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제대한 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사는 재벌집 아들 현태(이순재)는 하루하루를 무위도식하며 지낸다. 어느 날 그에게 자살한 전우 동호(김동훈)의 약혼녀 장숙(문희)이 찾아온다. 장숙은 동호의 자살 원인을 듣고 싶어 하나, 현태는 한사코 밝히기를 거부한다. 결벽증이 있던 동호를 증오한 현태가 그에게 술집 작부를 붙여 타락하게 만들었고, 동호는 술집 작부에게 남자가 치근대는 것을 보고 그 둘을 죽인 후 자신도 자살한 것이다. 현태가 넘겨준 유서를 통해 장숙은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고, 둘은 밤을 함께 보낸다. 미국으로 떠나기로 한 전날 장숙을 만나 책임 추궁을 받은 후 이상한 충동에 휩싸인 현태는 동호에 빙의라도 한 듯 자신과 평소 가까이 지내던 술집 작부 계양에게 치근덕대는 남자를 칼로 찌르고 감옥에 간다.
황순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독짓는 늙은이>(1969), <무녀도>(1971)와 함께 최하원 감독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이다. “한국적인 소외와 고독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를 화면을 통해서 파헤쳐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 비극의 기원으로 한국전쟁을 지목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국가폭력의 구조가 개인에게 남긴 상처의 내면을 탐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대 많은 문예영화들이 형식적인 실험을 통해 한국영화 표현의 경계를 넓히고자 노력했는데, 이 영화는 그러한 시도가 가장 성공적인 결과로 나타난 작품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인물의 복잡한 성격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대사, 혼란스럽고 황폐한 내면을 외화한 표현주의적인 화면 구성과 음악이 돋보인다. 한국영화가 동시대 유럽의 영화와 어떻게 공명하는 지를 보여주는, 한국영화의 다양한 흐름 중 모더니즘 계열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데뷔작일 것이다.
(출처 : 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