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의와 집단행동으로서의 검열 – 시대적 상황이 만난 돌출적 요소들
앞서 <흔들리는 땅>으로 시작된 시나리오들이 영화화되지 못하고 급기야 완전히 상반된 내용인 아름다운 노동자상을 홍보하는 영화로 뒤바뀐 경로를 살펴보았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가 ‘검열’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예상할 수 있는 면면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의 내용을 고치기보다 긍정적으로 수용될 가능성이 높은 외부적 요소를 서류에 포함시켜 검열을 피하려 한다거나, 검열 역시 이를 의식하여 분명 서류와 시나리오의 내용이 다르며 시나리오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음에도 통과시켜 주는 것은 검열의 기준이나 엄정함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창작물에 반려나 전면 개작 등의 결과를 내림으로써 사회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감추려던 것, 그러니까 이때의 검열은 작품이 나오기 전에 제재하여 국가가 원치 않은 내용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기본적인 작동 방식이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때문에 1981년 개봉한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 중지사건이 검열의 범주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81년 개봉한 <도시로 간 처녀>는 당시 영화진흥공사가 선정한 우수영화로 대종상 작품상 후보에 까지 올랐던 작품이다. 1980년대의 대종상이 영화진흥공사가 주최한 정부 주도의 영화제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아니 그 이상으로 당국의 인정을 받은 ‘좋은’ 영화였던 셈이다. 즉, <도시로 간 처녀>는 사전 제재라는 요소가 아닌 국가의 승인을 받아 이미 개봉을 한 영화가 검열의 피해를 받은 작품으로 전환돼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곧 완성될 영화에 정부가 얼마나 개입했느냐가 아닌, 이미 완성된 영화에 개입된 또 다른 힘. 이것이 <도시로 간 처녀>의 검열과정이 내포하고 있던 검열의 또 다른 가능성과 1980년대만의 검열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제작사 태창흥업주식회사(이하 태창흥업)는 1981년 1월 23일 <도시로 간 처녀>의 제작신고서를 낸다. 이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는 <흔들리는 땅>의 ‘남숙’을 ‘문희’로 그 이름만 바꾸었을 뿐 역시 같은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다. 약 5년 만에 원작자를 김승옥으로 바꾼 이 시나리오가 다시 영화제작을 시도한 것인데, 이 시나리오는 안내양의 삥땅 수법과 운전기사 및 회사의 대비책이 폭력적으로 그려지는 것에 유의하라는 심의 내용이 나온 후 약 열흘 만인 2월 3일에 바로 수리된다. 이는 1976년 <흔들리는 땅>이 지난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결국 영화화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매우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심의의견 내용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림 1) <도시로 간 처녀> 극영화 제작신고 수리통보
<도시로 간 처녀>의 제작수리 통보 서류나 시나리오 심의 의견서에 범박하게 적혀 있는 유의사항은 시나리오 심의 때에도 본편 영화검열 때에도 구체적인 제제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정적인 묘사로 건전한 사회가풍 조성이 저해 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내용이 적혀있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작품이 제작에 타격을 입을 만한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1)
이는 1976년 <흔들리는 땅> 시나리오 심의 때 지적되었던 내용들과 비교 한다면 더욱 명확해지는 것인데, 1976년에 문제가 되었던 운전기사와 버스안내양들의 치부가 드러난다는 점, 버스회사에서 일하는 이들의 인격과 인권을 모독했다는 점, 버스 안 행상인들과 버스회사 종사자들 사이의 뇌물수수가 지나치게 묘사된다는 점, 버스회사의 감독이나 운전기사가 버스안내양에게 부정행위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 등이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되던 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두는 것이었다. 오히려 <도시로 간 처녀>가 구체적으로 지적했던 장면들은 이와 전혀 다른 맥락에 서 있다.
