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삿갓 쓴 장고 최영철, 1985

by.허경(정발산 영화거구) 2014-08-14조회 6,220

“요즘 우리나라에 웨스턴 붐이 일고 있잖아. 야 일본에 <요짐보>라는 죽여주는 영화가 있는데 이런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대충하나 만들어 볼텨?”
이탈리아의 어떤 영화제작자는 두 패의 악인들이 대립하는 어느 장소에 홀연히 나타난, 선인인지 악인인지 하여간 건달 같은 작자가 문제를 해결하고 멋지게 사라지는 이 이야기에 무척 끌린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세르지오 코부치라는 감독을 불러들여 시나리오도 없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완전한 무명배우였던 프랑코 네로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고, 관을 끌고 다니는 남자, 깜짝 등장하는 무기, 황당하도록 화끈한 결말 등 당대의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들과 함께 장르의 클리셰라고 불릴 만큼 후대에 반복되는 요소들을 정립했던 이 영화는 1966년에 제작된 <쟝고> 다. 최근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장르를 아예 통째로 떠다가 본인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재해석해 <쟝고 : 분노의 추격자>를 만들기도 했다.
 
<쟝고>(1966)와 <삿갓 쓴 장고>(1985)
<쟝고>(1966)와 <삿갓 쓴 장고>(1985)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85년.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영화 강국이라고는 부르기는 아직 어려웠던 한 나라에 이 비슷한 생각을 한 제작자가 또 있었다. 그는 많은 연출 경험으로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한 감독을 기용했다. 이미 34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또 반 이상의 각본을 직접 쓴 사람이었다. <대근이가 왔소> <특명 8호> <맨발로 왔다> 같은 다수의 다찌마리 영화로 액션 연출에 경험이 많았고 < A*P*E 킹콩의 대역습> 같은 영화로 미국과 공동작업 경험마저 있어 글로벌 인재로 손색이 없었다. 최영철 감독은 자작 시나리오로 배우를 캐스팅했고, 영화는 공개되었다. 천인공노할 사기꾼들을 정의로운 두 사내가 쳐부순다는 내용의 <삿갓 쓴 장고>는 대충 이렇게 제작되지 않았을까?

삐용삐용B무비의 마지막 원고를 어떤 영화로 해야 할지 나름대로 고민했다. 사실 이 분야가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겠지만, 영상자료원 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가 정말 많았다. 필름으로는 존재하지만 다른 포맷으로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녀>나 <관속의 드라큐라> 같은 영화를 꼭 다루고 싶었다. 앞으로 더 나아지리라 믿는다.) 결국 고민은 마지막 회이니, B스러운 재미가 있으면서도 괜찮은 영화를 소개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갈 데까지 간 영화를 소개할 것이냐 하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삿갓 쓴 장고>는 후자에 포함하는 영화다. 몇 편의 허탈한 영화를 놓고 고민을 하였으나 이만한 것은 없었다. <삿갓 쓴 장고>와 함께 최종후보까지 올라간 <햄버거 쟈니>는 주인공 쟈니 윤의 카리스마가 김인문-한무의 협공을 이기지 못해 탈락하였다.
 
