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청춘영화의 성공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 ‘황금기’, ‘르네상스’ 등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하면서 한국영화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꼽힌다. 멜로·괴기·희극·액션·역사·청춘·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시도는 한국영화사에서 도드라지는 그 시대만의 기획이었고,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마자 이루어진 영화계의 법적·제도적 장치의 정비는 (국가적 제도 안에 영화를 위치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었을지라도) 영화매체의 대중적·산업적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1963-1967년 약 5년간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청춘영화’는 바로 이 두 가지, 영화의 다양성과 영화의 산업적 성장에 큰 기여를 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산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이질적인 공간의 활용과 화려한 의상, 이를 메운 서구적 생활양식은 새로운 영화 문법의 한 요소로 인식되었고 관객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1960년대의 한 가운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60년대의 청춘영화는 몇 가지의 도드라지는 특징으로 설명된다. 먼저 그 내용에 있어, 청춘영화는 공통적으로 가난한 청년과 부잣집 여대생의 사랑을 그린다. 이때 부잣집 여대생의 지위는 매우 매력적인 미장센으로 스크린에 가시화되어 영상미를 높이면서도, 두 남녀의 만남이 좌절되는 중심적인 이유로 작용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신성일·엄앵란이라는 두 배우는 청춘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콘이다. 배우의 팬덤이 형성되고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사회적 관심을 받았던 것은 유래 없는 일이었다. 영화 속 신성일 · 엄앵란의 데이트 코스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고, 그들의 패션 역시 많은 이들의 따라해야 할 스타일이 되었다. 스타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두 배우의 탄생은 청춘영화의 성장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청춘영화의 대부분은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특정 극장에 가면 특정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인식은 영화에 따른 관객의 세대를 나누었고, ‘고무신 관객’으로 폄하되던 관객들과는 전혀 다른 젊은 관객들이 아카데미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이와 같이 한국영화의 외적 팽창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면면들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청춘영화의 특징은 이 영화들이 표절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영화평론가들은 물론이고, 당시 대학가에서 심포지움이 열릴 만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안이었다.1) 영화의 인기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던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특히 일본영화를 모방한 경우가 많았고, ‘해적판’이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릴 지경에 이르렀다. 청춘영화들은 당시 갓 제정된 영화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영화들이었는데, 1962년 제정된 영화법(1962.1.20.)과 1963년 1차 개정된 영화법(1963.3.12.)은 제작사의 의무조건을 강화하고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 위한 모든 과정을 공보부 장관의 사무로 정착시키는 데에 주력하면서 영화제작의 관리에 힘썼을 뿐 표절문제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사이 발생한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 혹은 그것을 그대로 즐기는 관객과 함께 이를 묵인하는 공보부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청춘영화의 흥행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집단이나 단체까지도 비슷비슷한 내러티브 안에 포함시키는 등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제목과 상관없는 영화의 내용은 특정단체의 공분을 사기도 했으며, 비슷비슷한 내용과 설정들은 약 4-5년 만에 청춘영화가 사라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청춘영화의 문제점들은 청춘영화의 대표격으로 언급되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과 <학사주점>(박종호, 1964)의 당시 영화 심의서류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또한 <학사주점>의 심의서류는 1960년대 초반, 영화법이 만들어진 후의 검열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그 과정을 좇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표절화’된 각색-<맨발의 청춘>
현재까지도 <맨발의 청춘>을 언급하는 많은 글들이 이 작품의 흥행과 성과, 특별한 시도 등에 대해 쉽게 상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작품이 ‘표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후지와라 신지(藤原審爾)의 단편소설 『진흙투성이의 순정 泥だらけの純情』을 바바 마사루(馬場當)가 각색하여 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이 1963년 발표한 <진흙투성이의 순정 泥だらけの純情>과 거의 유사하며 구체적으로는 카메라의 앵글이나 소품의 설정까지도 거의 같다고 알려져 있다. <맨발의 청춘>에서만 볼 수 있는 조두수가 요안나와 그의 지인을 만난 식사자리에서 서양식 식사법을 알지 못해 폭소를 유발하는 장면이나, 요안나와 조두수의 정사(情死) 후 상반되는 규모로 치러지는 장례식 장면과 같이 계층적 차이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장면 등이 일본 영화와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지적되지만,2)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공적인 작품이 표절작이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표절은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이어지는 <맨발의 청춘>에 대한 평가는 의아함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사실 개봉 즈음부터 <맨발의 청춘>은 이 작품이 일본의 영화를 각색한 작품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맨발의 청춘>을 소개하는 한 기사에서는 “원전은 바다건너 작가 馬場當의 '멜로드라마' <진흙투성이의 純情> 번안의 사전승인을 받았다”3)는 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다른 날의 기사에서는 “일본 馬場當의 이름을 뚜껑에 박은 깡패와 명문 딸의 눈물바다 속의 애련을 그린 <맨발의 청춘>”4)이라는 소개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맨발의 청춘>은 당시 문제가 되던 표절 작품의 한 예로 거론되는 등,5) 1960년대 일본영화를 표절한 대표작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영화 <맨발의 청춘> 내에서 이 작품이 일본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1) 각색자동의서
영화 <맨발의 청춘>이 상영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한 서류 중 하나인 이 각색자동의서에는 1964년(소화39년),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영화화에 관한 전권을 극동흥업주식회사 대표 차태진에게 위임하고 제작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각색자 바바 마사루의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다. 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영화 각색자에게 받은 동의서로 <맨발의 청춘>이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 <맨발의 청춘>의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명시하고 있는 각본의 담당은 서윤성(徐允成)이며, 각색에 동의를 해주었던 바바 마사루의 이름이나 원작이 된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제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림 2) 영화제작신고서, 공연권취득증명서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먼저 영화제작신고서에서 <맨발의 청춘>의 원래 제목은 <죽어도 보고싶어>였다는 점과 원작자가 서윤성으로 적혀 있다가 후에 바바 마사루로 수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그런데 그 다음 서류인 공연권취득증명서에는 서윤성이 이 각색 작품을 ‘본인 저작물’로 명시한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으며, 앞서 말했듯이 영화의 크레디트에서도 서윤성은 이 영화의 각본가로 명시된다. 이는 당시 ‘저작’에 대한 개념이 명확치 않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맨발의 청춘>보다 한 해 앞서 개봉했던 <청춘교실>(김수용, 1963)과 <가정교사>(김기덕, 1963)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청춘교실>은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로 대학생들의 일상과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보여주면서 청춘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영화제작신고과정은 정확히 <맨발의 청춘>의 그것과 반대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영화의 신고서류에서 이 작품의 각색자인 이시철을 원작자로, 공연권취득증명서에서도 <청춘교실>의 시나리오를 동일인의 저작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청춘교실>의 오프닝 크레디트에서는 “石坂洋次郞의 ‘あいつと私’에서”라고 명시함으로써 이 작품이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 『그녀석과 나』라는 작품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표시한다. 영화의 제작신고서류에서는 원작자의 동의서나 승인서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에 부기했던 것이다. 같은 해 개봉한 청춘영화 <가정교사>는 <맨발의 청춘>과 유사한 경우인데, 서류상 이 작품의 원작인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의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 陽のあたる坂道』의 영화화에 대한 원작자의 승인서가 포함되어 있지만, 영화제작신고서에서는 아예 원작자를 표기하는 난이 비어 있다.7) 이러한 사례들은 영화 신고의 과정 중에도 혹은 그것을 영화화 하는 과정에서도 원작과 그것의 각색이라는 점을 명시하는 명확한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서류에서 명시하고 있는 원작자의 규정 역시 불분명하다. <맨발의 청춘>은 『진흙투성이의 순정』이라는 소설의 원작자가 아닌 영화의 각색자8)에게, <가정교사>는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의 영화의 각색자가 아닌 소설의 원작자9)에게 각각의 영화화에 대한 승인을 받고 있으며, 서류의 명칭 역시 ‘각색자동의서’, ‘승인서’ 등으로 체계적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정확한 양식을 지니지 않았던 이 동의서들은 의무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맨발의 청춘>이나 <청춘교실>, <가정교사> 등은 서류상으로든, 관객에게 보이는 오프닝 크레디트든 한 번은 이 작품의 원작자를 밝히는 것으로 각색영화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 셈이며, 이는 당연히 후에 표절로 번지거나 그럴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작품들에 적용되었던 1차 개정영화법과 그 시행령, 시행규칙들은 제작사의 등록절차를 강화하여 영화의 외적인 성장을 꾀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을 뿐, 저작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제작신고 시 공식적으로 원작자의 동의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은 합작영화를 제작할 때에만 필요한 과정이었기에, 이 작품들처럼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관객들에게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은 제작자의 소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10) 물론 이는 제작사의 몫으로 남길만한 사안이 아니며 법적 정비가 절실한 부분이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이 처음 제정된 것은 1957년이었는데, 그 구체적인 시행령은 2년이 지난 후에야 제정되었을 만큼11) 저작권에 대한 관심은 미비했다. 