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코멘트
지옥화
전쟁 직후 한국 남성들의 좌절과 욕망을 투영한 악녀 쏘냐의 재현이 압도적, 젠더 이데올로기를 뚫고 나오는 그녀의 욕망을 결국 처벌하지만, 영화적 경험 중에 매혹된 영혼에는 흔적이 남는다.
하녀
기이함의 재현에 거침이 없는 연출, 몇 번을 봐도 늘 끈적하게 들러붙는 불편함에 반하다.
오발탄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아직 새로운 것들에 대한 욕망을 정립하지 못한 전후의 과도기, 출구 없는 절망 속에 던져진 인간 군상의 재현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정교하게 짜인 몽타주와 흑백의 미학을 극대화한 존경스러운 연출.
영자의 전성시대
압축 근대화 시대를 짊어진 영자/들의 불행을 단순한 넋두리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풀어보고자 한 당대적 인식 수준을 엿볼 수 있다. 불행을 버텨내라는 국가의 잔혹한 명령조차 내면화한 영자를 보여주는 엔딩 역시 당대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관대한 독해가 필요하다.
바보들의 행진
청년문화에 대한 논쟁의 한가운데서 등장한, 서사의 외피는 발랄하나 그 이면은 한없이 어두운 영화. 허무주의 혹은 저항을 통한 희망의 발견이라는 상반된 독해를 낳는 고래사냥의 여정은 청춘의 영원한 화두!
그들도 우리처럼
코리언 뉴웨이브, 한국적 작가주의 영화 담론의 중심에 있는 영화. 군부독재 종식과 문민정부 수립의 교차기라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발화될 수 있었던 텍스트로서 시대적 분노와 좌절조차 객관적 시선으로 보고자 하는 지식인 남성 화자를 현재적 관점에서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당대적 관점에서는 단연코 대중영화의 한계까지 밀고 갔다고 할 수 있다.
살인의 추억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로 구성된 스토리텔링을 지켜보는 즐거움.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내기보다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배치된 영화적 장치들을 통해 시청각적 즐거움뿐 아니라 감수성까지 자극하는 한국적 스릴러가 탄생했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연민도 있다.
마더
박완서가 전쟁을 거치며 독하게 자식들을 지켜내야 했던 모성을 그렸다면, 이 영화는 자식 교육에 성공한 야무진 개성 출신 어머니가 아니라 무식하고 무능하며 죄의식에 충만한 이름 모를 어머니를 놀랍도록 냉정하게 응시한다. <살인의 추억>이 그랬듯 그 어머니는 한국 현대사가 응집된 DNA를 갖고 있기에 그녀가 추는 허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춤은 쓰디쓰다. 마지막 관광버스 씬에서 실루엣으로 처리된, 기억상실에 빠진 어머니/들의 춤은 쓰다 못해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러보는 비합리적인 존재의 이름, 어머니!
시
모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에 도달함으로써 '시'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형태의 모성을 재현한 영화. 인간됨의 도리의 핵심에 사랑을 매개로 한 타자와의 상호적 관계, 그리고 타자에 대한 환대가 있다는 성찰이 미자가 그토록 쓰고 싶어 했던 시로 승화되는 후반부가 너무나 아름답다. 영화는 철학적 관념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헤어질 결심
짧은 순간 현존한 듯했으나 곧장 부재했던 것으로 의심되는 사랑. 그러므로 사랑은 더욱 강렬하게 현존과 부재, 순간과 영원 사이를 오가는 무한반복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 과정에서 느껴지는 에로틱한 에너지와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감을 시각화하는 데 성공한 기념비적인 로맨스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