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시대의 속살이 제대로 녹아들어 간 영화를 만나긴 의외로 그렇게 흔치 않다. 대부분의 상업, 장르 영화들은 배경이 되는 시대의 특정한 요소들을 일종의 개념의 형태로 서사에 반영하는 데 그치기 십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재현의 관습이라 해도 좋겠다. 예컨대 2018년에 연출한 일제강점기나 2002년 월드컵 열기는 상황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다. 연출 방향에 따라 제한된 방식으로 특정 시점을 구현한 상상의 공간인 셈이다.
내가 언급하고 싶은 영화의 시대 반영성은 약간 결이 다르다. 영화와 시대의 관계를 조망하기 위해선 감독(작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녹아 들어가고야 마는, 다큐멘터리적인 속성에 가까운 반영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선우 감독은 누가 뭐라 해도 9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단순하게는 90년대에 대부분의 영화를 찍었기에 그렇다. 이건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물질적으로 그의 필름들엔 90년대의 풍광들이 담겨 있다. 여기에 90년대를 압축할만한 통찰들이 자연스럽게 형식과 결합하는 순간 해당 영화는 시대의 지표로서 부상할 가능성을 얻는다. <
우묵배미의 사랑>은 그런 종류의 영화다. 이 애처롭고 따듯하며 답답한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바래기는커녕 외려 선명해지고 있다.
<우묵배미의 사랑>의 장르적 외형은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배일도(
박중훈)는 서울 변두리 우묵배미로 이사를 와 봉제공장에 취직한다. 작부 출신에 억센 성격의 아내(
유혜리)를 탐탁치 않아 했던 배일도는 함께 일하게 된 미싱공 공례(
최명길)에게 괜히 눈길이 간다. 폭력을 일삼는 남편에 지쳐가던 공례 역시 자신에게 호감을 보내는 일도에게 끌린다. 쉴 곳을 찾던 두 남녀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지만, 유부남, 유부녀라는 현실을 넘어서긴 어렵다. 대개 멜로드라마에서 핵심은 두 사람을 가로막는 장벽의 존재다. 흔한 통속극이 시대를 반영하는 지점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무엇을 장애로 설정하느냐는 시대의 욕망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에는 압축된 도시화, 근대화 과정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것들에 대한 흔적이 새겨져 있다. 소외된 하층민의 삶이 묻어있고 당대의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공간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무엇보다 남루한 일상의 틈새로부터 배어 나오는 진득한 점성이 묻어 있다. 아마도 스토리에 따른 주제를 (공식적으로) 정돈하자면 이와 같은 단어들이 나열될 것이다. 장선우 감독의 일관된 스타일 중 하나는 흑과 백, 희망과 좌절, 전통과 변화 등 양립하기 어려운 요소들을 대치시켜 극명한 콘트라스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는 제도, 시스템, 기득권의 압력에 대해 가라앉는 것과 저항하는 것, 두 가지 반응으로 화답한다. 하지만 <우묵배미의 사랑>이 시대를 반영한다면 그건 당대 변두리의 삶, 욕망, 사랑을 조망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중요하고 예리한 성찰이지만 그건 서사 차원에서 구성된 의식적인 메시지에 불과하다. 원작에서부터 묻어나온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영화가 진정 관객을 뒤흔드는 건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불편함이다. 일도와 공례의 멜로드라마는 전혀 애틋하지 않게 그려지지 않는다. 차라리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답답함과 처량함에 가깝다. 일도와 공례는 불륜이라는 일탈을 통해 탈주를 꿈꾸지만 우묵배미라는 공간은 두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얼핏 제도, 사회, 혹은 환경과 개인이 투쟁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영화는 철저하게 내부의 욕망이 충돌하는 모습으로 제한된다. 그 과정은 마치 폭력과 유머라는 장르적 쾌감과 에로티시즘으로 대표되는 성-정치학 사이를 넘나드는 영화의 모습과 닮았다. 관념과 통속, 희극과 비극, 연민과 냉소의 대비를 통해 관객을 불편함 한 가운데로 밀어 넣는 것. 장선우 영화의 미학은 거기서 출발하고 시대의 본질은 대개 그 틈새에 자주 맺힌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노동과 노동자의 남루함, 변두리의 피폐함을 리얼리즘적 전통에 입각해 그린다.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묵배미 역시 90년대를 관념적으로 압축한, 재현된 상상의 공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아마 지금 찍어도 우묵배미를 재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적 서사는 삶의 편린들과 마주할 때 생기와 부피를 얻는다. 예컨대 배일도의 어깨너머 기차가 보일 때, 일도가 공례와 함께 한 여관에서 구태여 양말을 빨 때 우리는 그때, 거기, 그 자리에 뒤엉켰던 일상의 반응들을 마주한다. 장선우 감독은 변두리의 삶에 피로한 일상에 분노하거나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는다. 대신 가만히 혹은 무력하게 바라본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슬쩍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카메라는 자연스레 시대와 눈높이를 맞춰 나간다. 숲 밖에서 숲을 보기보다 차라리 숲 안에서 나무를 보길 바라는 시선. 함께 뒤엉키고 고민하다가 끝내 통속의 한 가운데 털썩 주저앉아버린 감독의 선택은 <우묵배미의 사랑>을 진정한 의미에서 ‘90년대의 영화’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