장고와 소림사의 만남
장고와 소림사의 만남

영화가 시작되면 한 사내가 관을 끌고 나타난다. 승마 부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리고 판초를 걸치고 카우보이모자를 쓴 그는 터덜터덜 밤길을 걷고 있다. 그때, 반대편에서 한 사내가 또! 관을 끌고 나타난다. 뭔가 비슷한 듯한 복장이지만 삿갓을 쓰고 거적때기를 어깨에 얹은, 비닐 장화를 신은 사내.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삿갓: 너 뭐야. 빨갱이가 아니면 신분을 밝혀 신분을.
카우보이모자: 내 이름은... 장고. 성은 장 씨고 이름은 높을 고자여. 그러니께 장하고도 고. 이제 알았능가. 근데 넌 뭐여.
삿갓: 난 소림사다. 성은 소씨고 이름은 임할 림에 스승 사. 고로 소 하고도 림사. 소림사. 
장고(김인문)와 소림사(이승현)의 첫 만남이다. 음악이나 문학, 그리고 영화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창작과 감상에 모두 작용하는 예술들이 있다. 앞서도 몇 번 말했듯, ‘시작’은 그 미메시스의 시간에 진입하는 관문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이렇듯 다짜고짜 전라도 사투리로 한자 풀이를 하며 관객을 인도한다. 이들이 통성명하는 계기도 엉뚱하다. 그냥 지나가고 있는 장고에게 소림사는 토마토인지 핏덩어리인지 뭔지 모를 것을 집어던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림사는 그때 마네킹을 해체하고 있었다. 어쨌든 화가 난 두 사람은 통성명 이후 시비가 붙는다.

장고: 근디 내가 니놈의 관상을 보니께 영락없는 쾡이여 쾡이! 명심보감에 대장부는 당용인이언정 무위인소용이니라 하였거늘...
소림사: 대장부는 마땅히 남을 용서할지언정 남의 용서를 받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이지?
장고: 허!
소림사: 너도 글깨나 아는 모양인데 내가 딴 건 몰라도 명심보감 하나만은 줄줄 외고 있지. 후후
장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부해서 남 주는 거 아니니께 참말로 다행일세. 하지만 네놈은 푸줏간 신세도 되지 못하는 쾡이 신세여 쾡이!
소림사: 니놈은 너구리 신세고 너구리!
장고: 너구...!?
 
명심보감
명심보감

웬 뜬금없는 명심보감 타령이며 쾡이, 너구리 타령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이들의 싸움을 이해해보려 해도, 영화 시작 5분 내에 펼쳐진 일이라 물리적인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뒤에 어떤 전사가 나오느냐? 그런 거 없다. 그냥... 싸운다. 게다가 이놈의 명심보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하는데 이들의 삶의 지침 같은 것이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 보도록 노력을 해보자. 하지만 가슴 한 켠에 늘 육법전서를 넣어놓고 언제든 꺼내어 읽는 장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물론 시골에서 경찰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것이라는 이유는 있다. 경찰 시험공부를 하는 것과 육법전서를 늘 품에 담고 다니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30살의 장고는(당시 김인문 씨 나이 46세) 그렇게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경찰이 되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장고. 서울에서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관 같이 생긴 궤짝에 새끼돼지 수십 마리를 데리고 왔으나, 악당 두꺼비(한무) 일파의 사기에 당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한 편 장고와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교통경찰이 되기 위해 관 같이 생긴 궤짝에 강아지를 잔뜩 데리고 올라온 소림사 역시 두꺼비 일파에게 걸려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들은 우연히 만나 시비가 붙었던 탓에, 서로가 상황이 이렇게 만들었다 생각하고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그러던 중 장고는 무일푼인 상황이라 한 레스토랑에 웨이터로 취직을 하고, 두꺼비 일당을 찾아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우연히 부모의 원수가 두꺼비 일파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 장고는 그들을 추적하던 도중 필름을 입수하게 된다. 이것은 국제 마약상의 루트를 정리한 필름이었다. 한편 소림사 역시 일자리를 찾던 도중 우연히 장고가 일하는 레스토랑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어 함께 일하며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나 두꺼비는 소림사에게 접근하여 필름을 훔쳐오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유혹하게 되고 소림사는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는데...

