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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려희
Hwang Ryeo-hui / 黃麗姬 / 1928 ~
본명
황영희 (Hwang Young-hee)
대표분야
배우, 스크립터
활동년대
1940, 1950, 2000
DB 수정요청
소장자료
기본정보
영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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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의 꽃다발
삼천만의 꽃다발
박남옥
황려희
필모그래피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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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원로영화인 구술인터뷰] 황려희
(, 2000)
삼천만의 꽃다발
(신경균, 1951)
혜영(간호장교)
죄없는 죄인
(최인규, 1948)
초옥
자유만세
(최인규, 1946)
혜자
(uncredited)
기타정보
기타이름
황애희, 황여희
한국영화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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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도서] 자유만세 DVD 소책자
by.
정종화
2019-04-30
발행일
2004-12-01
[발간도서] Hurrah! for Freedom
by.
Chung Chonghwa
2019-04-30
발행일
2004-12-01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황영희이다(여성영화인사전). 경기고등여자학교(京畿高女)를 마치고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가 주최한 제2회 여배우 모집에 응모하여 1위로 발탁되었으며,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이혜자’ 역할로 출연하여 주목 받았다(예술통신). 뒤이어 같은 감독의 <죄없는 죄인>(1948)에 출연한 그녀는 결혼과 함께 한동안 은막을 떠났다(경향신문a). 이후 전쟁 기간 중에 진해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복혜숙의 권유로 <삼천만의 꽃다발>(1951)에 출연했다고 하며, 이 작품이 그녀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다(여성영화인사전). 1960년대 중반 이화여대 앞에서 ‘숙녀다방’을 운영했다고 하며, 1986년 남편 박동현(朴同玄) 전 덕성여대 교수와 사별했다(조선일보, 경향신문b).
* 참고문헌
경향신문a 1961년 2월 25일자 4면
경향신문b 1986년 10월 16일자 2면
예술통신 1947년 1월 24일자 2면
조선일보 1966년 5월 29일자 6면
주진숙 외, 『여성영화인사전』, 소도, 2001.
[작성: 김한상]
출처 : 여성영화인사전
황려희 黃麗姬
-배우, 스크립터. 1928년 2월 4일 출생. 본명 황영희. 경기고녀 졸업.
부유한 집의 딸로 태어나 경기고녀를 졸업할 때까지 별 걱정 없이 꿈많은 소녀로 자라나던 황려희는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일자리를 찾게 된다. 바로 그때 최인규 감독이 주축이던 영화사가 여배우를 모집하고 있어서 그녀는 배우로서의 첫걸음을 비교적 순조롭게 떼게 되었다. 더구나 인력이 부족했던 <자유만세> 팀은 그에게 영화의 스크립터를 맡김으로써 그는 해방 후 한국영화의 첫 여성 스크립터가 된다. 정릉계곡, 서울대학병원, 혜화동과 돈암동 그리고 아현동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촬영이 이루어졌고 그녀는 이때 사실 감독으로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녀는 <자유만세>(46)에서 해방전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지하운동가인 전창근을 치료하고 사모하는 간호부로 이 영화에 등장하여 기생역을 맡았던 유계선보다도 더 인기를 얻었다.
단지 세 편에 불과한 그의 출연작중 다음 작품은 최인규 감독의 <죄없는 죄인>(48)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황재경 목사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에서 목사의 딸로 출연한 황려희는 첫 작품에서처럼 여기서도 복혜숙의 딸로 등장하였다. 실제 황재경 목사가 제작하고 출연하였는데 후일 미국에 목회활동을 할 때 그가 프린트를 가져갔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기록을 담당했던 홍은원감독과 처음 만났다. 그는 최초의 여성감독인 박남옥과도 교분을 쌓았는데 그 정이 하도 깊은 나머지 박남옥의 형부는 황려희가 이미 결혼하여 다섯 아이의 어머니가 된 후에도 “황려희가 춘향이를 하면 돈을 대지”라고 했을 정도로 황려희를 아꼈다고 한다.
세 번째 작품의 출연은 바로 이런 그의 자질을 아까워 했던 영화계의 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21살에 결혼하여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더구나 한국전쟁 중 진해로 피난가 있던 그녀에게 복혜숙이 <삼천만의 꽃다발>(51, 신경균)에 함께 출연할 것을 권유하였고 그녀는 진해와 영화 촬영지인 마산을 오가며 촬영을 하였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도 복혜숙의 딸인 간호장교 역을 하였다. 결국 그는 출연한 세 편의 영화에서 모두 복혜숙의 딸로 나왔고 두 편의 영화에서 간호사로 등장한 셈이 되었다. 그의 청초하고 기품있는 이미지가 해방직후와 전쟁 중 피폐해진 대중의 심신을 달래는데 적절했다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결국 영화감독이 되는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해방 후 최초의 영화에 등장한 여배우로서, 그리고 잠재되어 있던 에너지를 너무도 짧은 시간에 다 소진해버리고만 배우로 언제나 기억될 것이다.(변재란)
출연
-46 자유만세. -48 죄없는 죄인. -51 삼천만의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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