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선정영화목록

선정영화목록
제목 감독 제작년도
이국정원 전창근,도광계,와카스기 미쓰오 1957
마부 강대진 1961
화분 하길종 1972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배용균 1995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
멋진 하루 이윤기 2008
만추 김태용 2010
공동정범 김일란,이혁상 2016
우리들 윤가은 2016
자산어보 이준익 2019

선정 코멘트

이국정원
한국 최초의 한국-홍콩합작 영화다. 걸작은 아니지만 당대 한국영화계의 야심이 집결된 영화였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영화가 품고 있던 야심과 패기를 잃어버린 듯하다. 완성될 때까지 사연도 많았지만, 영상자료원이 공을 들여 발굴, 복원된 이후 라이브더빙쇼로 재탄생될까지의 과정도, 그 결과물도 흥미롭다. 완성된 지 약 65년이 지났지만, 영화 자체뿐 아니라 영화 제작, 전후 과정 전체가 관객들과 영화인 모두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흔치 않은 영화다.

마부
<마부>는 생활력 강한 여성들이 남성들의 무능으로 무너져가는 가부장제를 복원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는 이상한 아이러니로 가득한 영화다. 그러나 영화는 무능한 남성을, 무능한 아버지를 적으로 돌리거나 살해하지 않고 그들의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애쓴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영화 내내 가부장제를 위해 복무하지만, 파국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화해를 모색한다. 작년에 이 영화를 다시 봤고, 나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을,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위한 위대한 영화다.

화분
이 영화는 하길종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며, 한국에서 찾기 쉽지 않은 정치적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다. 이 영화가 없었다면 1980년대 이장호의 걸작들이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엄중한 시기에 태어난 흥미롭고 용기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노골적인 정치적 은유는 사실 그렇게 세련된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데뷔작이라면 이 정도의 패기와 야심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지금의 한국영화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오래전에 영상자료원에서 이 영화를 봤다.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지만, 영화가 가진 흥미로운 서사와 실험성, 기묘한 에너지는 과거의 한국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던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한국영화에도 이런 영화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내내 했다. 디지털카메라가 없던 시절 배용균 감독은 거의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영화를 만들었고, 단 2편의 영화로 한국영화사에 각인되었다. 2010년대 초반 그의 특별전을 하기 위해 2년 정도 그를 수소문했다. 신문 기사와 지인을 통해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연락이 닿지 못했다. 난 이 영화가 다시 상영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
현실에 두 발을 정확히 딛고 있으면서도 주인공인 청춘들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 않으며 남녀 간의 사랑 다툼이 없는 희귀한 한국 청춘영화이자, 젊은 여성 감독이 신인 여성 배우들과 함께 이제 갓 졸업한 청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선구적 여성영화다. 벌써 20년이 흘렀지만, 이 영화를 넘어선 청춘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멋진 하루
여러 가지 면에서 이만희 감독의 걸작 <휴일>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이 리스트에서 이만희 감독의 <휴일>을 뺀 건 <멋진 하루>를 넣기 위해서였다. 연기, 서사, 촬영, 편집, 음악까지 당시 어떤 영화보다 유려하고 유쾌하고 세련된 영화다. 2000년대 후반에 나온 영화 중 최고의 영화 중 한편이라고 생각한다.

만추
국적이 다른 두 사람이 미국에서 우연히 만나 마음을 나누다가 헤어지는 과정이 전부인 <만추>의 경이로움은 인물의 마음이 움직이고 열리는 순간을 고스란히 영화에 담아냈다는 데에 있다. 한국영화의 인물들은 한국을 벗어나 한국적 맥락이 거세되어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만추>는 그걸 보여주는 영화기도 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파이란>과 함께 한국의 멜로영화 중 첫 줄에 놓을 수 있는 영화다.

공동정범
김동원 감독으로부터 시작된 한국독립다큐의 주류였던, 이른바 액티비즘 계열의 다큐멘터리의 역사는 <공동정범>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공동정범> 이후 나온 어떤 정치, 사회적 소재의 독립다큐도 아직까지 <공동정범>이 이루어낸 성취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영화가 보여준 스토리텔링, 인터뷰, 진실을 다가가는 창작자의 태도, 거짓을 통해 보여준 자기성찰까지. 이 영화는 한국다큐멘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들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한국영화에서 특유의 계몽성과 교훈성이 없는 영화는 좀처럼 찾기가 어렵다. 한국영화에서 꼰대스럽지 않은 아동영화와 청춘영화를 찾기 어려운 이유다. 멀쩡한 감독들도 이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예외 없이 꼰대가 된다. 윤가은 감독은 장편 데뷔작 <우리들>을 통해 어른들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그려내던 아이들의 세계를 온전한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한국영화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기억해야 할 영화다.

자산어보
이 영화를 뽑은 건 단순히 좋고 뛰어난 영화라서가 아니다. 존경할 만한 어른이 드문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모두에게 존경받으며, 매번 흥미로운 영화를 여전히 만들고 있는 유일한 영화감독 이준익의 최신작이기 때문이고, 급변하는 한국의 영화산업 속에서 자본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시스템으로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어온 몇 안 되는 최고참 선배 영화감독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자산어보>는 이준익 감독이 아들딸 세대에게, 그리고 영화계의 후배들에게 남긴 선물과도 같은 영화적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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