<도시로 간 처녀>에서 검열관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부분은 본편영화검열 서류에서 확인된다. 이때 지적된 부분은 주인공 문희를 겁탈하려던 기사를 동료 버스기사들이 돌아가며 뺨을 치는 장면, 알몸수색 중 문희의 상·하반신 노출, 문희가 회사 옥상에 올라섰을 때 모여 있던 군중장면과 추락장면 등이었는데, 이 같은 장면들을 지적한 것은 버스회사 종사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폭력적이거나 선정적, 사회적 불안 유도 등을 제거하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공윤은 이 장면들만을 단축하거나 삭제한다면 버스안내양과 유부남 기사가 동거를 하는 모습이나, 버스안내양과 감독이 윙크를 주고받으며 삥땅한 돈으로 뒷거래를 암시하는 모습, 버스운전기사가 삥땅을 하지 않아 자신에게 뒷돈을 주지 않는 버스안내양을 골탕 먹이고 겁탈까지 하려는 장면이 그대로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중학생 이상부터 볼 수 있으며 우수영화가 될 수 있고 해외로 수출까지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7월 1일 검열 합격증이, 9월 7일 영화예고편검열합격증이 발부되면서 <도시로 간 처녀>는 관객들을 만날 준비를 한다.
(그림 2) 영화검열 합격통보 및 각서
흥미로운 것은 검열합격증을 받기 하루 전인 6월 30일에 제작자가 작성한 각서가 있다는 점이다. 이 각서는 문공부장관 앞으로 보내는 것인데, 영화가 물의를 빚는다면 문공부의 조치를 따르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날 영화검열합격통보문서에서도 “동 영화 상영 중 사회적 물의가 야기될 경우 상영중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현재로서 문공부가 이 각서를 왜 요구한 것인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사회적인 치부를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판단했을 때 관례적으로 거치는 절차일 수도 있고, (이후 상술하겠지만) 같은 해 영화 <만다라>가 겪었던 것과 유사한 일이 일어날 때를 대비한 것일 수도 있으며, 새 정권의 새로운 분위기 하에서 과한 사전 검열을 하기보다는 사후조치에 힘을 쏟기 위해 요청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됐던 문공부는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빠르게 처리할 수 있도록 상영중지를 검열합격의 조건으로 내걸었고 제작사는 영화의 개봉을 위해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제작사는 몇몇 지적된 부분에 대한 재심의를 요청한 후 최종합격통보를 받고 12월 3일 개봉한다.
그러니까 버스안내양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은 1981년에 개봉한 <도시로 간 처녀>에 와서야 처음으로 영화에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공교롭게도 버스안내양들이 노동자로서의 자의식을 끊임없이 재고하며 확장시킨 때와 맞물린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버스안내양들은 논픽션을 통해 가십거리처럼 소비되었던 자신들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성실한 노동자로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했고, 합리적인 노동환경을 사회에 요구할 만큼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도시로 간 처녀>는 개봉했고, 200여명의 버스안내양들은 극장 앞에 모여 공개적인 항의를 시작한다.2)
(그림 3) 한국노총의 영화상영 금지요청
(그림 4) 노동부장관이 보낸 상영중지 긴급협조 요청
가장 먼저 영화의 상영금지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은 한국노동연합총연맹(이하 한국노총)이었다. 한국노총에서는 12월 9일, 문화공보부장관에 공문을 보내 이 영화가 전국자동차노조연맹과 이 연맹에 소속된 운전기사와 안내양 등 15만 명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인권을 유린했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영화의 상영중지를 요청하고 있다. 바로 다음날인 12월 10일에는 노동부장관이 문공부장관에게 직접 공문을 보내 비슷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상영중지를 요청한다. 그리고 같은 날 <도시로 간 처녀>의 제작사인 태창흥업은 문공부에 이 영화가 물의를 일으키고 있으니 스스로 상영을 철회, 검열합격증을 반납하고 이후 개작하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다. 문공부는 태창흥업에서 자진 상영취소를 하겠다고 보내왔던 공문을 두 단체에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하고, <도시로 간 처녀>는 극장에서 사라진다.
