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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금성
Seok Geum-seong / 石金星 / 1907 ~ 1995
본명
석정희 (Seok Jeong-hui)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30,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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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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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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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영평상)(1983)
:
특별공로상(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
)
주요경력
1925년 극작가 이서구의 제안으로 토월회에 입단, 배우 경력 시작
기타정보
기타이름
가야마 사다코(桂山貞子) -창씨개명, 石丁義, 石貞姬, 석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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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석금성(석정희) - 배우
한국영화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월하의 맹세>(1923)의이월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출생지는 물론 부모가 누군지, 성조차 모른 채 젖어머니 손에서 자라나 배우가 됐으나 기생 노릇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생 ...
by.
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5-11-02
한국영화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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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잡지] 영화세계 1958년 5월호
발행일
1958-05-01
[영화잡지] 영화세계 1960년 3월호
발행일
1960-03-01
[영화잡지] 격월간 영화 1982년 7,8월호
발행일
1982-08-14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석금성은 기생 출신으로 1925년 토월회에 가입하면서 여배우로서의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첫무대는 <추풍감별곡>이라는 작품이었고, 이 작품에서 추향 역을 맡았다. 영화 데뷔작으로 석금성은 <약혼>(1929)을 들고 있지만, <약혼>의 개봉 광고나 제작 관련 기사에서 석금성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매일신보b). 아마도 중요한 배역을 맡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1929년에는 금강키네마가 제작한 <종소리>에 출연하였으면, 1930년에는 서울키노가 제작하고 김유영이 감독한 <화륜>에도 참여하였다(매일신보a; 조선일보b). 그리고 이즈음 최승일과 결혼하였다(중앙일보).
석금성은 토월회가 해체하고 난 뒤에는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남편 최승일과 함께 미나도좌에서 활동하면서, <탄갱부>(1930), <하차>(1930) 등의 연극에 출연하였다. 이후 신흥극단에서 <목단등기>(1930)의 주연을 맡으며 인기를 얻었다. 당시 석금성에 대해 혹자는 "조금 쌀쌀한 듯 하면서도 미모의 소유자"라고 평하였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조선일보a). 다시 영화에 참여한 것은 1937년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제1회 작품으로 안석영이 감독한 <심청전>이었다(동아일보c).
해방 이후에는 동아영화기업사가 제1회 작품으로 제작한 문예영화 <마음의 고향>에 변기종, 남승민, 최은희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동아일보d). 이즈음 남편인 최승일은 자녀를 이끌고 월북을 하였지만, 석금성은 하지 않았다(동아일보g). 이후 <춘향전>(1955), <심청전>(1956), <단종애사>, <장화홍련전>(1956), <아리랑>(1957), <자유결혼>(1958), <청춘극장>(1959), <길은 멀어도>(1960), <삼등과장>(1961), <김약국의 딸들>(1963), <행복한 고독>(1963)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후 도박 스캔들에 연류 되면서 영화계와 조금 멀어져 있던 석금성은 1982년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로 다시 영화계 돌아왔다. 이 때 석금성의 나이는 77세였다(경향신문a). 1985년 KBS TV문학관 <사평역>이라는 작품에서 자식을 잃어버리고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노파역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TV드라마에도 출연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 설날 특집 드라마 <너도 늙어봐라>와 87세 때인 1993년에 SBS TV 수목드라마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에 출연하였다(경향신문b; 경향신문c; 경향신문d). 1995년 9월 3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동아일보e).
* 참고문헌
매일신보a 1929년 3월 5일 2면.
매일신보b 1930년 10월 3일 5면.
조선일보a 1930년 9월 18일 석간 5면.
조선일보b 1930년 10월 8일 석간 5면.
중앙일보 1932년 1월 3일 3면.
동아일보a 1930년 9월 19일 5면.
동아일보b 1931년 6월 17일 4면.
동아일보c 1937년 11월 10일 5면.
동아일보d 1948년 12월 24일 2면.
동아일보e 1995년 9월 5일 30면.
경향신문a 1983년 1월 29일 2면.
경향신문b 1985년 11월 28일 12면.
경향신문c 1991년 2월 8일 17면.
경향신문d 1993년 11월 4일 18면.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여성영화인사전
석금성 石金星
-배우, 1907년 12월 3일 평안남도 출생. 진명여고 졸업. 본명 석정의(石丁義). 1995년 사망.
“영화를 해보겠다는 그날의 나는 물불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그저 맹목적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가정에서나 친구한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합니다.” 150여 편의 출연작을 가진 관록의 배우, 무대와 스크린에서 일생을 보낸 배우. 석금성의 연기에의 열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연극을 좋아하여 마을에 곡마단이 오거나 연극공연이 있을 때에는 부로를 졸라봐야만 직성이 풀렸다는 석금성이 나이 19세(1925년)에 배우가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곳이 초기 연극인들의 결집단체였던 ‘토월회’이다. 당시 토월회의 히로인이었던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영화로 옮겨간 후 그녀가 입단하여 복혜숙과 함께 ‘토월회’의 히로인으로서 연기인생을 시작했다. <추풍감별곡>으로 처음 무대에 선 후 수많은 작품을 공연한 석금성은 딸이 죽었다는 전보를 받고도 <아리랑> 무대에서고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장한몽>에 출연할 정도로 배우의 본분과 역할을 우선시하며 자신의 끼와 혼을 무대에 쏟아부었다.
