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서류를 통해 본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 I -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와 <오대복덕방>(이형표, 1968)을 중심으로 -

by.박선영(고려대학교) 2018-06-18
오대복덕방 신문 개봉 광고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서영춘의 코미디와 검열의 관계를 살펴보는 두 편의 글 중 첫 번째 글이다. 서영춘의 코미디에 집중해서 검열 서류를 살펴보는 이유는 그가 악극이나 쇼 무대의 활동을 넘어 라디오와 영화 등 대중매체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난 뒤부터 끊임없이 ‘저속성’ 논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서영춘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저속 코메디언”으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최고의 체크 기록”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1) 말하자면 서영춘의 코미디는 ‘저속함’을 매개로 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의 통속성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검열은 코미디에서의 ‘저속’과 ‘건전’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글에서는 서영춘의 영화 출세작이었던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와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왔으며 공보부의 검열 강화 기조에 일조했던 <오대복덕방>(이형표, 1968)을 중심으로 검열의 추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글에서는 성적인 표현과 동성애 코드를 둘러싸고 검열에 재검열을 거쳐 상영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영화검열의 기조와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과 ‘통속’ 코드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본격적인 코미디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악극단의 인기 배우들이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끌던 시점이기도 했다. 식민지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제작되지 않았던 코미디영화들도 이 시기에 다양한 하위 장르를 이루며 쏟아져 나왔다. 악극단과 라디오에서 주가를 올리던 코미디 배우들은 영화에서 자신들의 장기와 퍼포먼스를 발휘하면서 코미디영화의 활황을 이끌었는데, 가장 먼저 스크린을 점령했던 것은 양석천과 양훈, 홀쭉이와 뚱뚱이 듀오였다. 뒤를 이어 등장했던 구봉서와 김희갑은 검증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수많은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서영춘은 다소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악극단과 라디오, 쇼 무대를 거쳐 1960년대 스크린 코미디의 총아가 되었다.

서영춘(1928~1986)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서영은의 동생으로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1952년 악극단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백금녀를 만나 뚱뚱이-홀쭉이 콤비를 이루면서 유명세를 탔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반 라디오 코미디의 전성기에 동양라디오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TV쇼의 사회자이자 백금녀와 함께 하는 만담의 출연자로 등장하면서 서영춘은 “여보 마누라 가갈갈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뿜빠라뿜빠 뿜빠빠”, “살살이, 요건 몰랐지?” 등등의 유행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로 시작되는 일종의 만요와 “시골영감 기차놀이”의 리메이크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스타 코미디언으로 발돋움했다.  

서영춘의 영화 데뷔작은 1961년 <인생갑을병>(박성복)으로 여기서 그는 엑스트라 급 조연을 맡았으나, 1964년 <총각김치>(장일호),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서영춘은 이 영화의 흥행을 시작으로 라디오와 TV, 스크린,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면서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여자가 더 좋아>는 서영춘을 스타 배우로 만든 영화일 뿐 아니라 1960년대 후반 유행했던 여장남자코미디의 시초이자 이 시기 코미디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코미디, 즉 코미디언코미디의 활황을 선도한 영화였다. 여장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성전환 수술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주는 등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코미디이지만 검열에서는 거의 지적된 바가 없으며 오히려 흥행을 통해 재평가된 지점이 존재했다. 한편, <오대복덕방>은 서영춘이 여러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출연하는 영화여서 전체적인 비중으로 볼 때 ‘서영춘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온 영화였고 공보부의 검열강화 기조에 일조한 영화였다는 점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여자가 더 좋아>를 살펴보자. 코미디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였던 <여자가 더 좋아>는 오랫동안 유실된 필름이었다. 다행히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에 ‘한우섭-한규호 父子 컬렉션’이 기증되어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2016년 5월 31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최초로 일반 상영되었는데, 후반부 20여 분의 싱크가 맞지 않고 마지막 씬이 유실된 불완전판으로 공개되었다. 유실된 부분에 대하여 시나리오, 검열 서류 및 각종 기사들과 스틸 사진 등의 자료를 보충하여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는 흡사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남녀가 뒤바뀐 설정의 코미디 버전처럼 보인다. 여자직업학교에서 음악 선생으로 일하던 규철(서영춘)은 동거하고 있던 애인 영숙(최지희)이 자신을 배신하고 결혼하자 여장을 하고 그 집의 식모로 들어가 복수하고자 한다. 영숙이 규철을 배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의학적 소견 때문이다. 이를 인정할 수 없는 규철은 변심한 애인을 벌하고자 규화라는 이름으로 여장을 하고 영숙의 집에 식모로 들어간다. 시아버지(김희갑)의 못된 버르장머리 때문에 “식모란 식모는 모조리”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던 이 집에서 애교스럽고 일 잘하는 규화는 시아버지의 총애(를 가장한 성추행)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규철은 뛰어난 피아노 실력으로 영숙의 남편 박문기(남궁원)에게도 호감을 사며 문기의 동료이자 악극단의 지휘자인 선우광(양훈)으로부터는 적극적인 구애를 받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인하게 된 규철은 정체가 탄로 나자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질주한다. 현재는 유실되었으나 시나리오 및 신문기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엔딩 씬은 질주하던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는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 여성이 되어 병원을 나선 규철이 “교태를 부리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제시된다. 