상영이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을 가장 간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도시로 간 처녀>가 현실의 문제를 과하게 다루었고, 이로 인해 정부의 제재를 받았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 사건을 다룰 때에 이러한 서술은 그리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같은 해 비슷하게 특정단체의 항의를 받았으면서도 <도시로 간 처녀> 때와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던 문공부의 대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한다면 문공부의 발 빠른 수습은 검열의 서류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또 다른 힘 때문이 아닌가라는 점을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같은 해인 1981년 1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품인 임권택의 <만다라>가 제작을 시작한다. <만다라>는 1981년 1월 24일 제작신고 시 ‘저속한’ 두 마디 대사가 지적되는 정도에 그칠 만큼 무난하게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 촬영 중이던 그 해 5월 대한불교조계종(이하 조계종)은 문공부장관에게 이 작품이 불교의 명예를 실추시킬 위험이 있으니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조치해달라는 협조 공문을 보내면서, 창작자과 검열자 사이에 새로운 주체가 출현한다.3) 문공부는 <만다라>의 제작사였던 화천공사에 조계종과 상호 협조하여 이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공문을 보내고,4) 이에 화천공사는 “승적이 분명한 승려 및 사계 전문가로부터” 철저한 고증을 받았고, “이 작품의 촬영개시 이전 조계종 총무원에” 협조를 의뢰했다는 회신을 보낸 후5) 특별한 잡음 없이 7월 13일 검열에 합격한다. 그러나 사전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조계종 측은 <만다라>가 “불교에 커다란 모욕 행위가 되는 영화”이니 다시 검열해 줄 것을 문공부에 요청하고 만약 이 영화가 상영된다면 전국적으로 불교도들이 영화의 상영을 막기 위해 데모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뜻을 보이고 있다며 항의에 가까운 공문을 보내기에 이른다.6)
(그림 5) 문공부가 조계종에 보낸 영화 <만다라>에 대한 건의서 회신
이에 문공부는 조계종 측에 단호한 회신을 보내는데, 이 영화는 이미 조계종과 협의한 바 있으며 무엇보다 “영화는 영화관계 법령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로이 제작되는 창작물로 동 영화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검열을 받은 작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덧붙여 “국가적 사회적 안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 시점에서 사회불안 요인을 유도함이 없도록 협조”바란다는 강경한 요구까지도 덧붙이고 있다. 이 같은 태도를 같은 해에 일어난 <도시로 간 처녀>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매우 흥미롭다. <만다라>에 직접 명시했던 문공부의 말에 따르자면, <도시로 간 처녀>에 문제가 생기고 한국노총과 노동부의 상영중지 요청을 받자마자 상영을 중지시키는 것은 문공부 주도의 심의를 이미 통과한 이 영화가 “영화관계 법령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와 “합법적인 절차”를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다라>는 행하지 않았지만 <도시로 간 처녀>는 행한 것, 바로 이 차이가 두 영화에 대한 문공부의 대처를 가른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림6) 재심의 시 삭제를 요청한 부분 표시
위에 붉게 표시된 부분은 <도시로 간 처녀>가 영화의 몇몇 부분들을 수정한 후 재심의를 받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지적된 장면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군중신과 문희의 투신장면은 <도시로 간 처녀>가 처음 심의를 받을 때부터 계속해서 지적되는데 이 부분, 그리고 수기로 첨부되어 있는 군중신의 삭제는 문공부의 상반된 반응을 설명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다. 즉, <만다라>의 조계종 승려들은 행하지 않았지만 <도시로 간 처녀>의 버스안내양들은 행한 집단행동, 이것은 문공부가 “국가적 사회적 안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 시점에서 사회불안 요인을 유도”를 막기 위해 진행했던 검열과 그로 인해 승인 받은 작품이 유발한 결과가 된 셈이었다. 심의를 통해 <도시로 간 처녀>에서 끝끝내 삭제하려 했던 이 장면은7) 1980년대 초 집회나 데모 등의 집단행동에 대한 것이 언론에서 모두 걸러내던 때, 버스안내양들로 인해 재현되고 있었다. <도시로 간 처녀>를 승인함으로써 오히려 “사회불안을 유도”하고만 문공부가 <만다라>때와는 다르게 <도시로 간 처녀>는 빨리 무마시켜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과 그것을 지적하던 서류가 아닌 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민간의 항의로서의 검열은 1980년대에 들어서서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검열이라 할 수 있다. <도시로 간 처녀>는 바로 이 선봉에 서 있었고, 이후 <비구니>나 <우편배달부는 두 번 벨을 울린다>와 같은 영화에서 역시 영화에 등장하는 직군들의 항의로 인해 영화의 제작을 중단하거나 영화의 제명이 변경되는 등 국가적 검열과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영화의 향방을 결정하게 된다.8) 이것은 곧 심의기관의 주체였던 문공부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돌출적인 상황이자 1980년대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벌어진 검열이라고 할 수 있다. 상영이 중지되었던 <도시로 간 처녀>가 재개봉을 준비하면서 문공부보다 자신들의 영화를 문제 삼았던 단체를 더 의식하고 있던 것도, 문공부는 이 중간에서 특별한 의견을 내보이지 못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도시로 간 처녀>는 약 6개월간 2억여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간 동시녹음 영화였다. 제작사에게 상영중지는 막대한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에 영화를 재상영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재상영을 위해서는 버스안내양들과 그 관계자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제작사 ‘스스로’ 노력해야 했던 것이다. 이때의 ‘스스로’는 매우 중요하다. 영화를 다시 걸기 위해 제작사가 시행한 수많은 삭제들은 국가검열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작사의 판단으로 이루어진 자체검열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창흥업은 검열합격증을 반납하겠다는 공문을 보낸 1981년 12월 10일에서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재상영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이 모든 준비는 노동 단체들을 향해있었고, 제작사는 적극적으로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태창흥업은 노동단체를 불러 1차로 진행한 1982년 1월 13일 시사회 이후 어떠한 공식적인 답변도 듣지 못하자 스스로 ‘검열’한 부분을 명시하고 2차 시사를 열겠다며 노동단체 측에 다시 송부한다.