영화로도 활동영역을 넓히기 시작하여 29년에 16mm 무성영화 <약혼>(김서정)으로 영화배우로 입문하였는데 개성적인 신인이 등장했다는 평을 받았다. 석금성 자신은 “배우들의 화장품도 단지 숫검정 ‘아이 브로우’와 연지, 도랑이 고작이었지만 하늘이라도 나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종소리>(29, 김상진) <홍길동전>(34, 김소봉)에 출연하였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활동사진 체질은 못되는 구나”라고 체념하고 있던 차에 조선일보 기자로 있던 안석영의 권유를 받고 <심청전>(37, 안석영)에 출연하였다. 김소영이 심청으로 나오고 석금성은 뺑덕어멈 역을 연기하면서 성격배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연기자로서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 맹활약하던 석금성의 길을 가로막은 장벽은 결혼이었다. “당시에는 결혼하고서도 연기생활을 하 수 있는 지금같은 사회는 아니었으니까요.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 있듯이 나도 그 당시의 사회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결혼을 했고 그럼으로써 어쩔 수 없이 일단 연기생활도 청산하고 물러서고 말았습니다”라고 석금성은 당시 상황을 술회하였다. 28년 장안의 부호(이충)와 결혼하고 7남매(7남매 중에 둘째아들이 <미망인>(55, 박남옥)에 나온 배우 이택균이다)를 낳으며 주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무대와 스크린에서 은퇴를 하였지만 석금성은 잠시라도 연기를 잊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를 15년. 다시 그는 배우 석금성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작한 작품이 석금성 스스로가 본격적인 영화 활동의 시작이라 말하는 <춘향전>(55, 이규환)이다. 그녀는 월매역을 맡아 인상적인 조연으로 호평받고 같은 해<장화홍련전>(56, 정창화)에서는 표독스런 계모 역으로 개성적인 연기파 배우로서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60~70년대 한국영화에서 한복에 털조끼를 걸친 채 호령하고 군림하는 부인 역을 맡은 배우는 석금성이기 십상이다. 노역을 많이 하기로는 황정순도 만만치 않지만 둘의 차이는 명백하다. 석금성은 희생적인 모성애를 가진 자애롭고 따뜻한 어머니이기보다는 매서운 눈매로 질책하는 호된 시어머니, 앙칼지고 근엄한 사장 부인, 화통하고 강인한 어머니이다. 엄한 시어머니와 착한 며느리, 기센 부인과 무능한 남편, 강인한 어머니와 나약한 아들, 위세부리는 부잣집 마나님, 선악이 있는 것처럼 ‘부인, 어머니’상에도 양 극단이 있었고 그 한쪽 끝에는 항상 석금성이 있었다. 대부분 그 인물은 조연이고 악역이었으며 처벌받고 방성해야만 했다. 영화가 아닌 실생활에서 강하고 기센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의 외도는 극성맞고 포악한 부인 탓으로 돌려지고(<삼등과장>[61, 이봉래]) 계모는 항상 나쁜 여자로 그려지곤(<그 여자의 일생>[57, 김한일])했다.
너무 잘 해서일까. 비슷한 역할을 도맡아 한 까닭에 짙은 눈썹과 낮고 굵은 목소리의 단조로운 표정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그만이 가지고 있는 뚜렷한 개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주연 아닌 조연의 역할로도 영화에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관록과 개성을 겸비한 석금성은 한국영화사의 기나긴 여정을 함께 해온 배우이다.(김수미)
출연
-29 약혼, 종소리. -34 홍길동전. -37 심청전. -44 너와 나. -49 마음의 고향. -55 춘향전. -56 단종애사, 마의태자, 시집가는 날, 애인, 장화홍련전. -57 그 여자의 일생, 배뱅이굿, 실낙원의 별, 아리랑, 애원의 고백, 오해마세요, 찔레꽃. -58 인걸 홍길동, 자유결혼. -59 가난한 애인들, 가는 봄 오는 봄, 고개를 넘으면, 다시 피는 꽃, 마도의 향불, 별은 창 넘어로, 사랑은 흘러가도, 살아야 한다, 세 쌍동, 아름다운 여인, 여인숙, 유정무정, 청춘극장, 청춘무정, 청춘일기, 화정. -60 그대 목소리, 버림받은 천사, 부부, 아들의 심판, 어머니의 힘, 울지 않으련다, 재생, 청춘의 윤리, 카츄샤. -61 별들의 고향, 삼등과장, 오인의 해병, 임꺽정, 8.15전야, 해바라기 가족. -62 내 마음 호수되여,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 동학난, 맹진사댁 경사, 바람부는 시절, 사랑의 동명왕, 산색시, 새댁, 여정만리, 율곡과 그 어머니, 천하일색 양귀비. -63 고려장, 김약국의 딸들, 무덤에서 나온 신랑, 무정, 울며 헤진 부산항, 자문밖 설마담, 행복한 고독. -64 배만 나오면 사장이냐, 식모. -65 정경부인, 한 많은 석이엄마. -66 이별의 강. -67 어느 기생며느리. -72 궁녀. -82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90 마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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