본 법령에서 저작물은 ‘문서, 연술, 회화, 조각, 공예, 건축, 지도, 도형, 모형, 사진, 악곡, 악보, 연주, 가창, 무보, 각본, 연출, 음반, 녹음필림, 영화와 기타학문 또는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일체의 물건’으로 규정하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번안이나 번역물, 각색물의 경우 어떤 식으로 원작에 대한 권리를 얻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항목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표절이 문화계 전반에 걸쳐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작권법은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고, 약 30년이 지난 1986년 12월 31일에야 처음으로 개정이 되었으니 그 사이의 저작권을 둘러싼 혼란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여기에 저작권법을 관장하고 있던 부서가 문교부였다는 점도12) 영화계에서 쉽게 표절문제가 불거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 영화의 검열사무를 맡아보던 부서는 문교부였지만, 영화와 연극의 검열사무는 1961년 10월 공보부로 이관된다.13) 즉 영화의 상영허가를 내주는 부서와 저작권을 관리하는 부서는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고, 각각의 업무는 그리 긴밀한 협조를 맺지 못한 채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젊은 층에게 인기가 있던 영화들이 한국에서 영화화 되는 데에 큰 장애가 없었고, 제작사들 역시 이에 대해 어떠한 법적 제재도 받지 않았다. 다만 당시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의 질타를 받았을 뿐, 공식적으로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림 3) 극영화 <죽어도 보고싶어> 제작신고 접수 통고
이처럼 1960년대 중반 유행하던 청춘영화가 표절과 각색 사이의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영화 자체에서는 특별히 문제가 될 내용이 없었다. 본 제작신고접수 서류에서 지적하고 있는 두 장면은 ‘공서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였고, 이는 이 영화가 당시 민감했던 반공이나 국기 문란 등의 거대담론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작 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흥행이 보장되었던 청춘영화는 <맨발의 청춘>의 성공 이후 비슷비슷한 작품들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대 통용되던 용어의 의미와 전혀 다른 맥락에 서 있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한다.
반복되는 영화들과 1960년대 영화 심의의 절차-<학사주점>
<맨발의 청춘>과 같은 해에 제작, 개봉한 영화 <학사주점>은 가난한 대학생 경일이 부잣집 여대생 수미를 만나 신분상승을 꿈꾸지만, 자신이 하숙하던 수예점의 혜림과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좌절되고 결국 경일이 투신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된다. 김길헌(본명 김최연)의 창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맨발의 청춘>에 비한다면 매우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영화의 심의 과정에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이었던 ‘학사주점’은 1960년대 초부터 대학생들이 운영하던 주점을 가리켜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던 단어였는데, 엘리트들의 소통공간이었던 학사주점이 영화 <학사주점>에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비춰졌다. 당시 직접적으로 이 영화를 둘러싼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학사주점’을 운영했던 이들의 불만은 후일담으로 남아 있다.
이 부분에서는 먼저 영화법 초기, 즉 1차 개정영화법의 적용을 받고 있던 <학사주점>의 심의서류를 통해 당시의 영화제작과정을 꼼꼼히 살펴볼 것이다. 덧붙여 실제의 ‘학사주점’과 영화 <학사주점>이 어떠한 관련도 없다면 이 제목은 당시 젊은 관객층, 그 중에서도 대학생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한 부작용과 그에 대해 당시 ‘학사주점’ 운영진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림 4) 영화제작신고서
이 서류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본 영화제작신고서가 ‘사단법인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학사주점>의 신고 약 한 달 전에 작성되었던 [그림 2]의 <맨발의 청춘> 영화제작신고서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경유 도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그 사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가 ‘한국영화업자협회(이하 업자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본 서류에서 경유한 일자(1964.2.29.)가 공보부에 본 서류가 접수된 일자(1964.5.18.)보다 약 3개월이나 앞선 것으로 볼 때, 업자협회를 경유하는 것은 영화제작의 신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유의 과정은 법령이나 시행령 등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당시 경유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허가 받고자 했는지는 명확히 알기 힘들지만,14) 1963년의 영협(한국영화인협회)과 제협의 마찰은 이 경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1963년, 영협은 제협처럼 영화제작을 위해 영협도 역시 경유하도록 해달라고 관계당국에 건의하고자 한다.15) 당시 제협은 영화제작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영화배우들의 쇼 출연을 제한했는데, 제협이 영협에 속해있던 당대 톱스타들 김승호, 신영균, 최무룡, 김지미 등을 쇼 출현을 이유로 영화 출연을 정지시키면서 영협이 이에 반발한 것이다. 영협은 제협이 영화계의 상황을 고려치 않고 횡포를 부리고 있다며 맞섰지만, 제협은 앞으로 6개월간 위 4명의 스타를 출연시킨 영화는 공보부의 상영허가 검열을 받기 위해 제협이 경유시켜주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16)
이 과정을 보았을 때, 제협은 영화제작을 위한 공보부의 신고 전 단계에서 영화제작내역이나 배우의 섭외 등을 미리 살펴보고 적합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아예 공보부로의 접수 자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내용 자체에 손을 댄 것은 아니지만 영화와 관련한 인적 구성을 걸러내고 제작에 필요한 신고절차 자체를 차단할 수 있었던 경유는 사실상 사전 검열단계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협이 제협의 경유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영협에게도 그 권한을 달라고 요청한 부분인데, 이는 영협이 제협의 경유를 사전 검열 단계로 인식했다기보다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정도에 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5) 극영화 <학사주점> 제작신고 수리 통보
