배경과 인물, 움직임의 표현에 있어서, 또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매체 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신동헌은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바꾸었다. 또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눈은 까만 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는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담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눈처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홍길동>은 성우들의 녹음을 먼저 진행했는데 홍길동은 역은 KBS 성우 공채 1기의 김수일이, 차돌바위는 TBC성우 4기로 데뷔한 여성 성우인 김순원이 맡았다. 먼저 녹음을 진행한 성우들의 대화에서 원작자나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효과와 감정이 드러나 후작화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아낸 큰 수확이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 같은 만화왕국’을 꿈꾸었던 신동헌은 <홍길동>을 제작하고 난 직후 한국 만화영화의 가능성은 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가 고민한 것은 ‘외국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대로의 동작의 선을 확립해야한다. 우리 만화영화의 한국적인 동작을 어떻게 창안할 것인가’였다.9)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그림10)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차돌바위
(그림11) <홍길동>에 등장했던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뜻의 차돌바위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그림12)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홍길동>이 대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서 세기상사와 갈등을 빚었다. 납품 일자를 어겼다고 수익을 배분해주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이후 작품에 재투자로 이어지기 만무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진 신동헌프로덕션은 곧 합동영화사의 제안으로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개봉했다. 원화 6만 장을 그려 상영시간 75분짜리로 찍었고, 그 제작비로 1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홍길동>을 만들면서 신동헌은 <속 홍길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속편이 여의치 않자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로 선회했다. 호피는 호랑이 가죽을 쓴 의로운 인물이라는, 차돌바위는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의미의 마치 배트맨과 로빈을 연상시키는 이 짝패는  「풍운아 홍길동」에서 단역으로 등장하는, 신동우가 창조한 서브캐릭터였다. 세기상사와의 생겨날 수 있는 판권문제를 염두 했던 신동헌은 『홍길동전』이나 <홍길동>에는 없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후속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경계 지역인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신동헌, 신동우 형제답게 이 영화에서는 여진족이 서사상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호피(명호)의 아버지(유세진 장군)가 정벌하던 오랑캐 여진족, 호피의 아버지를 모함한 사또 최진달, 또 그 사또가 연합한 세력인 여진의 욕심 많은 괴물 도마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몽적인 장면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사상의 적은 ‘여진족’으로 명시되지만 은유적으로 이는 북한의 공산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삭풍 선생 : 이 역적무리들. 봐라, 이것이 최진달 일파가 우리나라를 도마술에게 바치겠다는 문서다.
정신 차려라, 호피야. 북녘의 야만인의 피에 굶주린 발톱이 우리나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노리고 있는 이때에,
너 같은 젊은 놈이 그 좋은 칼솜씨를 지니고도, 나라를 위해서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도둑질만 일삼다니.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이놈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목숨을 투계와 같이 버리며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왔다. 알겠느냐?
북쪽 오랑캐들은 이 나라를 삼킬려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려왔으니. 

 
호피와 차돌바위 삭풍선생
꾸중듣는 호피
(그림13) <호피와 차돌바위>(1967) 중 삭풍 선생의 뼈아픈 훈계를 듣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호피의 모습

하지만 <홍길동>은 물론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흥행 수익을 둘러싸고 제작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다. 영화제작사들은 흥행 수입만을 챙기고 애니메이션 제작 재투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신동헌 감독은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극영화보다도 제작비가 더 많이 들고, 제작 소요 기간도 길며, 오랜기간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인력과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제작사 간의 불협화음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아쉬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말띠 신부> 애니메이션 크레딧-1
<말띠 신부> 애니메이션 크레딧-2
<말띠 신부> 애니메이션 크레딧-3
<말띠 신부> 애니메이션 크레딧-4
<말띠 신부> 애니메이션 크레딧-5
(그림14)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타이틀 크레딧 장면들

신동헌 감독이 이렇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와 안타까운 결별을 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오프닝 크레딧은 조애희가 부르는 주제가 “말띠 신부”(음악 최창근, 작사 유호)의 멜로디에 맞추어 등장인물 커플을 애니메이션으로 캐리커쳐하여 소개하는데 이를 신동헌이 담당했다. 또 이어령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은 신동헌프로덕션의 크레딧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철훈이 구상한 소설 내용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동헌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10분가량 들어있다. 

장군의 수염 애니메이션 부분-1
장군의 수염 애니메이션 부분-2
장군의 수염 애니메이션 부분-4
장군의 수염 애니메이션 부분-4
(그림1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중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부분

그 외에도 TBC의 풍자해학 사극 <여보 정선달>(1971~1974)에도 신동헌이 참여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비상한 조선의 정선달이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 주제가에 맞추어 타이틀 크레딧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MBC의 장수 어린이프로그램 <뽀뽀뽀>(1983~1992)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뽀뽀뽀>의 고정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배경을 그려 넣었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꼭지에서는 예의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빛을 발했다. 2008년 유실되었던 필름을 되찾은 후 그는 애니메이션 관련 인터뷰나 강연으로 맹활약했고, 2014년 제14회 만화의 날에 기념공로상을 받았다. 

뽀뽀뽀-1
뽀뽀뽀-2
뽀뽀뽀-3
뽀뽀뽀-4
(그림16) <뽀뽀뽀>(MBC, 1989년 1월 9일) 중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만든 장면들

 신동헌 감독을 회고하면서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홍길동>은 ‘프랑스 아네시영화제(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10), 실제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하지는 않은 것 같다. 1967년 <홍길동>이 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신동헌 감독이 직접 참관했더라면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신동헌』 편에 실린 필자의 「신동헌 해제」와 구술문,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시된 DVD <홍길동>에 포함된 필자의 「신동헌 감독 소개」를 참조해 재구성하였습니다. 

1) 《동아일보》 1967년 1월 19일 5면.
2) 《경향신문》 1967년 8월 12일 5면.
3) 《소년조선일보》 1965년 9월 11일.
4)  “[연예오락] 특수 오락영화 「붐」. 괴수물·만화 등, 영화로 뒤쫓는 우주시대 국내기술로 제작 가능”, 《한국일보》 1967년 6월 18일자 7면.
5)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
6) 광고정보센터 한국광고 100년 홈페이지 http://data.adic.co.kr/ 참고.
7)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명선거의 노래>는 “공명선거의 노래”(1분 41초)와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3분 8초)의 두 개 영상으로 나뉘어 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후자의 영상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영화의 제작년도가 1961년으로 오기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목록(1950~1993)』, 37쪽;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ehistory.kr.
8) “첫 선보인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전」, 7개월간 6만 여 장 그려”, 《한국일보》 1967년 1월 19일자 7면. 
9)  “만화영화 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동아일보》 1967년 1월 28일 5면.
10) “만화영화 홍길동 아네시영화제 출품”,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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