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리수
Lee Alice / 李愛利秀 / 1910  ~  2009
본명
이음전 (Lee Eum-jeon)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20, 1930
DB 수정요청

필모그래피 (1)

더보기
배우 :
춘희 (이경손, 1928)

주요경력

1928년 단성사의 극단 취성좌 공연 막간 무대에서 "황성옛터"(당시 제목은 "荒城의 跡") 발표
1931년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번안곡 "메리의 노래", "라인강", "부활" 등으로 정식 데뷔
1932년 빅터레코드에서 음반 <荒城의 跡> 발매

기타정보

기타이름
이보전, 이앨리스, 李普全

관련글

더보기
  • [다시 만난 세계] 시선을 견뎌내기 이와사키 아키라 환영회 중 문예봉(좌)과 한은진(우)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 ... by.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2024-12-27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이애리수는 1919년 9살 때, 김도산 일행에 들어가 공연한 것을 시작으로 연극계에서 활동하였다. 윤백남의 민중극단, 김소랑의 취성좌에서 활동하였다. <시들은 방초>, <부활> 등에 연극에 출연하였다. 당시 혹자는 이애리수에 대해 "시내물이 흐르는 '리듬'처럼 고은 성대와 부드러운 체대"를 가지고 있다고 평하였다(동아일보c).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평양키네마가 제작하고 이경손이 감독을 맡은 <춘희>(1928)에 출연한 것이었다. 이애리수는 주인공인 기생 월선의 시비 소홍 역을 맡았다(동아일보a;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실린 <춘희>의 개봉 기사에 김애리수라고 나와 있는데, 이는 당시 동아일보의 오기로 판단된다(동아일보b).
이애리수는 가수로서 더욱 유명하였다. 1931년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번안곡을 부르기 시작하여, 1932년 빅타레코드로 옮긴 후 황성옛터가 포함된 <황성의 적> 앨범을 내놓으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다. 또한 1932년 10월에는 일본에서 ‘아다나사게’라는 노래를 취입하며 일본에서도 명성을 얻었다(대중예술인 사전; 동아일보d). 하지만 인기가 절정에 있던 시기에 이애리수는 배동필이라는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는 부호가의 아들과 연애를 하면서 괴로운 시기를 겪게 되었다. 두 사람의 연애를 배동필의 아버지가 무척 심하게 반대하였다고 한다. 배동필의 아버지는 배동필을 이애리수와 때어놓기 위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결국 이애리수와 배동필은 동반자살을 택하였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엄격한 조건이 걸린 결혼이었다. 이애리수는 앞으로 가수 활동은 물론 연예계 관계자와의 어떠한 접촉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혼과 함께 이애리수는 은둔에 들어갔고, 2남 7녀의 자녀를 둔 평범한 어머니로 남은 여생을 살았다고 한다(한국일보). 2009년 3월 31일 사망하였다.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8년 3월 7일 3면.
동아일보b 1928년 6월 15일 4면.
동아일보c 1931년 6월 23일 4면.
동아일보d 1933년 1월 10일 2면.
조선일보 1928년 3월 9일 석간 3면.
한국일보 2008년 11월 11일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