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의 검열과 <도시로 간 처녀>(1) : 어떻게 버스안내양들의 고난이 감추어졌는가?(1970년대)

by.송아름(영화사연구자) 2018-04-09
맨주먹의 소녀들 포스터(김영효, 1976)
검열의 추이를 담은 흥미로운 텍스트, 영화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

영화 <도시로 간 처녀>와 그 검열서류는 1970년대와 80년대, 두 시대의 서로 다른 검열 양상을 추적하는 데에 매우 흥미로운 요소를 제공해 준다. 물론, 이는 의아함을 자아낼만한 서술이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도시로 간 처녀>는 김수용 감독의 연출로 1981년에 개봉,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상영중지 사건을 겪으면서 사적(史的)으로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이 전부이다. 때문에 위의 서술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도시로 간 처녀>를 통해 두 시기의 검열 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문제, 다른 하나는 흔히 ‘검열’이라 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국가가 자의적인 방식으로 법령을 구성하고 영화가 나오기 전에 삭제하는 것이 아닌 ‘상영중지’가 검열의 범주에서 설명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버스안내양들이 1981년에 개봉한 <도시로 간 처녀>에 처음 반기를 들었다면 그 이전 영화들에선 버스안내양을 어떻게 다루고 있었을까? 1961년 8월, 시내버스의 차장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교체되면서 생겨난 버스안내양이라는 직업군은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까지 각종 가십들 사이에 등장하면서 타락한 여성이라는 이미지 속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열악한 노동환경과 임금수준은 ‘삥땅’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기에 버스안내양들은 일간지와 각종 잡지에서 비행을 일삼는 이들로 그려지면서 당시 요구되던 성적(性的)·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이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60-70년대 영화에서 이 직업군은 거의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만약 등장한다 해도 당대에 소비되던 모습과는 달리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받는 노동자로 그려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영화 <맨주먹의 소녀들>(김영효, 1976)이다. 이 작품은 성실하고 당찬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버스안내양이 깨끗하고 우수한 노동환경 속에서 보호받는 노동자이며, 스스로 노력만 한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에 충분한 직업군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작품의 검열서류에서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와 거의 동일한1) 시나리오가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맨주먹의 소녀들>로 개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검열과정은 버스안내양들의 힘겨운 일상이 왜 1970년대에는 영화에 나올 수 없었는지, 어떻게 전혀 다른 영화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음 문제에 답하기 위해 검열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잘 알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쉽게 규정되지 않는 것이 검열의 정의 혹은 범위이기도 하다. 보통 한국영화사에서 검열을 언급할 때에는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 전 정권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시나리오나 영화 장면에 가위질을 해대는 것을 의미했다. 즉 검열은 국가가 가해자이며, 창작자와 작품이 피해자라는 도식 안에서 움직였으며, <도시로 간 처녀> 역시 바로 이 범주에서 언급되어 왔다. 영화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당국이 버스안내양들을 시켜서 벌인 검열이라는 인식은2) 당시 많은 영화인들을 공분케 했고, 현재까지의 영화사 서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시각에는 검열에는 정부의 폭력적인 해석 이외의 것들은 끼어들 리 없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는데, 상영중지 과정 중 <도시로 간 처녀>의 검열 서류에서는 심의 주체였던 문공부, 그리고 그 산하의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오히려 검열에서 배제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또한 버스안내양들의 집단적인 항의는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와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는 고정적으로 알고 있던 검열에 대한 인식을 좀 더 넓혀야 한다는 것과 어느 시대나 검열의 작동방식이 유사한 듯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도시로 간 처녀>의 검열서류는 당대의 검열 양상을 추적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문제를 성실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용이 길어질 수밖에 없기에, 부득이 두 편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시기상 앞서고 있으며 1970년대의 검열양상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맨주먹의 소녀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금지와 배제로서의 검열 – 건전한 버스안내양 그리기

