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혁
Park Chang-hyeok / 朴昌赫
대표분야
배우, 제작/기획
활동년대
1920, 19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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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거경전 (방한준, 1944)
풍년가 (방한준, 1942) 대장간
창공(원제:돌쇠) (이규환, 1941) 전기공
집없는 천사 (최인규, 1941) 건달
살수차(포도의 이단자) (방한준, 1935)
종로 (양철, 1933)
불망곡 (이규설, 1927)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박창혁은 1927년 토성회 제1회 작품으로 이규설이 감독한 고대극 <불망곡>에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한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a) 이후 박창혁은 이경손프로덕션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나운규와 합심하여 원방각사를 조직하고 영화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b). 1931년에 이명우, 이경선, 윤봉춘 등 유력한 영화인들이 중심이 돼서 조직한 화조영화동인제작소는 <춘향전>,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 조선 고대극 창설에 노력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는데. 박창혁은 이 화조영화동인에 소속된 연기자였다(매일신보). 이외에도 1933년 양철이 감독하고 대구 영화촬영소가 제작한 <종로>에 출연하였으며, 1934년에는 조선중앙영화사에서 제작하고 방한준이 감독한 <살수차(포도(鋪道)의 이단자)>에도 배우로서 참여하였다(조선일보a; 조선일보b).
박창혁은 배우가 아닌 진행 담당자로도 활동하였다. 1936년에는 한양영화사가 제작하고 나운규가 감독한 <아리랑 제3편>의 진행을 담당하였으며, 1938년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제1회 작품인 <무정>의 진행을 맡는 등 진행 방면에서도 꾸준히 활동하였다(동아일보c; 동아일보d). 실제로 박창혁은 진행에 있어서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경향신문).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7년 1월 6일 7면.
동아일보b 1931년 8월 1일 5면.
동아일보c 1936년 5월 14일 3면.
동아일보d 1938년 3월 19일 5면.
조선일보a 1934년 12월 26일 석간 4면.
조선일보b 1938년 12월 4일 조간4면.
매일신보 1931년 4월 10일 5면.
경향신문 1961년 3월 7일 4면.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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