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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자
Lee Hwang-ja / 李鄕子 / 1930 ~
본명
이병희 (Lee Byeong-hui)
대표분야
배우
데뷔작품
풍랑 1949
활동년대
1940, 1950, 1960, 1970
DB 수정요청
소장자료
기본정보
영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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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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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여자형사 마리
(이은수, 1975)
화첩
흑발
(장일호, 1974)
봉고고
검은 야광주
(장일호, 1974)
양장점 주인
반혼녀
(신상옥, 1973)
연심(연화의 언니)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이성구, 1973)
유끼나가의 처
산
(신상옥, 1967)
계마담 C
길잃은 철새
(김수용, 1967)
문마담
섬색시
(윤성환, 1966)
요정 마담
유정
(김수용, 1966)
교사
제3의 운명
(김수용, 1965)
마담
주요경력
Radio 방송진행
TV프로그램 사회자로 활동
영화녹음활동
연극활동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연극을 먼저 시작했었다. 제가 여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 자꾸만 옆에서 너는 배우를 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여고 졸업 후에 '조선악단'에 들었갔는데 요즘 탤런트 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시험을 봤었고 당시 경쟁이 치열했었다. 그 '조선악단'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저는 '신생극단'에 속하게 되었다. 그 극단은 만주로 해서 공연을 다녔었다. 보통 극단에서 3작품을 했었는데 첫째는 순수고전극, 둘째는 일본연극 등이었다. 일본어를 잘 했기 때문에 일본연극을 주로 했었다. 제가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 연극을 한 것이라서 나중에 집에 붙잡혀 왔다. 그후에 다시 집을 뛰쳐나온 저는 부모님의 손에 안 붙들리고 싶어서 지방으로 다니는 극단으로 들어가서 연극을 했었다. 그렇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 당시 한국영화붐이 일어서 굉장히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었다. 그때 영화를 하자는 제의를 받아서 나는 영화일을 시작. 영화, 연극, 영화녹음, TV, 라디오 등에서 활동을 했었다. 방송국에서 사회도 봤었다. 악극이건 연극이건, 영화건 한 우물만 팠어야 하는데 여건이 안되었다.
주요 영화작품
풍랑(1949,우현감독)
결혼진단(1955,이만흥감독)
주요기타작품
■ 주요작품(연극)
악극단 '조선악단'에서 활동
■ 주요작품(TV)
KBS 초창기 연속드라마에 출연
'가정전선 이상 없다'등에 2작품 출연
애착작품 및 사유
한중합작 영화다. 모든 장면을 중국팀과 우리 촬영팀이 두 번씩 촬영을 했었는데 우리팀이 촬영을 할 때는 한국말로 하고 중국팀이 촬영을 할때는 중국어로 연기를 했었다. 각각 상영을 해야 해서 그랬었다. 그 영화가 어떻게 촬영 됐는지 궁금하고 보고싶다.
하고싶은 말
제가 보기엔 영화배우들은 잘 뭉치지를 못한다. 악극단 배우들은 자기들끼리 잘 뭉치는데 영화배우들은 그런 것이 별로 없다. 옛날 영화배우 중에서 아직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아직도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만약 지금 영화 일을 하게 된다면 세계로 뻗어나가는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 저는 요즘 영화같이 싸우고 총질하는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한다. 좀 로맨틱하고 무드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옛날 할리우드 영화에 참 좋은 영화들이 많았다. 나는 요즘 우리 나라 영화 중에서는 [서편제]를 봤었는데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속 명소
심청전:이규환감독의 심청전을 찍을 때 통도사에 갔었는데 그곳이 참 좋았다. 그때 그곳이 너무 좋아서 나중에 꼭 다시 오리라 생각을 했었는데 아직까지 가보지를 못했다.참 아쉽다.
풍량:홍릉이었는지 광릉이었는지 확실하게 생각이 안 나는데 지금은 민속촌이 있지만 당시엔 그곳이 전기줄도 없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촬영을 하면서 집 한칸을 빌려서 안방을 여배우와 여자스텝이 자고 다른 방에서 남자배우와 스텝들이 잠을 잤었다. 그런데 그곳이 가마솥을 때서 밥을 하는 곳이라 한여름에 불을 때는 방에서 잤었다. 너무나 덥고 고생스러웠었다. 당시 홍콩과 합작한 영화들이 많아서 전 홍콩에 자주 갔었다. 그 당시엔 우리 나라에 구두나 백이 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럴때 홍콩에 가니까 너무나 화려하고 어마어마해서 굉장히 황홀했다. 그 광경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스스로 살을 꼬집어 볼 정도였다. 거기에서 옷이나 귀걸이 목걸이 등을 쇼핑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저는 깍쟁이 같이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역할만 했었다. 실제 성격은 그렇지가 않은데. 그래서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했었다. 일본여자 같이 생겼다고 해서 일본여자 역도 많이 했었다.
자기소개 및 취미
운동을 좋아한다. 수영, 골프 등 테니스만 빼고는 모든 운동을 거의 다 할 줄 안다. 또한 여행을 좋아해서 외국에 많이 다녔다. 공산국가만 빼고 거의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이집트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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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병희(李炳姬)이다. 상명고등여학교(祥明高女)를 졸업했으며, 성우 생활과 연기를 병행했다(국제영화). 1949년 우현 감독의 <풍랑>으로 데뷔했으며, 전쟁 후 이만흥 감독의 <결혼진단>(1955)부터 이은수 감독의 <여자형사 마리>(1975)까지 약 20여 년간 활동했다.
* 참고문헌
韓國映畵俳優百人選(二), 『국제영화』 제4권 제8호(1958년 9월 발행).
[작성: 김한상]
출처 : 여성영화인사전
이향자 李鄕子
-배우. 1928년 1월 14일 서울 출생. 본명 이병희(李炳姬). 상명여고 졸업.
연기자로서보다는 성우로서 더 유명했지만 해방 이후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다.(여선정)
출연
-49 풍랑. -55 결혼진단. -57 애원의 고백, 찔레꽃. -58 그림자 사랑. -59 삼일독립운동, 애정과 반항,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남자, 유정무정. -60 부부. -61 역도 김일성, 연산군. -62 다이알 112를 돌려라. -63 처와 그 여인, 행복한 고독. -73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쓰. -74 흑발. -75 여자형사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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