영화 <도시로 간 처녀>는 1981년에 개봉했지만, 그 시나리오는 홍성원의 중편 소설 「흔들리는 땅」3)을 각색한 1976년의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에서부터 확인된다. <흔들리는 땅>의 시나리오는 소설가 김승옥이 소설 속 갸바이(차내 행상) 형섭의 서사를 버스안내양 남숙의 서사로 각색하여 우성사에서 제작하고자 한 작품이었다. 소설은 형섭이 사라진 남숙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듣게 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후반부에 이르러 남숙이 버스안내양을 하면서 겪었던 부당한 대우와 열악한 노동환경, 그것에 어떻게든 항의하려 투신까지 불사했던 남숙의 모습이 묘사된다.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은 바로 이 후반부를 영화의 주서사로 삼아 버스안내양들이 삥땅을 의심받아 몸수색을 당하고, 뒷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스 기사에게 골탕을 먹고, 대학생 승객과 연애를 하다 버림받으며, 급기야 투신자살까지 하는 장면들을 그려냈는데, 사실상 1981년 제작된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와 차이가 없다.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은 1976년 제작을 시도하는데 당시 영화의 검열을 주관하고 있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로부터 전면 개작 판정을 받으면서 삐걱대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땅> 시나리오 심의의견서-1
<흔들리는 땅> 시나리오 심의의견서-2
<흔들리는 땅> 시나리오 심의의견서-3
[그림 1] <흔들리는 땅>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이 서류는 예륜이 시나리오 사전 심의를 진행한 후 문공부장관에게 보내는 것으로 영화시나리오 심의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흔들리는 땅>은 ‘밝고 진지하게, 몸수색 짐수색 지나치지 않게’하라는 요구와 버스안내양, 버스 안 행상인들과 버스회사 간의 뇌물 수수 등의 ‘부조리 현상’을 ‘과다 노출’했다는 이유로 전면 개작 판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세 번째 장의 ‘종합의견 보충설명 및 부분시정사항’에는 영화에서 “수색”보다는 “교양강좌나 일일일기 교육” 등의 계도적인 방법으로 보여줄 것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러한 권고 사항은 훗날 이 작품이 <맨주먹의 소녀들>과 같은 계몽적인 영화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추측케 한다. 이후 약 보름만인 4월 6일, 우성사는 역시 같은 제목의 시나리오로 다시 심의신청 하지만, 초심에서 지적된 문제들이 수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주일 만에 반려된다.4)  그 후 우성사는 시나리오 내용에는 큰 변화 없이 원작자를 김승옥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남숙’에서 ‘진숙’으로, 제목을 <비번날의 세 처녀>로 바꾼 시나리오를 다시 심의 신청한다.
 
<비번날의 세 처녀> 시나리오 심의의견서-1
<비번날의 세 처녀> 시나리오 심의의견서-2
[그림] 2 <비번날의 세 처녀>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이 작품 역시 전면 개작 판정을 받는데, 이때에는 버스안내양의 삥땅을 찾기 위한 몸수색에 남자직원이 포함된 것이나 여주인공의 투신 장면이 추가적으로 문제가 된다. 이때 심의 의견에는 인권유린의 문제가 있으니 일부 부정행위를 전체의 것으로 확대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약 한 달 후인 6월 1일, 남숙을 주인공으로 한 <흔들리는 땅> 시나리오가 다시 심의 신청되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전면 개작 통보를 받는다. 이러한 과정은 사적(史的)으로 <도시로 간 처녀>가 알려진 것처럼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각색 시나리오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한편, 풍문처럼 떠도는 소문과는 상관없이 버스안내양들을 부도덕하게 다루는 내용은 1970년대 후반까지 대중에 공개되어서는 안 될 민감한 사안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땅>의 심의 과정은 ‘밝고 진지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부조리 현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전형적인 국가 검열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검열은 가십으로 떠돌던 버스안내양들의 모습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힘쓸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버스안내양을 원했기에 앞서 지적되었던 내용들이 문제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1975년 연두 순시 때 박정희가 여성 직업인의 처우개선의 일환으로 버스안내양에 대한 복지정책을 언급하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바로 이듬해 버스안내양으로서는 최초로 성진운수에서 근무하던 버스안내양 이매순이 국무총리 표창을 받으면서 여성노동자로서의 버스안내양이 주목받던 때였다.5) 육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힘들지만 승객을 위해 웃는 얼굴로 일하고 부모를 봉양하는 ‘자랑스런 또순이’6)라는 국가가 원하던 노동자상이 만들어지고 있던 이때에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과 그 수정본들이 검열을 통해 저지당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우성사는 바로 이 상황을 활용해 다시금 버스안내양들의 고충을 그린 시나리오의 영화화를 시도한다.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이 다시금 전면 개작 통보를 받은 지 약 5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 3일, 역시 전과 같은 시나리오가 <아직도 먼 종착역>이라는 제목의 각색 시나리오로 원작과 원작자를 모두 바꾸어 심의 신청하는데 이 변화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아직도 먼 종착역> 시나리오 심의의견서-1
<아직도 먼 종착역> 시나리오 심의의견서-2
<아직도 먼 종착역> 작가의 영화화 승낙서
[그림 3] <아직도 먼 종착역>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및 작가의 영화화 승낙서
먼저 이 서류에서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로 적혀있던 부분들이 모두 한국공연윤리위원회로 수정된 것을 볼 수 있다. 예륜은 1976년 5월부터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으로 명칭을 바꾸어 심의를 진행했는데, 영화 <흔들리는 땅>과 그 수정본들의 심의를 받는 사이 심의기관이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때 수정된 원작과 원작자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바뀐 시나리오의 제목은 당시 노동청에서 발행하던 잡지 《산업과 노동》의 노동자 생활수기 모집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던 「아직도 먼 종착역」에서 가져온 것이며, 원작자 이매순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 해 국무총리상을 받은 버스안내양이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아직도 먼 종착역>의 심의 시나리오의 첫 장에는 이 작품이 원작의 가치와 우수성으로 인해 노동청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는 문구가 매우 부각되어 있다.

