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코멘트
하녀
물론 1960년도 이전에 한국영화는 시작됐다. 다만 나는 지금의 한국영화는 <하녀>가 개봉한 1960년부터 시작됐다고 (과장법을 섞어) 주장하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봉준호, 박찬욱을 비롯한 21세기 한국영화의 스산한 미학적 전통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 역시 과장법이지만, 과장법이야말로 김기영의 걸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수사다.
안개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한국문학을 모더니즘의 시대로 이끌었다면, <안개>는 한국문학의 모더니즘을 통해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을 열어젖힌 걸작 중 한 편으로 더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나의 고민은 이거다. 김승옥의 책은 새로운 세대에게도 계속해서 읽히는데 왜 김수용의 영화는 새로운 세대에게 완전히 잊혀졌는가.
휴일
나는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던하고 아름다운 걸작이 한국 영화광들에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만큼이나 힙한 무언가로 더 소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염치없는 꿈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거의 21세기적이다.
화분
하길종은 파졸리니의 <테오라마>를 표절했나? 아마도. 하길종의 데뷔작은 지나치게 거칠고 도식적인가? 아마도. 그럼에도 나는 당대의 젊고 치기 어린 예술가가 유럽 아트시네마의 어떤 지점에 도달하려다 가히 1970년대적인 수많은 한계에 부딪혀 갈팡질팡하다가 내놓은 이 영화가 지나칠 정도로 재미있다.
삼포가는 길
나는 <삼포가는 길>의 마지막 장면을 볼 때마다 운다. 이 영화는 순전히 그 비극적인 토속적 아름다움 때문에라도 이만희의 '더' 모던한 1960년대 영화들만큼의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다.
피막
<피막>은 원시적인 박력의 시네마다. 압도적인 엔터테인먼트다. 재미있게도 많은 한국 감독은 토속신앙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 때 가장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발현하곤 한다. 나홍진의 <곡성>처럼.
고래사냥
<고래사냥>이 1980년대 한국영화 최고 걸작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배창호의 이 아름다운 로드무비는 한 편의 영화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이자 대중적 엔터테인먼트라는 두 가지 지점에 동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드문 증거로서는 손색이 없을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
지나치게 지적이고, 지나치게 야비하고, 지나치게 꼼꼼하고, 지나치게 유미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지나치게 박찬욱스럽다. 박찬욱 최고의 걸작이라는 이야기다.
괴물
가장 B무비스러운 장르영화가 가장 작가주의적인 예술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 2000년대 한국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그리고 세계가 열광하는) 특징이라면, <괴물>은 그 정점이다.
황해
작가주의 영화와 대중적 엔터테인먼트가 여전히 단단하고 즐겁게 결합할 수 있다는 마지막 믿음을 아직까지 주는 가장 젊은 감독은 여전히 나홍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