(그림7) 제작사가 재상영을 위해 자체검열을 실시하여 수정한 내용
태창흥업에서 수정한 내용을 살펴보면 영화의 완성도는 전혀 고려치 않은 채, 문제가 되었던 모든 부분을 삭제하고자 했으며 심지어 내레이션이나 자막을 삽입함으로써 철저히 항의 주체의 구미에 맞추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작사는 항의를 했던 버스안내양들이나 자동차노조, 한국노총 등이 범박하게 지적했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여성)노동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는 범위를 설정하고 직접적인 장면삭제를 감행한 것이었다. 이는 미리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삭제했던 과거의 검열과는 달리 항의 주체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진행한 자체 검열이었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태창흥업의 자체검열,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회신 사이 문공부 즉 국가검열주체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태창흥업이 <도시로 간 처녀>의 재상영 의지를 밝힌 후 문공부가 이 진행사항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태창흥업이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이하 전자노련)과의 1, 2차 시사를 끝내고, 수정된 부분에 대해 전자노련이 한국노총과 협의하고, 이 결과를 전자노련이 다시 태창흥업에 알려주고 나서야 큰 이의 없다는 답변을 받아낸 태창흥업이 보낸 공문을 통해서이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사이 어떤 단체도 문공부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오롯이 당사자들끼리의 합의된 검열이 이루어진 후에야 제작사는 재상영 합격증을 발부해줄 수 있는 문공부를 다시 찾은 셈이다. 2월 20일 문공부는 한국노총으로부터 이 작품에 특별한 이의가 없다는 공문을 받고도,9) 3일 뒤 노동부의 의견을 묻는 공문을 다시 보내고,10) 다음날 노동부로부터 상영에 이의가 없다는 의견을 받고서도11) 공윤에 재심의를 요청한다.12) 문공부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한 후 3월 4일 검열합격증을 재발급한다.
(그림8) 극영화 <도시로 간 처녀> 보도자료
상영 직전 문공부에서 작성해 언론에 배포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보도 자료는 제작사의 의지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 위에서 언급한 공문들의 전달과정을 보면 제작사만큼이나 절박해 보이는 것이 문공부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보도자료를 작성한 것 역시 다시 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싶어 하지 않는 문공부의 의지를 반증하는 것이라 할만하다. 문공부는 그 어느 때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도시로 간 처녀>의 재상영 여부를 확인하고자 했고, 영화 제작사와 그것의 문제없음을 판단할 수 있는 노동단체들의 합의만을 기다리며 철저하게 문서전달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처음 이 영화를 승인했던 문공부는 문제가 생긴 후 영화의 내용이나 재검열, 재상영 과정에 어떠한 입장도 내비치지 않았고, 오히려 문공부의 손을 떠났을 때 <도시로 간 처녀>의 재상영은 말끔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버스안내양들의 요구대로 <도시로 간 처녀>는 말끔하게 재편집되었고, 재개봉 후 더 이상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도시로 간 처녀>가 개봉했다가 상영중지가 되고, 재상영에 이르는 과정에는 수많은 검열관들이 끼어들고 있었지만 이는 우리가 익히 알던 ‘그 검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민간단체들은 스스로의 모습이 등장하는 영화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원치 않은 재현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였다. 이로 발생한 집단적 항의는 1980년대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아 영화의 향방을 결정짓기도 했으며, 각각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들이 모인 순조로운 검열이 진행될 수도 있었다. <도시로 간 처녀>의 검열과정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이 다양한 변화들은 1970년대까지는 찾아보기 힘든 지극히 1980년대적인 검열이라 할 수 있다.
