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코멘트
최후의 증인
한국영화사상 한국의 지옥도를 아마도 가장 처절하게 그리는 작품. 영화는 최후의 증인조차도 멸한 이 땅에서 죽음이 아니라면 무엇이 답이겠냐는 최후의 ‘증언’을 남긴다. 1980년이라는 지긋지긋한 시간 속에서 탄생한 영화가, 한국전쟁 이후 승승장구한 폭정의 역사를 기록한 영화가 어찌 처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인의 추억
한국 장르영화의 역사를 다시 쓴 작품. <살인의 추억>에 버금가는 ‘수사’ 영화는 이제껏 나오지 못했다.
야행
영화 속 ‘미스 리’는 파리를 부유하는 벤야민처럼 정처 없이 서울의 곳곳을 방랑한다. 김수용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도시적이면서 음탕한 영화.
휴일
이만희는 영사기의 빛도 보지 못한 이 영화에서 한 가난한 연인의 무거운 발걸음과 표정을, 휴지 조각과 절망뿐인 서울의 한구석을 집요할 정도로 느린 롱테이크와 아름다운 이미지로 치환한다. 잔인한 세상은 이만희를 배신했지만, 이만희는 영화를 배신하지 않았다.
속 별들의 고향
장미희가 길가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알캉달캉’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장면(그리고 가사)은 이 영화가 무언가의 ‘속편’의 지위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이장호 감독의 1975년 1편을 넘어서는 하길종의 숨은 수작.
박쥐
박찬욱 감독에겐 최고작이 없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최고작이고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시점에 물어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요즘 <박쥐>가 더욱 좋은 이유는 최근 <박쥐> 와 같은 수준 높은 코미디를 보여주는 한국영화가 멸종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두 끗(?) 정도의 엇박으로, 머리가 띵할 정도로 냉철한 (그러나 치밀한) 유머를 보여주는 순간은 오직 박찬욱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다.
로맨스 그레이
1960년대식 (중년 남자들의) 요상한 ‘로맨스’를 소동극으로 그려낸 코미디. 최은희 배우의 팜므 파탈 연기 중에서도 <로맨스 그레이>의 ‘만자’는 단연 으뜸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뭘 해도 안 되고, 어떡해도 안 되는 캐릭터들인데 임순례 감독 영화의 그들은 마치 가슴에 달궈진 인두를 품었다가 내려놓은 것처럼 오랫동안이나 아리고 서글픈 잔상을 준다. 1990년대 후반 우리가 모두 공유했던 열패감을 슬프고도 위트있게 그려 낸 영화.
깊고 푸른 밤
해외 “올로케” 영화라는 과감한 타이틀을 제외하고도 <깊고 푸른 밤>의 업적은 많다. 무엇보다 영화는 한국으로부터 도망쳐 온 불법 이민자들의 고난을 통해 미국이 아닌 정작 한국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를 역설한다. LA의 화려한 간판도, 데스밸리의 웅장한 사막도, 영화 속에서는 지옥에서 조금 더 나은 지옥으로 옮겨온 낙오자들의 탈출구일 뿐이다.
부당거래
<부당거래>의 성공은 단순히 영화적 흥행이나 비평에 대한 성취를 넘어 신화가 되었다. 영화보다 더 유명해진 유행어들, 배우들의 연기, 완벽한 이야기 설정 등은 몇 세대를 넘도록 구전되고 공유되는 클래식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