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Kim Seon-yeong / 金鮮英 / 1914  ~  1995
본명
김평숙 (Kim Pyeong-suk)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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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마음의 고향 (윤용규, 1949) 도성모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이명우, 1939)
아름다운 희생 (김광주, 1933)
방아타령 (김상진, 1931)

주요경력

1930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산하 소형극단을 통해 연극계 입문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성악 공부
1934년 귀국, 동양극장의 <춘향전>에 출연하며 연극계 복귀
1946년 서울연극인동맹 활동
1950년 9월 월북
1951년부터 평양국립연극극장 활동
1958년부터 평양극장 활동
1960년대 공훈배우 칭호 받음
중앙당학교 예술인반
1970년 조선 2.8예술영화촬영소 활동
1971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활동
평양연극영화대학 겸임교원
1977년 인민배우 칭호 받음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김선영은 평안도 정주 출신으로 소학교를 마친 후, 경성으로 와서 상업학교를 다녔지만 가정 형편으로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극단에 들어가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신흥극단에 가입하였다고 한다. 중외극장에도 참여하기도 하고, 동양극장 직속의 청춘좌에서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는 등 연극계에 몸담았다. 극단에서는 주로 농촌의 시골여자 역할을 전문을 맡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김선영에게 콜로비아축음기회사는 음반 취입을 제안하여 연극으로 열 장, 노래로 두 장을 취입하였다고 한다(동아일보a; 동아일보d; 조선일보a).
이런 와중에 1931년 <방아타령>을 통해 영화계에 데뷔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33년에는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제1회 작품으로 김광주가 감독한 <아름다운 희생>에서 이경선, 심영, 김연실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동아일보b; 동아일보c).
한동안 활동을 하지 않던 김선영은 1939년 동양극장과 고려영화사가 합작하여 제작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출연하였다. 아마도 동양극장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여운형의 주례로 세론 레코드회사 문예부장을 역임한 김봉규(金鳳圭)와 결혼하였다(동아일보e; 조선일보b).
해방 이후, 김선영은 동아영화기업사가 제작한 문예영화 <마음의 고향>에 출연하였다. 어느 평론가는 이 영화가 해방 이후 최고 수작이라는 평과 함께 김선영의 연기에 대해서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동아일보f; 경향신문).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0년 10월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국립민족예술극장 배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로 활동하였다. 1978년에는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31년 12월 17일 4면.
동아일보b 1933년 4월 25일 4면.
동아일보c 1933년 5월 26일 1면.
동아일보d 1935년 12월 17일 3면.
동아일보e 1939년 2월 8일 5면.
동아일보f 1948년 12월 24일 2면.
조선일보a 1933년 4월 29일 석간 3면.
조선일보b 1939년 10월 1일 조간 4면.
경향신문 1949년 1월 6일 3면.
<<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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