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 1939 년
극영화 미국 226분 1957-03-25 (개봉)
제작사
메트로-골드윈-메이어,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
감독
빅터 플레밍
출연
클락 게이블 , 비비안 리 , 레슬리 하워드 , 올리비아 드 해빌랜드 , 토마스 미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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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스칼렛(비비안 리)은 남부의 농장 타라를 소유한 집안의 장녀이다. 그녀는 애슐리(레슬리 하워드)를 사랑하지만 애슐리는 그녀의 친구인 멜라니(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와 결혼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칼렛은, 남북전쟁으로 애슐리가 전장으로 나가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그러나 남편이 전사하면서 스칼렛은 혼자 남게 되고 고향인 타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스칼렛은 자신에게 오랜 동안 구애해왔던 레트(클라크 게이블)와 재혼하지만 애슐리에 대한 미련 때문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한다. 결국 부부간의 불화가 심해지고 아이마저 사고로 사망하자 레트는 스칼렛을 떠나려 한다. 그제서야 스칼렛은 자신이 레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게 되지만 차마 레트를 잡지는 못한다. 홀로 타라에 남겨진 스칼렛은 언젠가는 레트를 되찾아 오리라 다짐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출처 : 오영숙(영화사연구자))

크레디트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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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독 :
    빅터 플레밍 (Victor Fleming)
  • 출연 :
    클락 게이블 레트 버틀러 역
    비비안 리 스칼렛 오하라 역
    레슬리 하워드 애슐리 윌키스 역
    올리비아 드 해빌랜드 멜라니 해밀튼 역
    토마스 미첼 제랄드 오하라 역
스태프
  • 각본
    : 시드니 하워드
  • 제작자
    : 데이비드 O. 셀즈닉
  • 촬영
    : 어네스트 핼러
  • 편집
    : 윌리암 카메론 멘지스
  • 음악
    : 맥스 스타이너
  • 미술
    : 라일 윌러
  • 기타스탭-sound re-recording mixer
    : 라버트 누드선
  • 기타스탭-chief model maker
    : 그레고리 제인
  • 기타스탭-matte artist
    : 매튜 유리치츠
  • 기타스탭-et Decoration by
    : 필 에브램슨
참여사
  • 제작사
    : 메트로-골드윈-메이어  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
  • 배급사
    :  피터팬 픽쳐스 (리마스터링 재개봉 배급 (2021))

상세정보

등급정보
(1) 심의일자 1995-04-19  심의번호 제95-132호  관람등급 중학생가  상영시간 232분  개봉일자 1995-05-05
(2) 심의일자 1982-03-19  관람등급 12세미만불가  상영시간 228분  개봉일자 1982-03-25
(3) 심의일자 1978-01-19  심의번호 외제1360호  관람등급 국민학생관람불가  상영시간 232분 
(4) 상영시간 226분  개봉일자 1957-03-25 (수도극장, 국도극장(동시개봉))
(5) 상영시간 230분  개봉일자 2021-04-28 (리마스터링 재개봉 (2021))
다른제목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극장 개봉)
개봉극장
國都劇場(1982년 개봉극장), 명보, 신영 외(1995년 개봉극장)
노트
1957년에 수도영화사가 수입하여 수도극장과 국도극장에서 동시 개봉하였다. 그러나 개봉되기 오래 전부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관한 입소문이 상당했다. 영화 제작 과정은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지고 있었다. 1930년대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제작비 425만 달러, 12명의 참여 작가와 3명의 감독(조지 쿠커, 샘 우드, 빅터 플레밍)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거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은 비비안 리는 1,400명의 여배우의 오디션을 거쳐 선발되었다는 식의 뉴스가 화제가 되곤 했다.
소설의 인기 자체가 상당했다. 마가렛트 미첼의 원작은 “4천만인의 독자와 49개 국어를 이미 차지한 출판사상 경이의 소설!”(일간지에 실린 서적 홍보문구)이었다. 한국에서도 1953년에 원작 소설이 번역 출판되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1956년 6월에는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극예술협회의 창립 기념으로 공연이 올라가기도 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그 인기는 소설을 뛰어넘었다. 국도극장만 하더라도 46일 동안 장기 상영했고, 관객수 8만 명이 넘어 그해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최고의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주석 1). 그러나 당해 최고의 흥행 성적에도 불구하고 영화사는 수습하기 어려운 적자를 내었다. 수입가격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외화의 평균 수입가격은 5천불에서 8천불 사이였고 1만불 정도면 “좀 쓸만한” 작품을 수입할 수 있는 높은 가격에 속했다(주석 2). 5만 4천불에 달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수입료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한편으론 이 영화를 두고 검열의 일관성 여부를 묻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가 즐비한 광경 때문에 한국의 관객에게 염전(厭戰) 사상을 고취시켜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열에 통과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서울대의 의과대학을 비롯한 몇몇 학교에서 80환의 관람료를 받고 영화를 상영한 사실도 문제가 되었다. 문교부의 검열도 받지 않은 영화를 흥행장이 아닌 학교에서 공공연한 입장료까지 받고 상영한 것은 불법이라는 것인데(주석 3), 문교부 당국자는 이 사안을 두고 “필름을 압수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주석 4)라고 까지 말하며 강경한 태도를 표했다. 결국 서울시 경찰 당국이 진상 조사에 착수하여, 서울대 관계자들을 문초하고 치안 재판에 회부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1. "관객 동원 수에서 본 국내외 영화 베스트 텐", 서울신문, 1957.12.29(4)
2. "관객수 제작(수입)비 세율로 본 영화기업의 현황", 서울신문, 1958.03.30(4)
3. "서울대 관계자 경찰에서 문초 / 불법영화 상영문제", 조선일보, 1956.11.10(2)
4. "추천도 안 된 영화 학교에서 상영 / 문제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조선일보, 1956.11.09(석3)

- 오영숙(영화사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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