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의 고수, 장르의 달인 이두용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2018-01-28
이두용 감독
한국 장르 영화의 계보에서 이두용 감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는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고, 그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었다. ‘액션’이 주종목이었지만, 경력 초기의 멜로드라마도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후의 증인>(1980) 같은 미스터리나 <귀화산장>(1980) 같은 호러 스릴러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병태의 감격시대>(1975)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만들기도 했고, <경찰관>(1978), <장남>(1984) 같은 리얼한 톤의 드라마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대극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궁중 사극인 <내시>(1986)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같은 엄격한 형식미와 <뽕>(1985) 같은 서민 희극을 오가며 수작을 뽑아냈다. <초분>(1977), <물도리 동>(1979), <피막>(1980) 등에선 샤머니즘이라는 테마를 다루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리랑>(2003)은 흑백 무성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두용 감독처럼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던 감독은 흔치 않다.

물론 이러한 다재다능함을 긍정적으로만 볼 순 없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는 생존을 위해 영화산업이 요구하는 ‘제품’을 끊임없이 찍어내야 했던 감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거대한 모순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하강기를 맞이했다. 1973년에 제정된 ‘유신영화법’은 국책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진흥공사’를 설립시켰다. 외화 수입이 제한된 상황에서, 영화 산업은 흥행성이 보장된 외화 쿼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허가제에 의해 살아남은 몇몇 영화사들은 쿼터 확보를 위해 한국영화를 만들었고 ‘방화’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시스템에 철저히 적응해 기능공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도대체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일관성이 없는” 필모그래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흥행 감독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데뷔 초기 합동영화사의 전속 감독이 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반복되는 장르 영화 속에서 서서히 장인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고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작가의 영역으로 옮겨 갔다. 이것은 특유의 기질 때문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인생과 영화 경력을 살펴보면, 그에겐 때론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개척자 정신이 있었다.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그는 멈추는 순간 뒤처진다는 걸 깨달았다. 기본적으로는 산업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이두용 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당대의 트렌드였던 신파 멜로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발차기 액션 영화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그는 액션 연출력을 발판으로, 다른 영화인들은 모두 충무로라는 우물 안 개구리던 시절에 <아메리칸 방문객>(1976)으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시도한다. <피막>으로 베니스영화제에,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에 초청 받았으며, 한국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작업한 <침묵의 암살자>(1988)를 내놓았다. 1980년대엔 자신의 제작사를 차렸고 이후 영화 수입과 극장 경영까지 겸했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1980년대엔 충무로 감독으로서 TV 영화를 연출하려 시도했고, <아리랑>을 들고 북한에 건너가 남북 합작 프로젝트를 논의하기도 했다.

