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청춘극장>(강대진)과 검열의 체계화
검열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때는 검열에서 위반사항이 발견되지 않을 때이다. 1967년 <청춘극장>은 바로 이러한 역설의 증거인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1965년 이후 왜색에 대한 검열은 강화되었음에도 1967년 <청춘극장> 검열에서는 왜색 문제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제작자가 미리 검열 기준을 의식하여 검열에서 문제가 될 만한 왜색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별 문제 없이 검열을 통과한다. 그런데 1967년 <청춘극장> 검열 과정을 들여다보면 왜색의 사전 삭제와 같이 제작자로 하여금 미리 자체 검열을 통해 제한사항을 최소화하게 만들도록 검열이 체계적으로 강고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법 제2차 개정(1966년 8월3일 개정)과 시행(1967년 4월4일 시행)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검열제도의 변화가 보다 잘 드러나기도 한다.
1966년 6월29일에 <청춘극장>의 제작신고서가 공보부 1) 영화과에 제출된다. 1966년 3월4일에 사단법인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한 것으로 되어 있고, 별첨되어 있는 공연권취득증명서가 3월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제작사는 3월부터 이 영화의 제작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7월7일에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사인 합동영화주식회사가 시나리오와 전속출연자 활용각서를 첨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를 제작사에 보낸다. 8월3일자로 개정된 영화법 에 의해 시나리오 검열은 법제화되는 반면 전속제는 폐지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는 과도기적인 중복으로 보인다. 제작사는 영화법이 개정되고 난 10월이 되어서야 공보부에서 요구한 보완서류를 제출한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2월6일에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시정사항 없음’으로 시나리오 검열 의견서가 기안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행정 절차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림 1) <영화제작신고서>
(그림 2)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
(그림 3) <극영화 시나리오 내용 검토>
2차 영화법 개정 이후 신규영화허가신청서에 구비해야 하는 서류는 영화시나리오를 비롯해 납세완납증명서, 자립저축필증, 동시상영문화영화복사수속필증 등 13가지로 보다 복잡해졌다. 이를 통해 보건대 개정된 영화법의 시행은 1967년 4월3일이라고 하나 제출 서류에 대한 관리가 보다 엄격해짐으로써 실제로는 이미 개정된 영화법에 준하는 행정 검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보부 측의 미비서류를 제출해달라는 요청과 그에 따른 제작사의 보완 제출이 있은 끝에 1966년 12월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이 발부된다.
(그림 4) <신규 영화상영허가신청서(구비서류목록)>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와 별첨 <영화검열합격증>
위 서류에 의하면 <청춘극장>은 “원작인 『청춘극장』을 영화화한 것으로서, 때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무렵, 우리나라 젊은 학도 백영민, 장일수, 신성호 등은 각자 풍운의 꿈을 안고 항일투사로 일본유학생으로 또는 국내에서 애국활동을 하던 청춘상을 그린 극영화”로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은 1959년의 것(“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한국청년들과 여성들의 활약상과 이들 젊은이들의 애정 문제를 묘사한 내용”)에 비해 항일운동과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일한 제한사항이 백영민이 학병으로 출전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군가를 단축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강화된 왜색 검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항일 애국주의의 강화와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에 대한 미성년자 관람 심사에서는 보다 많은 제한이 이루어졌다. 우선 등급은 중학생 이상 관람가가 되었는데, 그에 비례하여 겁탈 장면, 캬바레에서 무희가 춤추는 장면, 영민이와 유경의 정사가 암시되는 장면, 임신을 알리는 대사 등 주로 성적인 장면들이 삭제 대상이 되었다. 1965년 <춘몽>을 둘러싼 음화 논란 이후 공안에 가려져 있던 외설이 검열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다. <청춘극장>의 관람 등급 심사에서 제한된 내용은 성적인 표현에서도 검열이 보다 엄혹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6) <영화 미성년자 관람심사 결과 통보>
1975년 <청춘극장>(변장호)과 무너지는 검열
1975년 <청춘극장>은 사회가 유신체제로 이행되고 제4차 영화법 개정(1973년 2월16일)이 이루어진 이후, 게다가 긴급조치 이후에 제작된 영화다. 제4차 영화법 개정의 골자는 영화 표현 영역에서 유신체제의 기조를 관철하는 것이었으므로 표현의 자유는 더욱 통제되고 억압되었다. 통제와 억압의 강도는 긴급조치 이후에 나날이 심해졌으며, 그에 따라 영화 검열기준 또한 강고해졌다. 1975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975년 <청춘극장>에 대한 시나리오 검열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 이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의 등장이다. 예륜은 1970년부터 극영화 시나리오 검열을 전담한 기관이다. 제작사는 우선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을 거친 뒤에야 검열 담당 부처(공보부, 문화공보부 등)에 제작신고를 할 수 있었다. 이에 1975년 <청춘극장>의 시나리오 검열도 ‘예륜’에서 수행한 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청춘극장>의 제작사는 1975년 6월17일자로 시나리오 검열을 예륜에 신청하고, 예륜은 6월20일에 검열을 수행하여 공보부에 보고한 것이다.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는 이 영화의 내용이 “꼬마 신랑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동창생이었다.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의 길을 걸었던 민족의 불운을 되돌아보는 광복 3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수난’, ‘형극’과 같은 국가의 위기를 상기시키는 표현이 쓰이고 있고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 시국과 결부하여 생각할 때”라는 전제 하에 “비록 일제 때 있었던 학병 강제 동원 등[이라 하더라도] 일반에게 전쟁기피증과 반전사상을 주입시키는 악영향을 주지 않도록 세심 유의”하라는 의견이 첫 번째로 명시되어 있다.
