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코멘트
태양의 거리
현존하는 프린트에는 사운드가 통째로 빠져있지만, 영화를 보노라면, 피난살이 와중에 대구에서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네오리얼리즘'에 비견되는 '코리언 리얼리즘'으로 운위되는 이유일 테다. 한편, <태양의 거리>가 2013년에야 우리에게 돌아왔음을 새겨보면, 같은 해에 제작된 신상옥의 데뷔작 <악야>도 언젠가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미망인
달뜬 음악이 동반하는 카메라가 전후의 시가지를 누비는 시작 장면을 볼 때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이미지만 남아있는 후반부 시퀀스들의 잃어버린 소리를 상상한다. "수렁에 빠졌을 때라도 그는 해바라기 같았다"는 문장과 함께 그의 딸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는 도입부에서, 신자가 옷 갈아입는 쇼트만 보아도 여성 감독의 영화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2023년은 박남옥 감독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죽엄의 상자
역시 사운드트랙이 유실된 채로 2011년에 처음 만났던 이 작품을, 최근 발굴된 영문 스크립트와 함께 지난 6월에 다시 보았다. 지리산에서 아직 '공비'를 토벌하고 있었고, 한라산에는 여전히 저항하는 '폭도'가 잔존했던 1955년에 나온 김기영의 첫 장편 극영화. 미 공보원 산하 리버티 프로덕션에서 이력을 시작한 김기영의 '전후'를 송두리째 다시 생각하게 하는, 폭탄 같은 잠재력의 영화.
천년호
인간과 비인간의 삶, 가족과 여성의 영역을 위협하고 부정하는 국가. 와이어액션을 동반한 슬로모션과 패스트모션의 특수효과가 같은 해에 나온 〈사녀〉와 달리 고전적 의미의 '비극'을 창출한다. 이만희ㆍ임권택처럼 신상옥도, 북한에서 연출한 작품을 포함한 '전작전'을 한국영상자료원이 개최하고 그에 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길 바란다.
콩쥐 팥쥐
강태웅의 활동, 이후에 볼 수 있었던 KBS '인형극회'의 퍼핏 애니메이션들과 역사 등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 <흥부와 놀부>를 만들고 10년 만에 선보인 <콩쥐팥쥐>(유현목 제작)는, 당대 한국 사극 영화 '호러' 장르의 관습과 정동을 총동원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 2022년에 디지털 복원해 공개했다.
노동자 뉴스 1호
광주 항쟁을 겪은 뒤 영화소집단 운동은 급진화했다. 또, 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수단이었던 비디오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영화운동의 주된 매체가 되었다. 지금도 활동 중인 노동자뉴스제작단이 1990년대를 목전에 두고 만든 비디오뉴스 1보는, "해소될 수 없는 적대의 무한한 갱신"(김소연)을 21세기에도 여전히 "선포"한다.
이재수의 난
까마귀와 달 등 비인간의 시점과 비전이 이름 없는 이들의 역사를 구축하는 조감도가 된다. 역사소설로도 범상치 않았던 현기영의 원작(『변방에 우짖는 새』)은 영화로 옮겨지며 환골탈태한다. 이십 세기말 남한에서 앙드레 바쟁의 글「비순수 영화를 위하여: 각색에 대한 옹호」를 떠올리게 한 사례.
파산의 기술記述
2차원상에 존재하는 영화 이미지의 평면성과 디지털 비디오의 물성이,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작동 방식", 그 '기술(技術)'을 직관할 수 있도록 현시한다. 올 초에 타계한 이강현 감독의 공식적인 첫 작품이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 <지도를 만드는 사람>의 안팎이 어떠했을지, 때때로 멋대로 공상해 본다.
스카우트
<황무지>, <오! 꿈의 나라>,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등 5.18이라는 사건과 이후를 극화하려는 시도를 '독립영화'에서 우선 만났다. 한편, 한동안 '충무로'의 5.18 재현은 검열로 난도질당하거나(<부활의 노래>),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차마 직시할 수 없는(<꽃잎>, <박하사탕>) 무엇이었다. 국가폭력의 "스펙터클 화"로 일컬어진 <화려한 휴가>와 같은 해에 개봉했던 <스카우트>는 이 숙제를 위해 안간힘을 쓴, 드문 '대중영화'로 기억된다.
깃발, 창공, 파티
깃발'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다가, 제목에 등장하는 '창공'으로 들리는 듯한 '파티'를 체험하게하는 몽타주의 역량. 이 작품을 발표한 뒤, 연출자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박남옥 상'을 받았다. '노동(조합) 혐오'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지금/이곳에서 이 영화가 더 자주 보여지기를 바라며, 장윤미의 다음 작업을 기다린다.
※ 특별언급: 이번에는 2014년의 한국영화 100선에서 언급되지 않은 작품을 주로 뽑았습니다.
<무제 77-A>(한옥희, 1977): 영화예술과 그를 둘러싼 제도 및 인습 모두에 물음을 던지는 한옥희와 '여성 실험영화 집단' 카이두(1972년 결성)의 몇몇 작품들을 지금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번 설문에서 단편은 선정할 수 없다기에, 1970년대 남한 영화를 대표할 만하다고 첫손에 꼽았던 이 작품을 따로 언급한다. 이토록 늘 새로운 실천의 역사들을 이어 쓰며 (재)구축해야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