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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박광수 기증 컬렉션
▶ 박광수 감독은 1980년대 후반 한국영화사에서 새로운 분기점이 된 코리안 뉴웨이브의 기수로 평가됩니다. “나는 스스로를 충무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말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기성 제도권과 거리 두며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그가 비판적으로 바라본 1970년대 충무로 영화계는 유신 정권의 엄격한 통제와 검열에 무기력하게 순응하는 오락영화가 주를 이루던 시대였습니다. 이후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유신정권의 강압적인 문화 통치를 끊어낼 희망이 되었지만, 또다시 신군부 정권의 출현으로 좌절되었습니다. 이른바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문화정책이 한국영화의 또 다른 족쇄가 되었고, 충무로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에로티시즘 영화가 만연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박광수 감독에게는 새로운 영화 활동의 장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그는 1980년 서울대 영화 서클 ‘얄라셩’에 합류해 영화 이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얄라셩 출신들과 1982년, ‘서울영화집단’을 창립해 본격적으로 ‘영화운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얄라셩에서 서울영화집단까지, 박광수 감독은 그의 영화적 동지들과 함께 현실을 비판하는 다수의 8mm 단편영화를 제작했고,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등의 영화이론서를 출판하며 영화의 책임감 있는 사회적 기능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1984~1985년 프랑스 영화교육특수학교(E.S.E.C) 유학을 거쳐 충무로에 입성한 박광수 감독은 영화운동 시절의 초심을 유지하며 제도권 영화들과 경쟁할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기존 한국영화가 재현해 내지 못한 한국 사회의 현실과 잊힌 역사, 그리고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인간 군상을 그려냈습니다. 데뷔작 <칠수와 만수>(1988)는 도심 고층빌딩 위 옥상 광고탑 페인트공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들도 우리처럼>(1990)은 운동권 지식인이 숨어들어 간 탄광촌의 노동 현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남아있는 현대 사회를 조명한 <베를린 리포트>(1991)와 <그 섬에 가고싶다>(1993), 봉제공장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젊은 생을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의 실화를 소재로 만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등이 그의 대표작입니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역사와 현실을 지적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해온 박광수 감독은 평론가들로부터 ‘사회파 감독’, ‘사회적 리얼리즘 작가’ 등과 같은 수식어를 얻게 됐습니다. 더불어 장선우, 정지영 등, 그와 비슷한 시기 유사한 문제의식을 보여준 당대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코리안 뉴웨이브 세대’라는 특별한 호칭을 부여받게 됐습니다.
그런데 박광수 감독이 주도한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은 비단 영화의 주제나 미학적 측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미학적 시도가 스크린 위에 관철되기까지 박광수 감독은 막후에서 다양한 도전과 실험을 병행해 나갔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기존 충무로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영화 제작 방식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가령 새로운 자본이 새로운 영화를 창작할 수 있게 한다고 판단한 그는 충무로 토착자본이 아닌 다른 출처의 자본 조달 방식을 적극적으로 궁리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 영화계에 대기업 자본과 해외 투자금을 유입시켜 작품을 제작하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또 박광수 감독은 일찍이 대학 영화 시절부터 새로운 인적자원의 확충이 궁극적으로 한국영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위해 박광수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을 감독 고유의 권한으로 두지 않고, 매 작품 연출부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방대한 자료조사와 꼼꼼한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각본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이러한 제작 과정에서 성장한 그의 연출부원들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김성수, 오승욱, 이창동, 이현승, 허진호 감독(가나다 순)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로 인해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는 ‘감독 배출 사관학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영화감독 박광수 기증 컬렉션>은 그가 영화제작 방식에서 주도해 온, 바로 이 같은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현장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박광수 감독은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이름과 그가 운영한 제작사의 이름으로, 총 191점의 자료를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했습니다. 첫 번째 기증은 2021년, 그가 1993년에 설립한 영화사 '박광수필름'에 보관되어 있던 자료들이었습니다. 이 자료에는 그가 충무로 입성 후 만든 영화들의 제작 실무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문서들이 주를 이룹니다. 두 번째 기증은 2022년, 박광수 감독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충무로 입성 전 비제도권에서 동료들과 영화운동을 하던 시기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 자료들이 주를 이룹니다.
박광수 감독이 착실히 보존해온 자료들로 구성된 이 컬렉션을 통해, 한국영화 미학뿐 아니라 영화 제작 현장에서 혁신을 이뤄낸 그의 과거 성과가 다시 한 번 가치 있게 되새겨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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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연구: 박경진(중국전매대학교 영화학 박사과정)
- 기획·진행: 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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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감독 소장 사진앨범(1)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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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및 기타활동
#얄라셩/서울영상(영화)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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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류
박광수 감독 소장 사진앨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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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시네마
<장님의 거리> DCP
#영상
#1980년대
#연출작
#얄라셩/서울영상(영화)집단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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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콘티
<장님의 거리>(가제: 맹인들의 거리) 시나리오
#시나리오
#1980년대
#연출작
#얄라셩/서울영상(영화)집단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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