당시는 남북한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한 이념이 강화되며 남북한 관계가 경색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고조시켜 사회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한편 언제든지 국민을 전쟁에 강제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 검열에서 항일정신의 구현을 영화의 미덕으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반전의식을 고취시켜서는 안된다는 모순적인 제한조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7)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그림 8) <종합의견 보충설명 및 부분시정사항>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 단계를 통과한 제작사는 제작에 착수하겠다는 신고서를 1975년 7월1일자로 문화공보부에 제출한다. 문화공보부에서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 의거하여 시나리오를 개작하라고 7월7일자로 제작사에 통보한다. 이에 7월12일 제작사는 문화공보부의 개작 요구에 따라 충실히 수정하겠다는 보고서와 함께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한다. 문화공보부 영화과에서는 개작된 시나리오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여 상부에 보고하면서 제작사에 수리 통보를 한다. 이때 “본 작품은 제작과정에서 사계 권위자의 고중을 받아 시대적 배경으로 뚜렷이 하여 전쟁기피증 및 반전사상과 대일 굴욕감정이 유발되지 않도록 특히 유의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에 대한 적대의식은 고양하되 염전(厭戰)의식은 지양하라는 지침이 다시금 강조된다.
(그림 9)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통보>
(그림 10)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보고의 건>
(그림 11) <극영화 “청춘극장” 제작신고 수리 통보>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18일에 제작사는 방대한 제작규모에 비해 제작시일이 촉박하여 시나리오 검열에서 시정이 요구된 사항을 다 고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내용의 각서와 경위서를 제출한다. 이에 대한 별다른 조치 없이 이튿날인 9월19일에 이 영화는 검열에 합격한다. 이는 늘어나는 제한조치에 비해 그것을 위반했을 시의 조치는 의외로 탄력적이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영화 검열 의견서에서는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학교 동창생으로서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을 걸었던 민족의 수난사를 되돌아보는 내용”이라고 하면서도 또 다시 꽤 많은 제한사항을 통보하고 있다. ‘학생이 선생에게 대드는 장면’, ‘대통령 모독’, ‘성적인 표현’ 등이 주로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제한사항은 중학생 이상 관람할 수 있게 한 관람 등급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2) <국산영화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3) <영화검열 의견서>
1975년 <청춘극장>에서는 그 이전에 없었던 예고편에 대한 검열까지 이루어진다. 본편이 검열에 합격한 지 일주일 뒤인 9월25일에 제작사는 <예고편 검열신청서>를 제출한다. 이때에도 납세증명서가 첨부된다. 그리고 9월27일에 예고편 검열 합격이 통보된다. 여기에서도 주요인물의 별칭에 해당하는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삭제하라는 제한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림 14) <예고편 영화검열 신청서>
(그림 15) <국산 영화 예고편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6) <청춘극장 예고편 검열대본> 중 마지막 페이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1975년 <청춘극장>은 대본 검열에서부터 예고편 검열에 이르기까지 보다 많은 검열 단계를 거치며 또 그만큼 많은 시정을 명령받았다. 한 마디로 1959년, 1967년보다 매우 엄격한 제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대통령’이나 ‘장군’과 같이 군부와 관련된 표현에 대해서는 히스테릭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민한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드는 것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음이 드러난다. 설사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선생의 관계라 하더라도 ‘하극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사항들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경직성은 ‘왜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일본 복색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일본어도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설사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일본어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규제되었던 것인데 이 시기에 이르면 민족주의가 강화되며 그 일환으로 국가 주도로 국어순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규제가 더욱 강화된다. 한편 “동경 가면 예쁜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는 표현도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삭제된 것은 주목을 요한다. 이는 당시 남한보다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일본은 영화 표현에서 경계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과하다고밖에 할 수 없어서 이러한 조치를 통해 오히려 당시 정권의 불안이 엿보이기도 한다.
앞서 검열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때는 오히려 검열 과정에서 제한 사항이 없을 때라고 말했다. 반대로 검열에서 제한 조치가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검열의 기준이 제작 과정에 관철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1975년에 이르면 시나리오가 예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반려되는 비율이 80%에 이르게 된다.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국가의 영화 통제는 영화산업과 회복할 수 없는 괴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유신체제 이후 그 괴리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리고 1975년 이후에는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된다. 금지하고 제한해도 검열에서 문제가 될 영화가 계속 기획되었다는 것은 검열이 무너지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1975년 <청춘극장>은 바로 그러한 변곡점에 놓인 영화였다.
1) 영화 검열 업무는 1961년 10월2일 이후 문교부에서 공보부로 이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