이 같은 파격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던 <여자가 더 좋아>는 그럼에도, 검열에서 큰 지적 사항 없이 영화화되었다. 시나리오 심사의견서는 이 영화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여자 같은 남자’ 콘셉트를 베꼈다고 지적하면서 코미디에 필요한 “건전한 웃음” 없이 “난잡”하고 “황당무계”한 것으로 “오로지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비예술적 태도를 지양할 것을 주문했다. 

<여자가 더 좋아> 시나리오 검열의견서
(그림 1) 공보자문위원회 영화분과위원회, 「“여자가 더 좋아” 씨나리오審査意見書」, 1965.4.22.

<여자가 더 좋아>의 시나리오 검토는 제작자에게 “건전한 웃음”과 ‘코미디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다소 추상적이고 훈계적인 내용의 ‘의견서’로 제출되었다. 그런데 건전한 코미디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공보부에서 ‘눈깔’ 등의 대사를 시정하라는 것, 선우광과 규철의 밀회 장면을 ‘주의 깊게 취급’해달라는 것 등 5개의 가벼운 지적 사항과 함께 제작신고 수리 통보를 받았다. 

극영화 “여자가 더 좋아” 제작신고 수리통보-1
극영화 “여자가 더 좋아” 제작신고 수리통보-2
(그림 2) 공보국 영화과, 「극영화 “여자가 더 좋아” 제작신고 수리통보」, 1965.5.31.

그리고 실사 검열에서는 위의 밀회 장면을 단축하라는 단 한 가지 지적을 받고 상영이 허가되었다. 

국산영화 “여자가 더 좋아” 상영허가-1
국산영화 “여자가 더 좋아” 상영허가-2
(그림 3) 공보국 영화과, 「국산영화 “여자가 더 좋아” 상영허가」, 1965.6.19.

상대적으로 ‘반공법’ 위반에 주목하고 있었던 이 시기의 영화검열은 아직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함’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만화조 넌센스의 소극”2)에 불과하다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평단에서 의외로 영화가 장기 흥행 하며 관객 몰이에 성공하자 이 영화가 일종의 사회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저속’함에 대한 면죄부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영화의 장기 흥행을 보도하면서 한 기사는, 남자였을 때 누릴 수 없었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을 여장을 하고 난 뒤에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성전환을 택한 “서영춘의 페이소스”와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는 비평을 실었다.3) 같은 해 11월에 개봉한 영화 <주책바가지>(심우섭, 1965)를 혹평하면서, <주책바가지>에는 <여자가 더 좋아>의 “페이소스”가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한 기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4)