완벽할 수 없는 ‘삭제’, 유동하는 ‘검열’
다소 길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질문에 답하면서 다시금 검열에 대해 생각해 본다. 버스안내양들이 어떻게 1981년에야 항의를 할 수 있었는지, 왜 그때 마침 <도시로 간 처녀>는 개봉한 것이었는지, 군중신이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집단적인 항의는 왜 하필 그때 또 문제가 되었던 것이었을지. 이 모든 것은 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우연이라 할지라도) 또 이 모든 것은 검열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이처럼 검열에는 너무도 많은 힘들이 끼어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것도 고려치 않는 무소불위의 힘처럼 간주되어 왔다. 보통 검열을 이야기할 때 중심에 두는 것은 잘려나간 장면들이지만 이러한 시각만으로는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 중 투여되는 상당수의 것들이 보지 못할 수밖에 없다.
검열은 꽤나 생산적인 작용이다. 이는 검열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영향력의 확대와 변화의 가능성, 반대로 그것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1970년대에는 나올 수 없었던 <흔들리는 땅>은 1981년 <도시로 간 처녀>로 등장할 수 있었고, 분명한 승인을 받은 이 영화는 민간단체의 힘으로 스크린에서 내려왔다. 다시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위해 당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체들의 합의된 검열을 이루어졌고, 이 사이에는 창작의 자유나 현실과 재현물은 다른 것이라는 식으로 검열에 대응하는 원론적인 논리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이처럼 검열은 끊임없이 움직였고, 변화했고, 약해지거나 강해졌다. 때문에 이처럼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지닌 검열을 단일하게 보는 것만큼, 그 방향성을 하향식으로만 생각하는 것만큼 재미없게 보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시기마다 민감한 문제들은 변화하고, 이를 걸러내는 실제 검열의 과정은 길고 복잡했으며, 검열관은 단일한 주체가 아니었다. 검열에 대해 좀 더 나은 시각을 기대한다면 검열을 늘 극복할 대상이 있었던 현대사의 증거로 보는 것을 넘어 하나의 창작물에 달라붙어 있는 모든 과정을 고려의 대상으로 두어야 할 것이다.
1) 물론 이러한 결과에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를 보장한 것처럼 보여야했던 1981년이라는 시기상의 요인도 기여했을 것이다.
2) 「영화계에 도시로 간 처녀 파문」, ≪경향신문≫, 1981.12.12. 이 기사에는 78년에 <맨주먹의 소녀들>이라는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를 일부만 바꾼 영화가 나왔을 때에는 버스안내양들이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문제제기하는 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지난 글에서 보았듯이 이 두 작품은 결코 비슷할 수 없다. 이 부분의 기사는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3) 대불총교화제 203호, 「영화 만다라 제작에 따른 종무 협조의뢰」, 1981.5.1.
4) 예술 1724-7514, 「국산극영화 만다라 제작에 관한 건」, 1981.5.25.
5) 「예술 1724-7514에 대한 회신」, 1981.5.
6) 대불총사제 425호, 「영화 만다라에 대한 건의」, 1981.9.8.
7) 영화가 개봉한 후 상영중지를 요청하는 단체들이 모두 투신장면을 문제 삼는 것으로 보아 감독은 이 장면을 끝내 삭제하지 않은 채 개봉한 것으로 보인다.
8)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는 비구니들의 집단적인 항의로 상당한 분량의 영화를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경향신문≫, 1984.6.13.), <우편배달부는 두 번 벨을 울린다>의 제명변경을 요구한 체신노조는 문공부로부터 영화의 제목은 저작권에 관한 문제이니 함부로 변경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경향신문≫, 1982.8.23.), 시위에 들어갈 것을 구체적으로 통보한 후 기동 경찰 백여 명이 출동하는 소동을 벌이고 나서야 자신들의 직명을 영화에서 지울 수 있었다(≪동아일보≫, 1982.8.24.).
9) 노총홍보 제115호, 「<도시로 간 처녀> 시사 결과 통보」, 1982.2.20.
10) 예일 1724-14, 「영화 <도시로 간 처녀> 재상영 협조」, 1982.2.23.
11) 노조 1454-5441, 「<도시로 간 처녀> 상영협조에 대한 회신」, 1982.2.24.
12) 예일 1724-2430, 「극영화 재상영에 대한 판단 협조」, 198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