흥행성과 작품성, 창작 활동과 비즈니스, 장르 영화와 작가 영화…. 그의 좌충우돌 영화 인생은 언제나 양 극단 사이에서 진동했다. <최후의 증인> 같은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IMF로 극장 사업을 접어야 했으며, 제작자의 외화 쿼터를 위해 봉사하듯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가 이두용의 영화 인생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이 부분, 즉 장르 영화 장인으로서 지녔던 생명력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만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의 영화제에 의해 먼저 발견된 후 한국의 평단에 의해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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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용 감독은 1941년(호적엔1942년)에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였고, 아버지는 간장 공장 기술자였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극장에 몰려다니던 활극 영화광이었고,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지닌 학생이었다. 영화에 대한 꿈을 점점 키워나가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하게 충무로의 일원이 된다. 당시 미술 선생이 영화 포스터 그리는 일을 했는데, 심부름으로 동성영화사의 만리동 스튜디오에 갔다가 처음으로 영화 현장을 접한 것. 이후 그는 이강천 감독 연출부에서 스크립터 일을 하며 영화계에 발을 내딛었고, 1950년대 말에 몇 편의 영화를 거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짧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감독을 꿈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해 거의 집 한 채 값의 거금을 받아 <여승>이라는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했던 것. 하지만 극장 배급을 책임지기로 한 흥행사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면서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지만 교훈은 있었다. 제대로 영화를 배운 후 감독이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제대 후 이두용 감독은 세 명의 감독 연출부에서 일하며 많은 걸 배웠다. 전홍직 감독은 어떻게 해야 영화가 흥행하는지 잘 알고 있는 ‘기획자’였다. 일본 유학파인 김수동 감독은 콘티의 정확성과 압축해서 명료하게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정소영 감독은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무려 7편의 영화를 함께 한 정소영 감독은 이두용 감독의 데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정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신파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를 만들어냈는데, 이두용 감독의 첫 작품 <잃어버린 면사포>(1970)도 그 계열이었던 것. 기획자 방규식은 정소영 감독의 제작부장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김수현도 정소영 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영화로 시작해 <작은 새>(1974)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멜로는 당대의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가부장제에서 신음하는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강조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성애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대신 여성의 상황을 더욱 가혹하게 몰고, 그 기저에 ‘가난’이라는 경제적 계급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테마는 <초분> 이후 일련의 샤머니즘 영화와 사극으로 이어지며 변형된다. 여성의 비극을 개인사의 차원이 아닌, 역사와 사회에 의해 구조화된 모순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전성기는 액션 장르와 함께 찾아온다. 변화의 원인은 신파 멜로에 대한 염증이었고, 좀 더 영화적인 기능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액션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외국 시장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는데, 이것도 액션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영세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고 외국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 만한 영화는 액션 밖엔 없었다.

박노식이 출연하는 <날벼락>(1971), 호러와 무협이 결합된 <야오귀>(1971), 범죄 액션 <체포령>(1972), 전쟁 액션<홍의장군>(1973) 등이 있었지만, 진짜 시작은 <용호대련>(1974)이었다. 그는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액션 배우를 꿈꾸는 전국의 유단자들을 끌어 모았고, 재미 교포인 ‘챠리 셸’ 한용철을 주인공으로 발차기를 중심으로 하는 태권도 액션 영화를 발명했다. 1974년 한 해에만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돌아온 외다리(속)>, 그리고 <배신자>까지 한용철 주연의 액션 영화 6편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들은 당대의 신드롬이었다.

하지만 한용철은 이두용 감독과 결별했고, 이후 이두용 감독은 강대희와 <무장해제>(1975)를, LA의 태권도 사범인 정준(준 청)과 <아메리카 방문객>(1976)을 찍는다. <비밀객(속)>(1976)부터 <해결사>(1981)까지는 신우철과 안태섭이 액션을 맡았고, <돌아이>(1985)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였던 전영록을 카메라 앞에 세워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건 이두용 액션이 지닌 사회적 의미였다. 유신 헌법 이후 갈수록 엄혹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호쾌한 발차기가 작렬하는 그의 액션은 대중에게 정서적 탈출구였고, 오승욱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뭔가에 억눌린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배우들이 “으악!” 소리와 함께 나뒹군다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두용 표 액션’의 힘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무장해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실제 왕궁에서 촬영되었으며, <해결사>는 세트 없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액션을 보여준다. <돌아이>는 카 체이스 같은 현대적 액션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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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은 이두용 감독을 대표하는 장르지만 그는 종종 회의를 느끼곤 했다. 액션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시선은 멸시에 가까웠다. 이때 우연히 제안 받은 <초분>(1977)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 무속적인 소재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시작되었으며, 이 영화들을 통해 ‘억압 받는 인간’이라는 테마가 드러났다. 그리고 사극에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저항하는 자들을 통해 그 테마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대표적이며, 특히 이 영화의 정제된 스타일은 이두용 감독의 미장센이 정점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세계무대에 알려진 것도 <초분> 이후 영화들 덕분이다. <피막>은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부문 특별상에 수상하는 I.S.D.A.P 상을 수상했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 받는다. 서구 비평가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한국영화는 바로 이두용의 작품들이었으며, 혹자는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영화와 비교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엔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지만, 이전까지 국내의 그 어떤 평론가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두용 감독의 텍스트는 서구를 경유해 비로소 자국의 평단을 자극했다.