한편, <여자가 더 좋아>가 제작되었던 1965년 이후, 1966년 2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검열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면서 코미디영화 검열 역시 강도가 높아졌다. 1967년 말에 제작하여  시나리오 사전검열과 제작 후 필름검열을 모두 통과하고 1968년 2월 개봉 중이었던 <오대복덕방>을 공보부가 재검열하겠다고 나서면서 이 영화는 검열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시나리오와 기사, 스틸 사진 등으로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오대복덕방>은 김해 김씨 일가 5대의 이야기로, 영화는 90세의 1대 용태 할아범이 서울에 와서 복덕방을 차려 성공하자 자손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면서 시작된다. 이후 전라도 무주에서 상경한 일가족이 한 동네에서 각자 복덕방을 차리면서 각종 해프닝을 벌인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정할 수는 없지만 추정하건대, 서영춘은 3대 김영근으로 등장하여 결혼 사기를 당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반목하며 경쟁하던 5대 일가족은 사기사건을 계기로 화해하고 개심하여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전라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 가족의 ‘저속한’ 행태와 말투로 인해 전라도 지역 영사기사들이 영사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전북극장협회에서도 영화 상영을 거절했다. 검열 서류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전라북도 내 영사기사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는 기사와 전북극장협회의 상영 거절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5) 

뿐만 아니라 김해김씨 종친회 및 전라북도 도지사의 상영정지요청도 이어졌다.

영화상연중지요청
(그림 4)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 「영화상연중지요청」, 1968.2.5.

영화 “5대복덕방” 상영 정지처분 건의-1
영화 “5대복덕방” 상영 정지처분 건의-2
영화 “5대복덕방” 상영 정지처분 건의-3
(그림 5) 전라북도지사, 「영화 “5대복덕방” 상영 정지처분 건의」, 1968.2.9.)

김해김씨 종친회의 민원은 <오대복덕방>이 “우리종친인 김해김씨의 명예를 형언할 수 없을 만치 훼손한 스토리로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인 종친사회를 근본적으로 모욕한 것”이므로 즉각 상연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전라북도 도지사의 이름으로 발송된 건의서에는 이 영화가 “오락적 경지를 벗어나 전래의 미풍양속을 해하고 나아가서는 혈연의식과 지역적 파벌을 조장하는 결과를 자아내”어 “전북도민으로 하여금 격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게 하고 신문, 방송 등 이 고장 언론기관이 선두에서 이를 규탄하는 일대 쎈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동시에 본도 전도민이 항의에 기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중략)... 국민적 단합과 정신무장 면에 구열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면서 이 영화를 즉각 상영중지하도록 요청했다. 이 서류에는 전북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기사들도 첨부되어 있어 이 영화를 둘러싼 전북 지역의 여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에서 이 영화는 “건전하며 코믹한 오락작품이면서도 과욕과 허실된 생활을 다분히 경고적으로 풍자한 작의가 좋”다며 “극히 명쾌하고 코믹하면서도 ... 인간 본연의 자세와 선악을 도시 생활상의 일단면에서 풍자적으로 그려주고 있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저속한 대사나 장면 묘사에 주의하여 제작”하라는 주의 속에서 무수정으로 검열에 통과했고, 필름 검열에서도 판잣집을 서울의 명물이라고 보여주는 장면, 화장실 씬 등 세 장면을 삭제하고 대사 한 줄 정도를 삭제하라는 수정사항을 지적한 뒤 합격증을 배부했던 것이다.

오대복덕방” 각본심의의견서-1
오대복덕방” 각본심의의견서-2
오대복덕방” 각본심의의견서-3
(그림 6)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각본심의위원회, 「“오대복덕방” 각본심의의견서」, 1967.12.14.

국산영화 “오대복덕방” 검열합격-1
국산영화 “오대복덕방” 검열합격-2
(그림 7) 공보부, 「국산영화 “오대복덕방” 검열합격」, 1968.1.26.) 

