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에 따른 분류

영상시대 감독들과 검열

▶ 이 컬렉션은 ‘영상시대’ 감독들의 검열 자료를 소개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영상시대’는 이원세,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홍파 등 당대 활발히 활동하던 일군의 청년 감독 5명과 평론가 변인식이 1975년 출범시킨 일종의 동인입니다. 1975년 7월에 발족하였고, 1978년 6월 동인지 『영상시대』 1978년 여름호가 공식적인 마지막 활동이었으니 대략 3년간 활동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사이 1975년 말에는 이원세가 탈퇴하고, 홍의봉이 합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75년 7월 18일 발족식에서 하길종이 대표로 읽은 성명서를 통해 동인들은 영상시대의 목표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새 세대가 만든 새 영화’ 이것은 구각을 깨는 신선한 바람, 즉 희칠한 무덤 같은 권위주의를 향한 예리한 투창이어야 한다. 과연 이 땅에서 단 한 번의 ‘누벨바그’나 ‘뉴 시네마’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었던가?... 때문에 여기 여섯의 ‘영성공화국’ 주민은 서로 다른 개성을 통한 ‘젊음의 구도’를 제시할 것이며 새로운 영화미학과 가치관을 모색하는 일에 머리를 맞대며 뜨거운 마음과 마음을 교환해 나가는 은막의 파수꾼이 될 것임을 선언한다.(변인식, “1970년대 한국영화에 있어서 ‘영상시대’와 하길종의 역할”, 『영화평론』 제8호, 1996, 101쪽)
    

영상시대는 그간 이장호, 하길종 등 1970년대를 대표했던 감독들의 의식, 나아가 정신을 상징하는 일종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졌고, 그만큼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당대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오늘날까지도 1970년대 영화사 서술에서 영상시대 소속 감독들의 비중은 상당히 높으며, 이 감독들이 당대의 대표적 작가들로 거론됩니다. 그만큼 상징성이 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시대 감독들과 검열 컬렉션’은 1970년대 영화들에 대한 특정한 검열의 흐름 혹은 영화사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획되었습니다.


“영상시대 감독들과 검열” 컬렉션 소개

이번 컬렉션에 포함된 자료는 이원세,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홍파, 홍의봉 6명 감독이 연출한 총 77편 영화의 검열서류들입니다. 전체 PDF 쪽수로는 5,848쪽, 편당 약 76쪽의 방대한 분량입니다. <사의 찬미>(김호선, 1991)나 <살아있는 갈대>(홍의봉, 1995)의 경우 1장만 보존되어 있는 반면, <일송정 푸른솔은>(이장호, 1983)의 서류는 217쪽에 달합니다. 자료원이 집합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검열서류가 1990년대 말까지임을 감안할 때, 이 시기 기준으로 전체 감독들의 연출작 중 누락된 자료는 11편입니다. 특히 <별들의 고향> <여왕벌> <어우동> <서울무지개> 와 같은 당대의 문제작 혹은 검열로 문제가 된 작품들이 자료에서 누락된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컬렉션의 범위와 관련하여 이원세, 홍의봉 두 감독들의 작품을 포함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원세 감독의 경우 1975년 말에 동인에서 탈퇴했다는 기록이 있는 한편, 홍의봉 감독의 경우 국내에서의 연출 이력이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원세 감독의 경우 연출작이 타 감독들에 비해 상당히 많은 편이라 영상시대적인 특성을 희석시키지 않을까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함시킨 것은 이 두 감독 역시 영상시대 동인으로서의 특성이 없지 않으며, 무엇보다 컬렉션을 통해 원 자료 자체를 많이 공개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검열 특성과 대표적 검열 사례