<경찰관> 같은 리얼한 톤의 서민 드라마나 가족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접근한 <장남>, 실화를 바탕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한 <청송으로 가는 길>(1990), 그리고 노부부의 삶을 다룬<애>(1999) 등 장르적 요소를 제거하고 정직하게 드라마로 승부할 때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은 빛난다. 특히 <장남>은 가족을 다룬 한국영화의 계보에 아직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가장 위대한 영화적 유산은 <최후의 증인>일 것이다. 당대 충무로의 최대 역량이 결집되었던 이 영화는 누군가의 밀고로 혹독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제작자와 감독은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영화는 한 시간 가까이 잘려나간 상태에서 상영되었고, 개봉 날 극장에 들어갔던 이두용 감독은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이후 한 세대 가까이 잊혀져있던 이 영화는 2006년 감독판으로 복원되면서 지금의 관객들과 다시 만났다. 전설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2002년에 만든 60번째 영화 <아리랑>를 마지막으로 현업에서 물러났다. 대사 없이 초당 18프레임의 동작으로 진행되며 변사의 설명이 곁들여진 흑백 영화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품어 왔던 <월광무> 프로젝트를, 남북 합작 방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추진했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애증이랄까…. 영화 때문에 겪은 갖가지 일들에 대해 후회는 안 하지만, 이젠 뭔가 내 직업에 대한 어떤 결과를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영화고, 내 존재의 이유를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삶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 영화로 내 삶의 큰 매듭을 짓고 싶다.” 부디 노장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속 미워도 다시한번>(정소영, 1969) 촬영현장
[사진1] 조감독 시절의 이두용 감독. <속 미워도 다시 한 번>(1969) 현장이다. 오른쪽부터 주연을 맡은 신영균, 정소영 감독, 이두용 감독이다.
이두용 감독은 정소영 감독 연출부로 7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댁의 남편은 이렇읍니까>(이두용, 1971) 촬영현장
[사진2]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한 이두용 감독은 한 동안 신파 멜로드라마를 만든다.
<댁의 아빠도 이렇읍니까>(1971)는 두 번째 영화로 전작의 흥행세를 이었다. 배우 문희, 황정순과 스태프들 그리고 이두용 감독(맨 왼쪽)이 함께 했다.

<돌아온 외다리>(이두용, 1974)의 챠리셸
[사진3] 1974년 한 해 동안 이두용 감독은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여섯 편의 태권도 영화를 내놓았고,
그 모든 영화에서 발차기의 주인공은 ‘차리 셸’ 한영철이었다. 사진은 <돌아온 외다리>(1974)의 한 장면.

<초분>(이두용, 1977)의 스틸
[사진4] 이두용 감독의 작품 세계는1977년 <초분>부터 변화한다.
이전까지 액션을 중심으로 한 장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영화부터 그는 미스터리 서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의 세계로 접어들며 샤머니즘과 ‘한’의 테마를 다룬다.

이두용과 장동휘
[사진5] 당대의 액션 스타 장동휘는 액션 전문 감독 이두용이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두용 감독은 <경찰관>(19789)과 <선배>(1979)를 통해 장동휘의 진짜 매력을 드러냈다.

 
<최후의 증인>(이두용, 1980)의 한장면
[사진6] 이두용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최후의 증인>(1980).
하지만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감독판으로 대중과 늦은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2016년 4K로 디지털 복원되었다.

베니스 영화제 초정 <피막>(1980)
[사진7] <피막>(1980)은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은 이 영화는 감독 부문 특별상인 I.S.D.A.P를 수상했다. 