검열의 호평 속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이 시작되고 나자 앞서 언급했던 각종 투서와 건의서가 공보부에 답지했다. 이러한 여론이 비등해지자 영화의 제작자였던 주식회사 대한연합영화사의 대표이사 홍의선은 재검열과 재편집이 불가능하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서 홍의선은 상영허가검열에 합격하여 이미 상영을 시작한 지 열흘이나 경과된 시점에서 프린트를 회수, 재편집하는 것은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므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공보부의 “영화위원회의 심의에 회부”하여 검열해 달라고 요청한다. 또한 홍의선은 이 영화가 “정극과는 그 영역이 판이한 희극영화”로 사투리는 “코믹한 텃취로 극을 희화화해보려는 시도”일 뿐이고 전주김씨 17대손 운운은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성씨의 하나로 표현한 데 불과”하며 “예의 17대손은 4,500년 전에 존재한 인물로 가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현재 후손들에게 불명예스럽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희극영화 “오대복덕방”영화위원회심의요청의 건-1
희극영화 “오대복덕방”영화위원회심의요청의 건-2
(그림 8) 「희극영화 “오대복덕방”영화위원회심의요청의 건」, 1968.2.6.)
 
결국 공보부에서는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영화의 재검열을 실시한다. 그런데 이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967년 4월 1일부터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신고시 첨부되는 각본에 대하여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각본을 검토하도록 했는데, 각본심의위원회는 영화법 저촉사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영화계 내부에서 스스로 조직한 단체였다. 각본심의위원회의 검토를 통과하고 나면 제작이 시작되고, 제작이 완료된 필름은 실사심의를 거치는 이중의 검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심의 제도는 1967년 12월 1일 공보부에 6인으로 구성된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설치되면서 3중의 제도로 변경된 바 있었다. 따라서 <오대복덕방> 상영 분쟁이 생긴 뒤 소집되었던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와 동일한 심의기구로 추정할 수 있다.
 
1968년 2월 7일 공보부가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재심을 한 결과 “사회적 물의와 진정의 대상이 되는 저속한 부분은 추가 제한 조처함이 가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일단 상영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추가제한 조치로 30여 곳을 삭제, 단축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가락중앙종친회에는 “종친을 특정하는 대사, 화면 및 저속한 대사, 화면을 추가 삭제 조치”했음을 알리는 공문을, 전라북도지사 공보실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대사삭제 29개처, 화면삭제 15개처, 화면 단축 2개처”를 제한조치하여 상영하도록 했다는 회신을 보냈다. 

극영화 “오대복덕방”의 상영 정지-1
극영화 “오대복덕방”의 상영 정지-2
극영화 “오대복덕방”의 상영 정지-3
(그림 9) 「극영화 “오대복덕방”의 상영 정지」, 날짜 미상(2.7-2.9일 사이로 추정)

극영화 <오대복덕방>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1
극영화 <오대복덕방>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1
극영화 <오대복덕방>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3
(그림10) “극영화 <오대복덕방>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 1968.2.9.

진정에 대한 회신-1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1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3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3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4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5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6
(그림11) 「진정에 대한 회신」, 1968.2.9.; 「극영화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 1968.2.20.)

 
그런데 이때 재검열의 내용은 신문기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다소 저속”하지만 “넌센스 코메디임을 감안하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다”는 결과를 회신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서류는 확인할 수 없다.6)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일종의 중재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추가제한 조치에 따라 이후 필름들이 회수, 수정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과 2월 말까지도 이 영화를 둘러싼 비난 여론이 계속되었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처음부터 상영을 중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재검열을 요구했던 여론의 흐름과 투서를 보냈던 단체들에 보낸 회신으로 미루어볼 때, 필름 회수 후 수정본을 다시 상영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재검열 소동 이후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필름의 상영본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대복덕방>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재검열 사건으로 인해 검열에 대한 여론의 문제제기가 한층 높은 강도로 진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가혹하기로” 이름 높은 검열에서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저의 태작”이라고 평가받는 <오대복덕방>에 별 다른 문제없이 상영허가를 내 준 것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7)