시나리오 <아직도 먼 종착역>이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과 큰 차이가 없다고 했을 때, 서울로 상경한 어린 소녀가 “군수님도 타기 힘든 국무총리상을 서울 가서” 탄 자랑스럽고 자부심 넘치는 어린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수기 「아직도 먼 종착역」이 결코 이 시나리오의 원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짐작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먼 종착역>은 원작과 원작자를 바꾸고 노동청의 후원까지를 명시하며 심의를 신청했고, 이전 <흔들리는 땅>에서 지적한 ‘삥땅’의 문제나 ‘투신장면’이 동일하게 지적되었음에도, 위의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정사항이 이후 두 장이나 더 빼곡하게 적혀 있을 만큼 많았음에도, 전 과는 다르게 수정통과 판정을 받는다. 이 결과는 사실상 작품의 원작이나 원작자가 시나리오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인 요인이 되어 검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문제가 되었던 시나리오들과 같은 시나리오였던 <아직도 먼 종착역>이 이번에는 수정 통과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최우수 노동자 생활수기를 원작으로 삼고, 국무총리상을 받은 버스안내양이 원작자이며, 노동청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 즉 시나리오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힘이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통과를 받았던 <아직도 먼 종착역>은 끝내 영화화 될 수 없었다. 이는 우성사가 중요하게 부각시켰던 ‘노동청 후원’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기 때문인데, 노동청은 우성사가 시나리오에 노동청의 의견을 반영하고 심의를 받기 전 노동청의 최종 검토를 받는다는 조건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고, 노동자를 부정적으로 그려 원작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영화후원 명칭 사용 허락을 취소했던 것이다.
 
노동청의 영화후원 명칭사용 허락 취소 공문-1
노동청의 영화후원 명칭사용 허락 취소 공문-2
노동청의 영화후원 명칭사용 허락 취소 공문-3
[서류 4] 노동청의 영화후원 명칭사용 허락 취소 공문

이 서류를 살펴보면 노동청은 노동자나 노사관계가 부정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에 가장 큰 불편함을 표하고 있다. 공윤은 노동청 후원 명칭, 원작과 원작자의 함의 등을 고려하여 <아직도 먼 종착역>을 통과시켜주었을지 몰라도 정작 노동청의 입장에서는 승인할 수 없는 장면들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후 우성사는 ‘노동청 후원’ 명칭을 삭제하고 원안 이매순, 각색자 김승옥, 제작자 김용덕으로 11월 23일에 <아직도 먼 종착역> 제작을 신고,7)  12월 3일 제작신고서는 수리된다.8)  그런데 약 보름 후인 12월 16일, 우성사는 갑작스레 <아직도 먼 종착역>을 <맨주먹의 소녀들>의 소녀들이라는 제목으로 바꾸겠다는 개제(改題)심의의견서를 제출하는데,9) 이때 제목과는 상관이 없을뿐더러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중심 스태프인 감독과 각본이 교체된다. 그리고 시나리오 <맨주먹의 소녀들>은 <아직도 먼 종착역>이 가지고 있던 고발적인 요소를 모두 삭제한 채, 모범적인 사원이며 효녀이고 부족한 시간을 쪼개 검정고시까지 준비하는 버스안내양 영옥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가 위기를 겪을 때에는 동료들이 도와주고, 나중에는 버스회사의 간부들까지 나서 영옥을 살펴주는 국책영화처럼 그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맨주먹의 소녀들>(김영효, 1976) 검열 합격증
[그림 5] <맨주먹의 소녀들> 검열 합격증

