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 대구에서 동양극장 간판을 그리던 김모씨가 운영한 서울간판에서 1년간 일함
1956 상경. 을지로 6가에 있던 간판가게에서 1년간 일함.
1957 무대미술을 하던 장종선의 조수가 되어 무대미술 수련하다가 영화미술을 하던 갈이 준에게 스카웃되어 <인생화보>(이창근)의 미술부로 영화에 입문
1958 왕십리 광무극장 옆에 왕십리 촬영소를 조성
1959 김세라의 주선으로 신설동 스튜디오를 조성하고 <푸른 날개>(전택이)의 미술작업에 참여
1961 마포 촬영소를 조성
1962-64 만리동에 촬영소를 조성하고 최훈, 함완섭 제작, 최훈 감독의 <사랑의 승부>로 미술감독 데뷔. 조경환에 이어 홍성칠이 또한 만리동에 동성영화사의 촬영소를 조성하자 홍성칠 팀으로 흡수되어 <왕자 호동>(한형모)의 미술작업에 참여. 곧이어 홍성칠 팀의 안양촬영소 현장책임을 맡아 <지옥문>(이용민)과 <대심청전>(이형표)의 세트를 제작
1964-66 제일영화사(대표 홍성칠)와 합동영화사(대표 곽정환)가 함께 원효로 촬영소를 조성하자 그곳의 현장 책임을 맡음.
1967-70 합동영화사, 제일영화사, 연방영화사, 극동영화사가 뚝섬에 1,000평 규모의 촬영 소를 조성하면서 근거지를 뚝섬으로 옮겨 합동촬영소(400평), 제일촬영소(200평), 연방촬영소(200평)를 맡아 운영.
1970-71 뚝섬의 촬영소들이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나자, 화양리 한양대학교의 창고를 얻어 임시 촬영소를 마련하고 보한산업주식회사의 작품을 맡음.
1971 강혁, 하휘룡, 이현진 등과 함께 ‘한타스클럽’을 조직하여 영화제작을 모색했으나 성사되지 못함.
1971-72 합동, 제일, 연방 영화사의 촬영소가 뚝섬에 다시 조성되자 이곳으로 돌아가 작업 재개. 고정 세트를 마련하여 제작비를 줄이자는 아이디어를 제출, 촬영소 에 한옥의 안채와 별채(합동 400평), 양옥의 거실과 법정, 일본집(연방 200평)을 고정 세트로 제작.
1972 고정 세트에 화재
1973 영화진흥공사의노인택 요청, <증언>(임권택)의 미니어처 작업으로 영화현장에 복귀
1974-88 연방영화사가 새로 조성한 불암동 촬영소와 대영영화사의 교문리 촬영소, 한진영화사의 호원동 촬영소 등을 운영하며 200여 편의 작품에서 영화미술을 담당. 특히 교문리 촬영소에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무협액션영화를 촬영하기 위한 고정 세트를 조성하여 운영하였다.
1983-97 약 2,000여 편의 광고미술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