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코멘트
지옥화
전후 한국사회의 비공식 역사 (밀수 경제, 미군 클럽 내부의 모습 등)의 알알히 박혀있는 영화. 형과 아우를 동시에 유혹하는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악녀의 모습은 충격과 경이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진흙 속에 처박혀 죽는 소냐의 마지막 모습은 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의 모습 못지않게 전후 한국인의 삶이 처절함을 보여준다.
여판사
현실 소재를 각색하여 한국 최초 여판사의 모습을 여성 감독이 그려냈다는 측면에서 의미 깊은 영화. 영화 속 여판사는 결국 가부장적 한국사회에 타협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중간중간 '법 집행자'로서의 힘을 행사하는 문정숙의 재판 장면이 압권이다. 에코로 울려 퍼지는 강렬한 그녀의 목소리는 결말과 배치되는 텍스트 분열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순이
경제개발이 온 국민의 염원이자 국가의 시책이던 1960년대 초반 한국 사람의 살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주는 영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억척스럽게 일을 해내고 결국 '새나라 자동차'를 사게 되는 또순이의 모습은 국가 프로파간다를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그녀의 경제적 성공에 같이 박수치 게되는 감정적 설득력을 갖는다. 영화 곳곳에 몽타쥬되는 순대, 고봉으로 쌓아 올린 흰 밥은 같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을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이어도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외설적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영화. 풀리지 않는 살인사건의 미스터리와 이에 대한 사변을 들으며 끈기 있게 기다리다 보면, 영화의 결말 지점에 이르러 '폭발하는 엔딩'이란 이런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 줌. 굿판에서 왜 "애들은 가라~" 고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여자들만 사는 거리
호스테스 영화의 대표작 <영자의 전성시대>는 어쩐지 도식적이다. 이에 비해 이 영화는 1970년대 서울의 사창가에 살았던 여성들의 삶을 보다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 특히 제목처럼 '그녀'들 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살던 '거리'가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의 장면을 보여주듯 같은 무게로 관객의 눈 앞에 펼쳐진다.
꼬방동네 사람들
'민중'이라는 단어가 시대를 지배하던 때에 만들어진 변두리 '사람들'에 관한 영화. 언어가 사람을 가둘 수 없듯 '민중'이라는 단어가 품지 못한 따뜻함과 지속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의 힘이 생생히 드러난다. 특히 김보연 배우의 연기력과 검은 장갑의 강렬함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뚫고 날아 관객의 마음을 파고든다.
고양이를 부탁해
요즘의 독립영화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영화. 인천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다루면서도 여고생들이 잔잔한 우정과 갈등이 낯설지 않다. 여고생들 사이를 매개하던 고양이는 20년 뒤 <고양이들의 아파트>에 주인공이 되어 나타난다.
내일로 흐르는 강
최초의 한국 퀴어 영화라고 볼 수 있는 영화. 시도와 한계가 동시에 보이기에 당대의 성정치 지형도를 더욱 돌아볼 수 있게 한다.
피의 연대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은 연대할 수 있을까? 숨어서 처리하던 여성들의 피의 이야기를 아주 산뜻하고 당차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현실에 변화를 주는 과정까지 목도할 수 있게 하는 여성들의 피 이야기.
모어
사람의 몸이 몸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 예술가 발레리나가 되고 싶던 모지민이 밤무대에서 관객을 위한 공연을 하지만 그것은 실패의 스토리가 아니다. 모지민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경운기 타고 시골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모습이 매우 사랑스럽다.
※ 특별언급: 10작품 뽑는 것은 참 어렵네요. 한국영화 장르별 100선? 50선? 뽑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