이두용과 유지인
[사진8] <피막>(1980) 현장의 이두용 감독과 주연을 맡은 유지인.
<생사의 고백>(1978)으로 이두용 감독과 인연을 맺은 유지인은 이 영화에서 강렬한 복수의 주인공이 된다.

<해결사>(이두용, 1981)의 촬영현장
[사진9] <해결사>(1981)는 세트를 벗어나 리얼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도시 액션이다.
신우철과 황정리가 주인공을 맡았다. 숨겨진 걸작 중 하나이며, <돌아이>(1985)를 예견하게 하는 작품이다.

칸영화제 GV현장
[사진1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는 최초로 칸영화제에 초청받은 한국영화였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외국 평단의 큰 관심을 받았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장면이다. 통역 옆의 왼쪽이 이두용 감독이다.

 
하와이영화제 관계자들과
[사진11]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로 하와이영화제를 찾았을 때 해외 영화인들과 함께 한 이두용 감독.
왼쪽부터 홍콩의 임호 감독,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중국의 장이모우와 첸카이거 감독,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그리고 이두용 감독.

<낮과 밤>(이두용, 1984) 아프리카 촬영현장
[사진12] <낮과 밤>(1984)은 말 그대로 5대양6대주를 누비는 영화였고, 해외 로케이션에 강한 이두용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아프리카 현장에서 마사이족과 함께 촬영하는 모습.

<장남>(이두용, 1984) 촬영현장
[사진13]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장남>(1984)은 이두용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자, 한국 가족 영화의 걸작 중 한 편이다.
형제로 나오는 신성일, 김희라와 함께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

<돌아이>(이두용, 1985)의 스틸
[사진14] 1970년대 ‘발차기’에서 시작한 이두용 감독의 액션 연대기는 1980년대 이르러 <돌아이>(1985)에 도착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카 액션과 패션 감각을 선보였던 영화로, 전영록은 이두용 감독의 새로운 액션 히어로가 된다.

<뽕>(이두용, 1985)의 스틸
[사진15] <뽕>(1985)에서 ‘안협네’ 역을 맡은 이미숙.
나도향의 단편을 각색한 윤삼육의 시나리오는 여러 제작사를 돌아다니다가 이두용 감독을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져 큰 흥행을 기록했다.
아직도 꾸준히 언급되는 ‘컬트’ 영화다.

 
<내시>(이두용, 1986)의 촬영현장
[사진16] 자신의 제작사 ‘두성영화’를 차린 이두용 감독은 창립 작품으로 <내시>(1986)를 만든다.
그의 최고 흥행작으로, 궁중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반란을 그린다. 당국의 정치적 해석으로 심의가 나지 않아 개봉에 애를 먹기도 했다.

<침묵의 암살자>(이두용, 1988) 촬영현장
[사진17] 한국영화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초청 받아 연출한 <침묵의 암살자>(1988) 현장.
미국에선 <Silent Assassins>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교포 배우인 정준(준 청)과 필립 리가 출연한다.

<청송으로 가는 길>(이두용, 1990) 촬영현장
[사진18] 밑바닥 삶을 사는 인간을 향한 리얼한 시선.
걸레 스님 중광을 캐스팅 한<청송으로 가는 길>(1990)은 이두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모스크바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애>(이두용, 1999) 스틸
[사진19] IMF 시기, 두성영화의 마지막 작품으로 만든<애>(1999). 남궁원과 이경희가 노부부로 등장한다.
<장남>에 이은 또 하나의 가족 영화로, 제대로 된 개봉을 거치지 못하고 묻혀 버린 수작이다. 

<아리랑>(이두용, 2002)의 촬영현장
[사진20] 2002년에 만든 <아리랑> 현장의 이두용 감독. 나운규 시절의 영화 미학, 즉 흑백과 무성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노장의 녹슬지 않은 솜씨가 돋보인다. 이두용 감독의 60번째 영화다.


* 이 글은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영화제가 공동 제작한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도서 『장르의 해결사 : 이두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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