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의 검열 표상

by.전우형(건국대학교) 2018-01-28
바보들의 행진 스틸이미지
검열과 한국영화의 새로운 관계

1970년대 한국영화를 들여다보는 시야는 대체로 검열에 국한되어 있고, 그 프리즘을 통과한 분석과 해석은 한국영화의 형해(形骸)화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검열이야 국가가 주도하는 가혹한 문화정치의 시대에 엄존했던 제도인지라 그렇다 치더라도 그 결과로서 1970년대 한국영화가 잔해로 타락 내지 돌변했다는 판단에는 아직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1970년대 몇몇 한국영화들은 분명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으며, 또 이 과정이 검열을 분명하게 의식한 지점에서 출발하고, 검열을 경유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된 측면이 있다. 공교롭게도 국가가 설치한 몇 겹의 검열 단계를 지나면서 어떤 영화는 처음보다 더 나은 영화가 되어갔으며, 스스로 한국영화를 그 이전의 시간과 결별하게 만드는 사건이 되기도 했다. 1970년대 한국영화에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이란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으며, 결국 재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검열마저 영화적 표상으로 끌어안는 실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하길종이 연출한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에 대응하는 영화언어를 고안해 냄으로써 가장 1970년대스러운 영화가 되었다.
 
 



[그림1] 시나리오심의의견서(1974.12.10.) 무려 세 장에 걸쳐 22개의 항목에 관한 삭제 및 수정 지시가 기록되어 있음. ‘전면개작을 요망’한다는 표현이 눈에 띔.

〈바보들의 행진〉은 1975년에 개봉된 작품으로 일간스포츠에 연재되었던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널리 알려진 대로, 바로 전 해 1970년대 흥행에 가장 성공한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성적을 이어보려는 제작사의 기대에 부응한 흥행작이었다. 이 영화의 흥행은 여러 면에서 〈별들의 고향〉과 겹치지만 또 구별된다. 소설가 최인호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라는 것과 도시 중심부 청년 문화의 화려한 이미지들과 영화음악을 통한 스토리텔링 등은 두 영화 흥행의 공통요인이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낯선 공간, 무엇보다 몇몇 까메오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된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바보들의 행진〉 흥행의 독자적 요인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수차례의 검열을 거치면서 방황하는 대학생들의 세태에 놓여있던 산만한 이야기가 그러한 삶의 기원에 대한 암시로 초점화된 사실은 검열과 1970년대 한국영화의 또 다른 관계를 상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애초의 시나리오에서는 인트로의 병영 신체검사 다음 장면으로 주인공 병태와 영철 무리가 입대를 앞둔 친구를 사창가로 데려가는 신이 이어진다. 숫총각 대학생과 성매매 여성 사이에 내재하는 억압도 문제거니와 검열을 거치면서 영화는 이 장면을 스스로 배제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게 한다.
 

[그림 2] 원본시나리오 “시나리오심의 과정에서 수정된 성매매 씬은 영화화 과정에서 자체 삭제된다.”

 
이 글은 〈바보들의 행진〉이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스타일이 1970년대 한국영화가 지니는 간극을 문제시하고, 문자가 아닌 영상을 통해 새로운 세대 감각을 표출하는 데에서 드러났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 영화가 보여준 영화라는 새로운 신체는 ‘훼손당하고 분리된’ 그것이었다. 이전에는 기술의 낙후나 연출의 실패에 의해 우연적으로 등장했던 그것에 하길종은 실험적인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1970년대 영화계의 가장 문제적인 장면은 국가의 과도한, 그렇지만 허술한 간섭이었으며 이 영화는 그것을 흔적으로나마 새겨두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실험에 옮긴다. 그리고 영화에 사용된 대칭을 이루는 카메라 워크는 기존의 문자가 전달하던 의미나 미학적 효과를 완벽하게 대체함으로써 영상세대의 시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점들이 차례로 규명되고 나면 이 영화가 1970년대 영화사 기술의 의미있는 매개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구조로서의 검열

197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주지하듯 국가의 검열이다. 그런데 이 영화제작에 대한 국가의 검열 정책은 대체로 이전 시기부터 지속되어 온 우수영화 보상제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검열과 우수영화라는 제도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간극이 1970년대 검열정책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통상적으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을 규정하는 검열과 보여주고 싶은 것을 선별하는 우수영화라는 겉보기에 행복한 조합은 사실 검열의 작위성을 강화하고 이에 따라 영화의 기형화를 가속화시킨 문제적인 측면이 있다.