 
결국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이 보여주고자 했던 버스안내양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약 9개월 후인 1976년 3월, 전혀 다른 내용과 제목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시나리오 내용과는 상관없는 원작과 원작자까지 명시해가며 드러내려 했던 내용이 ‘오늘은 참’고 ‘내일을 위해 달’리는 버스안내양들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10)  당시 공윤에서 발행하던 월보 《공연윤리》의 영화시나리오 심의 통계 목록에서는 <아직도 먼 종착역>은 찾을 수 있지만 <맨주먹의 소녀들>은 찾을 수 없다. 이는 <맨주먹의 소녀들>이 개제신고서를 낸 후 이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심의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사항들은 갑작스레 제출된 개제(改題)심의 신청서가 어딘가 강제적이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을 둘러싼 이 복잡다단한 과정은 적어도 1970년대 말까지 영화 스크린에는 버스안내양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밀히 말해 노동청의 후원을 받기로 했다는 공문과 원작자의 이름만으로 내용이 전혀 변하지 않은 시나리오를 통과시킨 것으로 보아 검열 과정 중 버스안내양들을 얼마나 세심하게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반복적으로 지적되던 삥땅이나 투신자살과 같은 장면은 이후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로 제작되어야 할 만큼 민감하게 받아들여진 것이 사실이었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버스안내양들의 고된 일상과 노동 착취는 1970년대에까지는 영화에 등장할 수 없었고, 이렇게 노동자의 모습은 지켜지고 있었다. 약 5년 후, 이 시나리오는 1981년 스크린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영화사상 초유의 상영중지 사태와 맞닥뜨린다.
 
1. 이때 ‘거의 동일’하다는 표현은 줄거리나 장면에서 특징지을 만한 차이가 전혀 없고,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몇몇 대사들만 바뀐 것을 의미한다. 영화 <맨주먹의 소녀들>은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과 그 수정본들(이후 설명할 <비번날의 세처녀>, 다시 수정한 <흔들리는 땅>, <아직도 먼 종착역>, <맨주먹의 소녀들> 그리고 <도시로 간 처녀>에 이르기까지)과 사실상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조금씩 변화가 있다고는 해도 서사에 지장을 줄만한 것이 아니라 외래어 사용을 우리말로 순화하거나 비속어를 수정하는 정도이며, 설사 서사에 변화가 있다 해도 중심인물의 성격이나 상황 등은 변화하지 않고,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의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거나 삭제되는 정도이다. 쉽게 말해 <흔들리는 땅>의 수정본들이라 할 수 있는 이 시나리오들은, <맨주먹의 소녀들>과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까지를 포함하여,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도시로 간 처녀>를 연출한 김수용은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해 어용노조가 시켜서 벌인 특별한 의미 없는 난동이나 폭로에 대한 검열로 인식했고(김수용, 『나의 사랑 나의 씨네마』, 씨네21, 2005, 221-224쪽), 이 영화의 제작자 임원식은 유신 때에는 검열이 폭력적이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어용단체를 통해 에둘러 박해했다며 이를 국가의 검열로 파악했다. 임원식, “죽어도 4.3영화 한 편은 만들어서 죽겠다”, ≪제주의 소리≫, 2004년 9월 24일. m.jejusori.net.
3.  홍성원, 「흔들리는 땅」, 문학과 지성 19호, 문학과 지성사, 1975 참조.
4. 「시나리오 재심의견서」, 1976.4.13.
5. “국무총리 표창, 이매순 외 30명”, ≪매일경제≫, 1976.03.10. 7면 표제에 ‘이매순’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버스 안내양이 국무총리상을 받은 것 자체에 당시 큰 의미가 부여되었고, 이매순에 관한 기사들이 이후 줄을 이었다.
6.  “총리 표창 받은 안내양 이매순양 “승객은 나의 가족”-자랑스런 또순이”, ≪경향신문≫, 1976.3.10.7면.
7. 「영화제작신고서」, 1976.11.23.
8. 영화 1733-18001, 「극영화 <아직도 먼 종착역> 제작신고 수리통보」, 1976.12.3.
9. 「시나리오 개제심의의견서」, 접수 1976.12.16., 심의 1976.12.17.
10. 김인순이 부른 영화 <맨주먹의 소녀들>의 오프닝곡 <맨주먹의 소녀들> 가사만으로도 이 영화의 의도는 파악된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길잡이 귀염둥이 소녀들/ 자주색 유니폼이 오늘도 빛나요/ 사연도 많겠죠. 꿈들도 많겠죠./ 그러나 이 시간도 내일 위해 일해요./ 보람찬 내일 영광스런 그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 믿어 보면서/ 오늘은 참아요. 내일 위해 달려요./ 고달픔을 잊고 힘차게 오늘을 살아요./ 오늘을 살아요. 오늘을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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