앞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청춘영화에서 수정을 요구받았던 부분들은 차후 제작사와 큰 마찰을 일으킬 내용들은 아니었다. 본 서류에서는 영화법 시행세칙 제1조 2의 규정에 의거하여17) 몇 부분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구는 당시 가장 큰 주의사항으로 명시되었던 국헌의 문란,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 있는 내용, 민주주의 정신에의 위배, 적국에 대한 긍정이나 법적 존엄성을 훼손하는 등의 요소 등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청춘 남녀들의 사랑이 주가 되었고, 서구식 생활상의 과시와 같은 장면들의 나열이 주가 되었던 <학사주점>은 큰 무리 없이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학사주점>은 두 군데의 삭제 또는 수정지시를 받았는데, 시나리오를 살펴보면 먼저 첫 번째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술집에서 남녀가 함께 술을 먹고 있는 특별한 대사조차 없는 장면이다. 두 번째 장면은 이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 경일이가 죽은 후, 젊다는 것이 그 자체로 고독하고 괴로운 일이며, 경일이 죽었다 해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우울한 내레이션 부분이다. 이러한 장면은 공서양속을 해치고 청년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지적되었고, 심의대본에서는 깨끗이 삭제되어 있다.18) <학사주점>에서 오히려 중점에 두고 있던 판잣집에 사는 경일의 극심한 가난이나, 그 상황을 묘사하는 대사, 계층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19)
위의 서류를 보면 심의를 거친 영화가 상영이 되기 위해서는 본편 영화 외에 반드시 ‘문화영화’ 혹은 ‘뉴우스영화’를 함께 상영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항은 1962년 제정된 영화법에서부터 포함된 것으로20) 영화검열사무가 문교부에서 보도와 선전업무를 담당하던 공보부로 이동하게 된 이유를 명확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극영화와 함께 상영되는 몇 편의 짧은 문화영화와 뉴우스영화들은 <자립경제>, <새로운 아이디어> 등과 같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국가관을 홍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극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문화영화 및 뉴우스 영화의 필름을 반드시 복사·신청하여 해당 영화가 극영화 상영 과정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자연히 관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이 영화들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던 영화 <학사주점>은 당시 실제 학사주점을 운영했던 이들에게 꽤나 불편한 영화로 비춰지고 있었다. 학사주점은 4.19혁명에 직접 참가했던 대학생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이야기할 장소를 만들고자 개업한 곳이었으며 몇 번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꽤 긴 시간 이어지면서 당시 명사들과 교류하고 설전을 벌이며 토론을 하던 공간이었다. 일본의 대학생 관광객이나 신문기자 등이 들러 설전을 벌이고 《요미우리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던 학사주점은 대학생들의 아젠다를 생산하던 다분히 엘리트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21) 이러한 고유명사로서의 학사주점은 영화 <학사주점>으로 넘어오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띠는 공간으로 변해 버린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살폈을 때 이 영화의 제목이 <학사주점>일 필요는 없다. 학사주점은 영화의 주된 공간이 아니며, 단지 주인공 경일에게 부잣집 딸 수미를 유혹해 한몫 잡으라고 부추기는 대학생 친구들이 있는 공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이 대학생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요행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당시 통용되던 학사주점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학사주점의 운영진이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준비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학사주점의 운영진들의 회의를 살펴보면 <학사주점>,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등에서 등장하는 학사주점의 분위기나 인물들이 자신들의 학사주점에 대한 인식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오도 단속반을 운영하고 싶다는 의지까지를 피력한다. 그리고 당시 남의 간판을 빌려다 만든 이 영화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손해배상 청구도 하려고 소장(訴狀)까지 썼다가, 6.3계엄령으로 그만두었다는 말에서22) 당시의 대학생들이 이 영화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청춘영화는 1967년을 기준으로 급격하게 쇠퇴하고 사라진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표절작이라는 비판과 함께 끊임없이 양산되는 비슷비슷한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이 더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제작사들은 편의에 따라 원작을 관객에게 알리거나 감추었고, 이것에 대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흥행된 작품과 내용도 배우도 유사하게, 배경도 분위기도 비슷하게 제작되었던 청춘영화에 싫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으며 관객의 외면은 한 장르의 소멸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춘영화가 발랄한 분위기를 영화내부로 끌어들여오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는 점, 영화의 산업을 확대하는 데에 기여를 했다는 점 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1) 영화예술의 연구를 목적으로 한 서울대문리대의 ‘대학시네마 클럽’에서는 <한국영화를 고발한다>는 심포지움을 열고, 최근 인기있는 영화들의 표절에 대해 논의하였다. 《동아일보》, 1964.11.14.