우수영화 보상제도는 반공과 경제성장의 거시적인 국가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영화 제작을 장려하고, 여기에 국제영화제 출품과 수상을 통해 국내 영화 발전을 꾀하겠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이 제도의 세 가지 중요한 키워드는 물론 반공의식 고취, 새마을 운동 홍보, 국제영화제 수상이다. 전쟁영화, 그리고 농촌계몽이나 팔도유람 류의 영화가 새로 만들어지고 또 이를 주제로 하는 소설들이 영화화되었다. 특히 세 번째 키워드 덕분에 1960~1970년대 문예영화의 붐이 조성되고 지속될 수 있었으나, 국제영화제 출품은커녕 문예영화가 당시 영화계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도 사실이다. 반공이나 경제성장이라는 한국사회의 특별한 사정을 프로파간다화 하면서 세계영화 시장에 도전하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전망이었고, 결국 이 제도는 제작보다는 흥행에 관심이 있었던 제작사들의 외화 수입 쿼터를 위한 수단으로 빠르게 전락했다.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청춘이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단골장면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미개봉 ‘창고용’ 문예영화라는 기이한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이 제도는 분명 자체 내에 수많은 간극과 균열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검열주체나 창작주체 모두에게 자의적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국가의 과도한, 그러나 작위적인 검열에 따른 1970년대 영화계의 기묘한 풍경은 마치 1940년대 일제의 검열에 대한 조선영화의 난망한 반응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최인규의 〈집없는 천사〉(1940)는 검열과 추천영화라는 제도의 역학이 내재하는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 하나의 현상이었다. 문부성 추천까지 받은 이 영화가 내지에서의 상영이 돌연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조선의 부랑 아동들을 모아 황국의 신민으로 길러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시종일관 조선의 부랑 아동들과 이들을 거두어 고아원을 건립하는 조선인 교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지막 장면에 일장기 앞에서 고아원 아이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읊고 일본인 의사의 훈시를 듣는 장면이 느닷없이 등장하는데, 추천의 이유는 아무래도 이 장면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내지에서의 상영이 취소된, 즉 검열의 이유는 이 영화의 어둡고 남루한 정조 때문이었다. 조선영화는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기 위해 말해야 하는 것에 습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에는 말하고 싶은 것 역시 전달 불가능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집없는 천사〉라는 하나의 현상은 검열의 권력이 어느 때보다 강력했으며, 따라서 명백한 기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작위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해 영화의 기형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국가 검열에 대처하는 방식은 통상 두 가지가 가능하다. 영화는 국가 검열을 수용하거나, 아니면 저항을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저항이란 특히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선택지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결국 영화에게 가능한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가 우회하는가 정도였다. 반공영화, 근대화된 조국 팔도를 유람하는 영화, 그리고 문예영화 대부분이 전자의 선두에 서 있다면, 희소하기는 하나 몇몇 신예 시네아스트들의 영화가 후자에 해당된다. 사실 우회의 방법이라는 것 역시 결과적으로 검열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수용의 태도와 구별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영상시대를 주도했던 젊은 영화감독들의 검열에 대처하는 태도에서 몇몇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우회의 한 방법으로 볼 만한 것이 있다. 말은 기꺼이 포기하나, 영상은 절대 포기 못한다는 일종의 영상본위의 태도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장 강렬하게 고수했던 감독은 아무래도 하길종이다. 하길종의 이러한 태도는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새로운 길을 시도하는 데까지 가 닿는다. 집요한 영상본위의 감각을 통해 검열과의 충돌을 직접 영화에 새겨 넣는 방식이 그것이다.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

감독의 말을 통해서나 당시의 자료와 연구서들을 통해 밝혀진 〈바보들의 행진〉에서 검열당한 장면들 중 중요하게 거론해 볼 만한 것은 시위 장면과 주인공들과 일본인 사이의 몸싸움 장면이다. 그 중 실제로 개봉된 영화에서 이 영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퀀스의 검열과 검열 대응은 눈여겨 볼만하다. 개봉된 영화에서 이 장면은 ‘강의실-대학 응원연습(연고전 실사)-과거회상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의에 참석한 주인공 영철과 병태는 응원연습 동원으로 인해 휴강하겠다는 교수의 말을 듣고 갈등한다. 함께 나가자는 영철의 제안을 거절하고 강의실에 남은 병태 다음 장면으로 당시 연고전 실사 장면들이 인서트 된 뒤, 병태가 과거 당구장에서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남아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신문팔이 소년을 두고 영철과 내기를 했던 과거장면으로 플래시 백 된다.

이 장면에서 응원연습은 애초의 시위장면을 대체한 것이라는 정보를 모르더라도, 이 부분은 여러 면에서 부자연스러운 연출 효과가 감지된다. 함께 나갈 것을 종용하고, 결국 혼자 강의실을 나서는 영철의 대사가 필요 이상으로 비장하다는 점, 강의실에 남아 칠판을 지우는 병태가 ‘이상국가’를 ‘사구라(사쿠라)’로 고쳐쓰는 장면, 그리고 이 영화에서 유일한 회상장면으로 등장하는 인간애에 대한 고민 등이 응원연습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검열 과정에서 시위장면 삭제 요청이 있었다면 응당 시위장면을 연상시키는 내용까지의 삭제를 의미했을 터인데, 여기에 하길종은 달랑 시위장면만을 들어내고 체육대회 실사장면으로 대체함으로써 은폐된 무엇의 존재를 암시하는 효과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검열로 삭제된 일본인과의 몸싸움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스트리킹을 감행한 두 주인공이 다음 장면에서 클로즈업 될 때 둘의 얼굴은 피 흘린 자국이 선명하다.
 



