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택
Noh In-taek / 盧仁澤 / 1937  ~ 
대표분야
미술
데뷔작품
운명의 손 1954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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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영상 기술의 진정한 장인 촬영감독 유재형 (박상홍,양창주, 2001) 인터뷰
미술 :
도둑과 시인 (진유영, 1995)
마카리안 고 (김완기, 1987)
외팔이 여신용 (이혁수,후쟁, 1982) (uncredited)
춤추는 달팽이 (김양득, 1982)
창밖의 여자 (김문옥, 1980)
요사권 (이형표, 1980)
소권 (이혁수, 1980)
애권 (이형표, 1980)
그 사랑 한이 되어 (이형표, 1980)

주요경력

1955년 삼일영화사 미술부 입사
1956년 서울대학교 산업미술대 청강 2년
1958년 한국영화사 촬영부 미술부장
1973년 한국영화인협회 미술분과 이사, 한국영화진흥공사 입사(미술참사)
1975년 태창영화사 촬영소 대표
1979년 세경영화사 촬영소 대표
1985년 남아진흥촬영소 대표
1990년 (주)한국광고영상제작사협회 부회장
1992년 한국종합촬영소 건립 자문위원
1993년 남아미술센터(개명) 대표이사, 한국영화인협회 기술분과 이사, 남아미술센터 고문
1995년 한국광고영상제작사협회 부회장, 대한민국 광고대상 대통령표창 수상
2003년 (주)한국영화기술단체협의회 이사
2004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
2004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
현재 (주)FIL L IN 고문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처음에는 지금의 이벤트 행사격인 여러 행사장의 세트작업을 했다. 이때 했던 행사중에 기억에 남는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축하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후에 서울대 산업미술대에서 청강을 하면서 미술에 대하여 다각도로 생각하던 중에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미술작업을 맡게되어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운명의 손"은 우리나라 영화중에 최초의 세트제작영화로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또한, 배우 주선태씨의 데뷔작이기도 해서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주요 영화작품
운명의 손(1954,한형모감독)
인생역마차(1956,김성민감독)
김약국집 딸들(1963,유현목감독)
순교자(1965,유현목감독)
언니는 말괄량이(1961,한형모감독)
원효대사(1962,장일호감독)
언니는 좋겠네(1963,이형표감독)
맨발의 청춘(1964,김기덕감독)
떠날 때는 말없이(1964,김기덕감독)
명동아줌마(1964,김기덕감독)
남과 북(1965,김기덕감독)
인천상륙작전(1965,조금하감독)
초우(1966,정진우감독)
대괴수 용가리(1967,김기덕감독)
청춘고백(1968,김기덕감독)
아네모네 마담(1968,김기덕감독)
로맨스마마(1968,최인현감독)
자유부인(1969,강대진감독)
팔도사나이(1969,김효천감독)
위험한 관계(1970,고영남감독)
기러기 아빠(1970,권혁진감독)
팔도며느리(1970,심우섭감독)
소장수(1972,김효천감독)
왕십리(1976,임권택감독)
산불(1977,김수용감독)
고가(1977,조문진감독)
화려한 외출(1977,김수용감독)
과부(1978,조문진감독)
망명의 늪(1978,김수용감독)
달려라 만석아(1979,김수용감독)
창밖의 여자(1980,김문옥감독)
최인호의 병태만세(1980,김수형감독)
춤추는 달팽이(1982,김양득감독)
마카리안 고(1987,김완기감독)
도둑과 시인(1995,진유영감독)
애착작품 및 사유
우선 "맨발의 청춘"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올오픈세트 촬영을 했던 것도 기억에 남지만 그 당시 "배신"이란 작품에 연속해서 캐스팅된 신성일과 엄앵란의 사랑이 싹트는 광경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추억으로 남는다. 또, "순교자"란 작품이 있는데 마포형무소가 철거되기 전에 3개월 동안 올오픈세트로 4계절을 다 담아내기 위해 고생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순교자"는 다행히 상도 많이 받고 당시 있었던 쿼터보상도 받아서 흐뭇해던 기억이 있다. 또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역시 올세트로 촬영을 했던 "남과북"이란 작품도 많이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영화속 명소
"난중일기"촬영시 갔었던 충청도 대천해수욕장 근처의 연평도해수욕장이 기억에 남는다. 해상전투씬을 찍기에 알맞게 탁트인 바다가 인상적이었다. 그때 촬영에 쓰려고 매달아두었던 거북선모형이 파도에 휩쓸려가는 바람에 원동기를 빌려가지고 겨우 찾았던 에피소드도 기억에 남는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영화미술이라는 작업이 형편상 작업을 선택하기에는 용이하지 못한 작업이지만, 그래도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이라면 고증에 충실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출자의 요구대로 충실한 고증을 할 수 있는 작품을 추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영상매체의 요구에 부합하다보니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새로운 작업도 다소 추구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으며 이것을 잘 취합해서 작업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7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 학교 행사가 있을 때는 미술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중학교 시절 교장의 소개로 당시 이벤트 행사 진행과 준비 일을 맡아하던 미술감독 이봉선의 집에서 머물며 일을 배우게 되었다. 이봉선과 친분이 있던 한형모 감독이 촬영하던 <불사조의 언덕>(1955)에서 세트 작업에 참여하며 영화 미술 일에 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한동안 이승만 대통령 생일축하연 등의 행사 준비와 <운명의 손>(1965), <망나니비사>(1955), <자유부인>(1956) 등의 작품에서 미술 작업을 병행하던 중, 1961년 <언니는 말괄량이>에서 미술감독으로 데뷔한다(한국영상자료원). 데뷔 이래 1990년대 중반까지 30여 년간 미술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그 작업들로는 <맨발의 청춘>(1964), <대괴수 용가리>(1967), <칼맑스의 제자들>(1968), <팔도사나이>(1969), <족보>(1971), <청춘극장>(1975), <창밖의 여자>(1980), <도둑과 시인>(1995) 등이 있다.

* 참고문헌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를 말한다:1950년대 한국영화』, 도서출판 이채, 2004

[작성: 황미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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