영상시대 감독들의 경우 유독 검열 관련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예컨대 20분 분량이 삭제되어 감독 본인이 “‘사지가 잘린 작품’이라며 펄펄 뛰었”다는 <수절>, 검열 당국에 의해 영화가 30분이나 삭제되어 감독과 작가가 극장 영사실에 숨어들어가 필름을 이었다고 하는 <바보들의 행진> 여덟 차례나 시나리오 개작이 이루어졌다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검열의 위험이 컸으나 당시 영화검열위원 중 한 명인 박완서 작가의 집요한 옹호로 무삭제 통과되었다고 하는 <바람불어 좋은날>,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영화화가 가로막혔다는 <바보선언>, 가혹한 검열로 감독이 영화계에서 은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여왕벌>, 외설과 민중주의적 사관이 문제되어 당시 공윤위원장이 사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어우동> 등의 사례들이 이런저런 통로를 통해 전설처럼 회자됩니다. 이 중 <어우동>과 <여왕벌>은 검열서류 자체가 남아있지 않아 서류와의 비교가 어렵고, <바람불어 좋은날>의 경우는 기록으로 남아있을 만한 일화가 아닙니다. 그 외 사례들은 일부는 서류를 통해 확인되고, 일부는 다소간 과장이 섞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대체로는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영상시대 동인들에 포함된 개별 감독들이 일관된 의식을 가지고 모인 동인들이 아님을 감안할 때, 이들의 영화 검열서류에서 뚜렷한 공통점을 추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바로 언어와 품행에 관한 지적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저급하고 퇴폐적인 언동에 대한 지적이 많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이들 감독들이 당대 젊은 세대 혹은 하층민들의 삶을 디테일하고 리얼하게 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영상시대 감독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본편 검열보다는 시나리오 검열 단계에서 제약이 큰 편이었습니다. 간략하게 대표적인 검열 사례를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화분>(하길종, 1972): 시나리오 검열 초심에서 전면 개작 통보를 받았습니다. 당시 수정 지시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 동성연애 장면 전체 삭제, 나. 자매 등에 대한 난륜 장면 전체 삭제, 다. 린치 장면 전체 삭제, 라. 저속한 대화의 전면 수정” 등. 

2)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1975): 예외적으로 두 차례에 걸친 대본 개작 명령을 받았습니다. 첫번째 개작명령은 대체로 저속한 대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두번째는 외설 장면 등을 중심으로 수정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3)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 초심에서 전면 개작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예륜은 22개의 수정 지시를 발했는데, 대체로 반사회적이거나 저속한 대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는 “데모” 운운이나, 군대를 비하하는 대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후 문공부는 2차 대본 심의에서 공윤 지적사항에 상당 부분을 추가한 별도의 개작 명령을 내렸습니다. 해당 서류에서 문공부는 “본 작품은 대학가의 무기력한 청춘을 그려 소재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있으므로 지적사항의 개작, 삭제는 물론 물의가 야기되지 않도록 제작시 유의할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4)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이장호, 1976): 예륜의 시나리오 초심에서 전면 개작 판정을 받았습니다. 예륜은 다음과 같이 그 사유를 설명했습니다. “본 작품은 전체적으로 젊은이의 좌절감과 허무감으로 충일된 내용으로 보다 밝고 건전한(특히 결론 부분) 방향으로 아래 지적사항을 참고 전면 개작함이 가하다고 사료됨.” 본편 검열에서 총 20개에 달하는 제한사항이 제시되었다. 상당한 양의 검열이 이루어졌다고 하겠습니다. 

5) <병태와 영자>(하길종, 1979): 1978년 5월, 시나리오 검열을 받고 제작신고를 마쳤으나, 1978년 12월 시나리오 검열을 다시 받았습니다. 제목을 <바보들의 행진 제2부>에서 <고래사냥>으로 바꾸고, 시나리오 내용이 상당 부분 고쳐진 이유로 보입니다. 공윤은 개작된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 <고래사냥>이라는 제목을 바꾸도록 지시했고, 시나리오 중에도 “고래”가 나오는 장면은 모두 삭제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고래사냥”에 대한 정권 당국의 불편함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6)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원세, 1981):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가혹한 검열이 있었던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감독 본인은 여덟 차례의 개작이 있었다고 증언하였으나, 검열서류에서는 3차에 달하는 자진 개작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 결과 영화의 무대가 도심지 무허가 건물에서 염전으로 바뀌었고, 1970년대 주택행정을 비롯한 사회비판적인 시각이 거세되어 가족 중심의 이야기로 수정되었다. 거기에 더해 두 씬 정도 있던 노사문제는 사라졌고, 아버지(김불이)의 자살의 원인이 정신착란으로 수정되었습니다. 
 
7) <바보선언>(이장호, 1983): 문공부는 제작신고 시 시나리오 검열을 통해 전면 재개작 명령을 두 번에 걸쳐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전체적으로 작품 줄거리가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제작사는 두 번에 걸친 재개작 대본을 제출하였고, 영화제목을 <어둠의 자식들 2부>에서 <바보선언>으로 개제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 외에도 이 컬렉션에는 영화별로 꽤 흥미로운 검열의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상시대 감독들에 대한 기존 연구가 상당 부분 축적된 것이 사실이나, 검열서류라는 또 다른 자료의 원천은 이 주제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 컬렉션이 70년대 한국영화사를 새롭게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컬렉션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해제)은 본 게시물 하단에 첨부된 [해제 다운로드]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 첨부된 해제 원고의 저작권은 필자와 한국영상자료원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제와 복제를 금합니다. 해제 글의 인용 시 필자명 및 출처를 명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기획 및 조사·연구: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참고자료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