이처럼 상황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홍종철 공보부 장관은 이 영화의 상영허가가 “사무적 미스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고 변명하면서, 이 영화의 재검열 뿐 아니라 앞으로 더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2중, 3중으로 실시되는 영화검열의 엄격함과 그 자의성에 대한 비난이 거세짐에도 불구하고, 홍종철은 “반국가적 반사회적인 것과 윤리적 도덕적인 것에 위배되는 것은 계속 커트하겠다”고 밝혔던 것이다.8) 그간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해 왔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이후 공보부의 실사 검열은 <오대복덕방> 검열 논란이 있었던 직후인 1968년 4월 1일부터 각본심의위원회와 영화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합동으로 사전 시나리오 검열을 실시하고 검열의 강도도 강화하는 방침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70년 2월 20일 극영화시나리오 검열 업무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으로 이관될 때까지 이러한 검열의 주체와 기조는 지속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재검열 소동이 벌어졌던 와중에서 <오대복덕방>은 <남자 식모>(심우섭, 1968)와 더불어 개봉관에서 10만 관객을 넘겼다. <남자 식모>가 18만, <오대복덕방>이 10만을 넘기며 그 해 흥행 순위 2위와 5위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들의 “크린 히트”와 함께 평단에서는 코미디영화 검열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검열에서 “대중적으로 건전”하다고 평가 되었던 <남자 식모>와 “저속”하지만 “코미디”이므로 “웃고 넘길” 수 있다는 정도로 평가 받았던 <오대복덕방>은 검열의 위계상 분명히 같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평론에서는 함께 엮여 “관객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마구잡이로 찍은” “저질 코미디”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었다.9)

이 시기, 검열과 평가의 기준을 달리 했던 평단은 서영춘 코미디와 구봉서 코미디를 한 데 묶어 “저질” 코미디로 분류하였으나 검열은 “저질 코미디” 안에서 또 다른 위계를 설정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저속’에 대한 검열의 문제제기와 위계화에 대해서는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의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남자 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 미용사> 등 이른바 ‘남자 시리즈’의 검열서류를 비교하면서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본다.   

1)  “방송가에 또 하나의 불씨/ 막다른 골목에 이른 코메디 프로 방륜마저 가벼운 경고 정도의 조치 뿐”, 《서울신문》, 1966.9.15.
2) 만화조 넌센스 소극 여자가 더 좋아”, 《조선일보》, 1965.7.15.
3)  “우울한 동정에 기대어 롱런 한달 째나 「여자가 더 좋아」”, 《신아일보》, 1965.7.20.
4)  “희극배우들의 여성숭배열/ 주책바가지”, 《신아일보》, 1965.11.6.
5)  “복덕방 상영거부”, 《대한일보》, 1968.2.10.
6)  “말썽난 70여 곳 삭제 항의 속에/다시 검열대 앞에/ 「넌센스 코메디」 오대복덕방”, 《신아일보》, 1968.2.13.
7)  “「오대복덕방」 시비를 계기로 본/ 영화검열의 문제점/ 무정견한 양식의 기준/ 제 나름의 주관/ 툭하면 가위질. 영화 드라마의 뼈대를 손상시키기도/ 윤리적 면서 타락, 검열은 계속 강화 공보부의 견해”, 《조선일보》, 1968.2.22.
8)  앞의 기사, 《조선일보》, 1968.2.22 참고.
9) “한계 흐린 가위질/ 영화검열 시비/ <처제>는 저속, <엄마기생>은 OK/ 귀걸이 코걸이 재단/ 업자 당국 반성하고 전문위 두도록”, 《중앙일보》, 1968.5.25.; “관객 동원수로 본 상반기 영화/ 이상기류/ 철저한 오락물 추구/ 난센스 코미디와 검객영화 판쳐/ 흥행서 실패한 올해 수확작”, 《대한일보》 1968.7.9.; “하반기의 영화제작 경향/ 소극, 합작물의 범람/ 거의 예술성을 외면 /아이디어 부족 소재도 저속/ 관람 성향에 편승/ 인니, 태국과 합작도 기획”, 《대한일보》, 1968.7.20.)

* 참고문헌: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명랑’과 ‘저속’ - 서영춘코미디의 불온함과 검열의 문제」,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51집,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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