2) 이우석, 「1960년대 청춘영화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 논문, 2003, 7쪽.
3) 《조선일보》, 1964.3.10.
4) 《조선일보》, 1964.6.7.
5) 《경향신문》, 1965.7.10.
6) 이후 제명변경신청을 거쳐 영화의 제목은 <죽어도 보고 싶어>에서 <맨발의 청춘>으로 변경된다.
7) 이 작품은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원작자를 명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1960년대의 일본영화 표절작품을 나열할 때, <가정교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 역시 영화 내에 원작자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8) <맨발의 청춘>이 참고한 작품은 1958년 발표된 후지와라 신지(藤原審爾)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바바 마사루(馬場當) 각색·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으로 1963년에 영화화 된 <泥だらけの純情>이다. 이 작품은 1977년에 다시 한 번 영화로 만들어진다. (일본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jmdb.ne.jp 참조)
9) <가정교사>가 참고한 작품은 1957년 신문에 연재된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의 동명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다사카 도모타카(田坂具隆), 이케다 이치로(池田一朗) 각색·다사카 도모타카(田坂具隆) 감독으로 1958년에 영화화된 <陽のあたる坂道>이다. 이 작품은 1967년, 1975년에 각각 다시 한 번 영화로 만들어진다. (일본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jmdb.ne.jp 참조)
10) 공교롭게도 원작자의 명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맨발의 청춘>, <가정교사>는 모두 극동흥업주식회사의 작품이다. 이를 보면 제작사에 따라 원작 표시 여부가 결정되었을 확률이 있다. 참고로 영화 자체에만 원작을 표시했던 <청춘교실>의 제작사는 한양영화공사이다.
11) 저작권법은 1957년 1월 28일, 1935년 7월 8일 조선총독부칙령으로 반포되었던 ‘저작권법의시행에관한건’을 폐기시키며 제정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행령은 법령이 제정된 지 2년이 넘은 1959년 4월 22일이 되어서야 제정되었는데, 이 시행령에서도 저작권을 위반했을 때의 제재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12) 저작권 시행령에 의하면 저작권법을 조사 심의하는 기관으로 저작권 심의위원회를 두는데 이 위원회의 모든 사항은 문교부장관의 자문에 따른다.
13) 《경향신문》, 1961.10.2.
14) 1967년 4월 1일 부터는 업자협회에 각본심의위원회를 두어 자체적으로 각본을 심의하고 공보부에 영화제작신고를 하게 한다. 그러나 1964년경에는 경유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심의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15) 《경향신문》, 1963.2.15.
16) 《경향신문》, 1963.2.14.
17) 영화법시행규칙 1조 2의 내용은 “공보부장관은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수리한 신고내용에 제5조에 해당하는 사실이 있거나 기타 부당하다고 인정되는 사유가 있는 때에는 이에 대한 시정을 그 신고자에게 요청할 수 있다”이다. 이때 제5조의 내용은 국기문란을 포함한 사회적 혼란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18) 물론 거대담론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이 장면들의 삭제가 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회적으로 크게 비화되지 않았을 뿐,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릴 가능성은 농후하기 때문이다.
19) 이는 1970년대의 영화검열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에는 가난이나 개발이 미비한 장소 등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20) 1962년 제정된 영화법 2조 5항에서는 문화영화의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제11조에서는 문화영화의 동시상영을 의무화하고 있다(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 이후 1963년의 1차 개정영화법에서는 문화영화에 2조 6항에 뉴우스영화를 포함시키고(이 법에서 "뉴우스영화"라 함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부면의 시사를 신속·정확하게 보도하기 위하여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역시 극영화 상영 시에는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상영을 의무화 했다(제11조 공연자가 극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뉴스영화 및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
21) 유근호, 『60년대 학사주점 이야기-4.19세대의 시대증언』, 나남, 2011 참조.
22) 위의 책, 14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