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등급정보
(1)
심의일자 1968-07-19
심의번호 방제4190호
관람등급 미성년자관람불가
상영시간 93분
개봉일자 1968-07-20
개봉극장
국도
수출현황
대만(68), 일본(68)
노트
■ 대만(1968)과 일본(1968)에 수출하여 역시 인기를 끌었다.
■ <미워도 다시 한번>은 2003년 '영화의 고향을 찾아서'사업에 대상작품으로 선정되어 촬영지인 강원도 동해시의 묵호등대 앞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 제작후일담
- 정소영 감독은 <미워도 다시한번 속>(1969), <미워도 다시한번 3편>(1970), <미워도 다시한번 대완결편>(1971), 이승연 주연의 <미워도 다시한번2002>(2001)을 만들었으며, 80년대 변장호 감독에 의해 두 차례<미워도 다시한번'80>(1980), <미워도 다시한번 제2부>(1981) 만들어졌다.
■‘신파’나 ‘최루성 멜로’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다소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작품은 관객의 감성 속 깊은 곳에 닿아 짙은 공감과 눈물을 끌어내기도 한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한국 신파・멜로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본처와 첩 간의 갈등이라는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어 사회성 드라마의 기초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악인이 없다. 슬픔은 실타래처럼 엉킨 각자의 사정 속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인간 사회는 이런 실타래를 만들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왔다. 이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을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이두용 영화감독, 영화천국 61호)
■ <미워도 다시 한번>과 1960년대 말 신파영화
한국영화에 있어서 60년대를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면 아마도 1960년대 후반은 거기에 포함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시기는 산업적, 기술적, 미학적 전환기에 해당한다. 1980년대 후반 코리안 뉴 웨이브가 등장하기까지, 20년 동안의 길고 긴 침체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전환은 불길한 것이었다. 컬러 시네마스코프의 전면적 등장으로 인한 제작비 상승과 기술적 부적응, 메이저 스튜디오들에 닥친 재정적 위기, '우수영화 제도'와 삼중의 검열장치를 통한 정권의 억압적인 개입, TV의 전국방송 시작과 레저문화의 발달로 인한 관객층의 이탈, 10여 년의 황금기를 거치면서도 자본축적을 할 수 없도록 만든, 난마처럼 얽힌 배급망, 이런 것들이 한국영화를 옥죄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만으로 1960년대 전반과 후반에 생산된 영화들이 보여주는 커다란 간극을 설명할 수는 없다. 특히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신파영화'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한국영화에 만연했던 좌절과 패배주의, 과도한 감상성(sentimentalism)은 이 시기 대중이 느꼈던 좌절과 절망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은 박정희식 근대화가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시도하다가 거센 저항에 직면했고 저임금, 저곡가 정책에 기반한 경공업 제품의 수출로 이룰 수 있는 경제성장 또한 한계를 드러냈다. 그 와중에 근대화의 성과를 독식한 일부 사람들이 쌓아올린 부와 그들만의 공간이었던 화려한 도시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에게 박탈감을 제공했다. 영화를 통해, 또 TV를 통해 그들만의 세계를 바라보던 농(어)촌의 사람들 또한 좌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구조화된 불평등과 빈부격차에서 오는 박탈감은 전후의 궁핍함이나 1960년대 초, 사회전반에 만연한 빈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확실히 1960년대 후반의 신파영화들은 <마부>나 <박서방> 같은 1960년대 초반 가족 멜로드라마들과는 다른, 절망적인 세계인식과 자학적인 문제 해결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히려 식민지 시대 신파와 훨씬 더 흡사한 세계인식이다. 그런 점에서 <미워도 다시 한번>을 필두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까지 쏟아져 나온 모성 멜로드라마들을 "복고풍의 신파 멜로"로 범주화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미혼모 혜영과 그녀의 아들 영신은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촌 마을의 게딱지같은 집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유치원 교사였던 그녀는 유부남의 아이를 낳은 탓에 영락(?)하여 바닷가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아들과의 삶을 지탱한다. 영신은 서울로 향하는 기차길 옆에 앉아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이를 보다 못한 혜영은 아이를 아버지에게 보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넓은 정원을 갖춘 이층집에서 맘껏 뛰노는 아이들과 능력있는 가부장, 그들의 현모양처로 구성된 아버지의 가족 안에, 영신의 자리는 없다. 그래서 영화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가부장이 저지른 과거의 실수 때문에 생긴 부산물 혜영과 영신을 이제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무리 슬프게 흐느낀다 하더라도 이 완벽한 부르주아 가족 안에 혜영과 영신이 끼어들어갈 틈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도, 그들을 바라보며 함께 눈물짓던 관객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상황을 눈물로써 감내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는커녕 견고한 세계로부터 점점 더 멀리 밀려나기만 했던 그 시절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1960년대 후반 신파영화에 투영된 것은 그저 흐느끼거나 죽는 것밖에는 다른 식의 해결이 불가능한, 닫혀 있는 세계에 대한 대중의 절망감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60년대 말이, 공식적으로는 1972년에 시작된 유신독재의 서막이었던 것처럼 이 무렵 스크린을 뒤덮기 시작했던 흐느낌은 1970년대 영화에서도 내내 지속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진, 「<미워도 다시 한번>과 1960년대 말 신파영화」, 김미현 책임편집, 『한국영화사: 개화기에서 개화기까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