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200살이 넘은 프랑켄슈타인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괴물이다. 여러 차례 자살시도를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더 이상 나이를 세지 않기로 한다. 아무런 감정도, 희로애락도 없이 동네슈퍼에서 일하며 하루하루 살아갈 뿐인 프랑켄에게 어느날, 작은 구슬 하나가 찾아온다......
연출의도. 자신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인간의 탐욕에 의해 기형적으로 탄생한 프랑켄슈타인...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인간이 상상해 낸 괴물 중 가장 불행한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니고, 살아있으면서도 자연스런 생명을 갖지 못하는 존재,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사람에 의해 버림받고 운명이 결정지어진 존재인 프랑켄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만의 의지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며 기쁨의 순간을 맞게 하고 싶었다.
원래의 문장은 이렇다. “기계적 장치에서 벗어난 현실의 모습은 여기에서 현실의 가장 인위적인 모습이 되었고, 또 직접적인 현실의 광경은 테크놀로지의 나라의 ‘푸른 꽃’, 즉 최후의 이상이 되었다” 발터 벤야민은 1936년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렇게 썼다. 적어도 이 영화의 제목은 내게 그렇게 읽힌다. 이 영화는 여기에 메리 셸리의 동화 ‘프랑켄슈타인’과 제임스 웨일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끌어안은 다음 팀 버튼의 <에드워드 가위 손>을 연상케 하는 영화적 계보를 더해서 자유자재의 리믹스 버전으로 만든다. 여기서 프랑켄슈타인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자기의 소멸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이다. 인간의 모습을 얻은 이 테크놀로지의 결정체가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상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유머를 빌려 변장한 (기계복제의 예술인 영화가 점점 상상을 잃어 가는 것에 대한) 동화적 알레고리의 비극적(-아이러니의) 비전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비전에 관한 영화이다. 그 비전은 크고 작은 원을 통해서 우리를 바라보거나, 우리를 이끌거나. 우리와 마주한다. 하나의 원, 혹은 다수의 원. 우리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으로 시작해서 동네의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공에 이끌려 만나게 되는 우주 바깥의 커다란 지구에 이르기까지 그 원형의 이미지는 이 영화의 상상력을 끌어내는 에너지이다. 원심력과 구심력의 세계. 결국 프랑켄슈타인은 그 원의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 참 그리고 이건 스포일러인데 이 영화에는 끝내 푸른 꽃이 나오지 않는다. - 정성일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