[그림 3] 왼쪽의 시나리오 재심 의견서(1974.12.17.)의 4번 항목은 이 씬의 전부 삭제를 지시하고 있으나,
영화는 오른쪽 수정 이전 시나리오의 강의실 전반부를 그대로 영화화 함.

시위장면을 체육대회장면으로 대체하는 것은 검열주체가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것을 충족시켜주는 방식이다. 체육대회는 실제 연고전 실사장면으로 인서트 되는데, 이 체육대회는 명문사학 간의 경쟁의식을 해소하는 하나의 축제이기도 하지만,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근대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이벤트로서 국가에 의해 적극 장려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어색한 장면들의 병치는 대학과 대학생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통제의 시선에 대한 응답으로서 검열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도 교란시키는 영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은 검열과 보상정책의 명시적 법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검열의 권력을 지탱하는 권력주체의 불법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저항의 지점과 방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적 완성도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러한 편집을 시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의 뉴시네마 운동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하길종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 그룹의 “우리는 거짓되고 외곽만이 윤이 나는 영화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덜 매끈하고, 거칠기는 하나 생동하는 영화를 원한다”라는 선언에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분명 이 부분은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보게 만들려 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시각적 욕망을 극한까지 부추기는 것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것, 은폐된 그것은 검열의 흔적이다. 하길종은 자신의 영화를 검열로 훼손당한 신체의 표상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관객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전달 가능하게 하는 전략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검열대응이 영화 내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돌발적인 장면인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플라톤의 시인추방론 강의로부터 시작한다. ‘예술이 필요로 하는 허구가 이상국가 건설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는 이 논의는 근대의 검열제도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식론에서 예술은 저급한 모방일 뿐이며, 이데아를 추구하기 위해 유지해야 할 감정의 평형 상태를 깨트리는 예술은 위험천만한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이 시인추방론은 예술이 지니는 상상력과 이미지에 대한 억압으로 근대 이후 예술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통제로 제도화된다. 영화의 시작 자체가 국가와 예술의 대립을 암시하고, 결국 검열의 흔적이 가장 강한 이 장면에서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사쿠라’로 변형하는 병태의 행위는 검열의 기준에 내재하는 간극을 드러내고 문제시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이다.

1970년대 한국영화를 돌아보는 하길종의 시선에는 비관적인 인식이 선명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영화를 내세웠고, 이를 통해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구하려 했다. 〈바보들의 행진〉이 태어나게 된 데에는 〈별들의 고향〉이라는 선행하는 가능성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한 평을 마치면서 후반부에 정책과 영화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영화가 없는 혼미한 우리의 현실에서 질서를 찾는 길이란 영화 그 자체밖에 없다.”1)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국가의 검열과 정책, 그리고 영화인들의 합의에 기초한 1970년대 한국영화는 하길종이 보기에 비극 그 자체였다. 이 합의라는 지배의 형식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영화여야하며 그는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그 가능성을 실험에 옮긴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바보들의 행진〉은 여러 면에서 암시적인 측면을 지닌다. ‘바보’와 ‘행진’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의미가 여전히 회자되고 있으나, 사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한 해 전에 개봉된 영화진흥공사 제작 국책 새마을영화인 임권택 감독의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을 떠올리게도 한다. 소설 『바보들의 행진』이 국책영화 〈아내들의 행진〉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 권리를 영화가 다시 찾아오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패러디라고 볼 만하다.


자기검열의 훼손 실험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저항으로 편협하게 인식할 필요는 없다. 〈바보들의 행진〉에게 〈별들의 고향〉이 그러했듯이,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견인해주는 역할이면 된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의 가능’이다. 그것은 영화의 개발을 통해 진리에로 접근하고자 하는 끈질긴 영화의식과 작가정신을 바탕으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2)라는 말을 참조한다면 하길종에게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은 금기와 배제의 원리가 만들어놓은 한국영화의 간극을 지속적으로 문제시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간극이 곧 영화가 되어버릴 순간에 대한 기대였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영화의 검열은 세 가지 차원으로 존재한다. 가장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검열, 그리고 관념론적인 검열이 그것이다. 정치적 검열이 배급을 훼손하고, 경제적인 검열이 생산을 훼손한다면 관념적이고 도덕적인 검열, 즉 자기검열은 창작 자체를 훼손한다.3) 이 세 검열은 사실 서로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검열의 유착관계에 비해 관념론적인 검열의 해방 가능성은 다소 열려 있다. 하길종이 선택한 방식은 적어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검열의 흔적을 영화의 신체에 새겨 넣음으로써 스스로 관념론적 자기검열을 파기하는 실험을 감행한다 볼 수 있다.


1. 하길종, 「영화단평_별들의 고향」(출처미상), 『하길종전집2_사회적 영상과 반사회적 영상』, 한국영상자료원, 2009, 206쪽.
2. Loc. Cit.
3. C. Metz, 김수진 역,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1』, 문학과지성사, 2011,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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