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코멘트
귀로
한국고전영화가 충격적으로 근사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한 영화. 집안의 너무 가파른 계단, 왠지 모르게 거기 앉아 있는 여자, 거울 속 입술, 립스틱, 전화를 붙잡는 손, 좌절의 몸부림, 죽은 듯 누워있는 거울 속 몸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은 실로 신비하고 완벽하다.
태양닮은 소녀
여름의 순수한 에너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하다. 70년대 한국영화에서 이런 에너지를 완전히 공감받을 또 다른 영화가 있었던가.
최후의 증인
오 형사는 사건의 궤적을 추적하고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 보여주며 한국전쟁에 의한 우리의 비극을 유장하게 그려낸다. 줄거리는 상당히 복잡하고, 등장인물도 꽤 많으며 영화가 커버하는 시간적 배경도 상당히 길지만 <최후의 증인>은 그를 완벽하게 통제하며 관객에게 “오! 저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과연 뭐지?”라는 궁금증을 계속 불러일으킨다.
겨울나그네
한국영화 중 길티플레저가 뭐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답하는 영화.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80년대 통속극의 정수를 보여주며 안성기, 강석우, 이미숙, 이혜영의 캐릭터 하나하나가 그렇게나 강렬하고 그럴싸하다고 말하는 수밖에.
첫사랑
이명세 특유의 인공적인 세트 디자인과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의 합이 완벽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짜 같은 비주얼 속에서 영화 사상 가장 진짜 같은 첫사랑의 설렘을 만들어낸다. 술집에서 공중에 둥둥 뜨는 주전자 장면은 한국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
춘향뎐
판소리와 영화가, 각자의 품위를 해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어울릴까를 영화 내내 신기해할 수밖에 없었다. 방자가 징검다리를 밟으며 달리는 장면의 영상 리듬과 판소리 리듬의 합은 지금 생각해도 나에겐 매우 인색한 소름이 돋는다.
공공의 적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100선에서 홀대하면 안 된다.
살인의 추억
감독의 취향도 지키고, 예술적 야심도 포기하지 않으며, 상업영화의 재미라는, 만나기 불가능할 것 같은, 만날 수 있다고 해봐야 그 크기가 개미똥구멍일수밖에 없는 공집합의 크기를 믿을 수 없을만큼 최대로 확장한 작품.
짐승의 끝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에서만 느껴지는 공포와 좌절감. 저 멀리 울려 퍼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 그 안에서 무력하기만 한 이민지의 얼굴. 가장 무서운 한국영화 중 하나.
휴가
이렇게 작은 독립영화를 어마어마한 한국영화 100선에 소개하는 것이 타당할까. 그러나 이란희 감독과 이봉하 배우가 보여주는 노동운동가, 그들이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은 일상의 소중함은 실로 아름답다. 나의 10편에서 빼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