머릿속에서 내용을 끼워 맞추어 정리하긴 했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들이 끌고 다니는 관 속에는 새끼 돼지들과 강아지가 들어 있었고, 장고는 육법전서를 들고 다닌다. 소림사는 부모님이 뺑소니로 돌아가셔서 교통경찰이 꿈이다. 그러나 공부 밑천이었던 강아지를 두꺼비에게 다 뺏기고 ‘세계교통정리 선수권대회에 출전해서 챔피언도 따먹으려 했던 꿈’이 좌절되어 절망한다. (이게 내가 정리해서 쓴 것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다. ‘뺑소니 없는 명랑 교통질서 확립’이라는 대사는 내가 웃기려고 쓴 거로 생각할 것 같아 아예 뺐다.) 만약에 장고가 칼이라도 맞았는데 그 자리에 육법전서가 있어서 목숨을 구했다던가, 소림사가 교통정리 스킬을 발휘해 위험에서 벗어난다든가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런 거 없다. 이들이 아는 건 명심보감 뿐이다. 

자꾸 장고와 소림사 얘기만 하니까 악당들은 좀 악당다운가 보다 싶으실 수도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 악당 중간보스 두꺼비도 사연이 있다. 시골에서 상경해 돈을 벌어 금의환향해 두 동생들과 행복하게 살려 했지만 ‘여자 좋아하다가’ 결국 악의 길로 빠져든 안타까운 인물인 것이다.(이것도 대사를 통해 스스로 도출한 결론이다.) 게다가 그는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조직원들과 함께 ‘두꺼비 합창단’을 만들어 언젠가는 가수로 데뷔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와 함께하는 부하인 빈대, 벼룩, 모기, 파리 등등이 합창단의 멤버다. 그는 아지트에서 부하들과 함께 ‘두란두란’(아마도 80년대 보이그룹으로 유명했던 ‘듀란듀란’을 지칭하는 모양이다.)을 들으며 미래의 자기 모습을 그리곤 한다. 
 
구수한 사투리
구수한 사투리

이 정도만 설명해도 이게 뭐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가장 충격적인 연출은 아직 말도 안 꺼냈다. 장고는 악당들의 끊임없는 음모와 협박에 필름을 돌려주기로 한다. 두꺼비 조직의 보스 김달성(김기주)은 해변가에 가면 외국인 여자가 한 명 있을 것이니 그녀에게 필름을 주고 전달했다는 표식으로 장미를 받아오라고 말한다. 해변으로 간 장고, 과연 금발의 외국 여인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서 있다. 할 일이 있어 오기는 했지만 외국인은 어색한지라 “헤...헬로” 하고 말을 거니, 그 외국인 여인은 

“아따 이제 왔능가. 싸게싸게 필름 내놓더라고!”

라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대꾸한다. 이에 놀란 장고가 아니 어째서 사투리를... 하고 묻자 금발의 백인 여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야 내 고향이 전라동께 그라지. 어여 필름이나 내놔야?”라며 구수하게 말을 한다. 로버트 할리도 있는데 이게 무슨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악당의 함정이었다. 가까스로 아수라장을 빠져나온 장고는 결국 그와의 마지막 대결을 준비하게 되는데. 
 
엿장수 가위
엿장수 가위

최종 보스 김달성과 장고의 대결은 영화 역사상 가장 성의 없는 대결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김달성은 웬일인지 미국식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나타나 장고를 위협한다. 그를 위협하는 무기는 총? 아니다. 칼? 그것도 아니다. 그럼 하다못해 야구방망이? 역시 아니다. 엿장수 가위다. 이유? 없다. 왜 두꺼비파 최종보스 김달성이 살상무기로 엿장수 가위를 사용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이에 맞서는 장고의 밥주걱은 대사로 처리를 해주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림사는 영화 중간에 악당 패거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면서 ‘엄마의 유물’이라고 쓰여 있는 빨랫방망이를 선보인다.)

김달성: 아니 밥주걱?
장고: 그래 너는 악당 베르나도 산초가 아니라 국산 놀부니께!!
김달성: 놀부...??
장고: 그래 놀부가 싫으면 어서 이 오동나무 코트를 입어!
끌고 온 관을 가리키며 ‘오동나무 코트’를 입으라 불호령을 내리는 장고의 굽히지 않는 모습에 응원을 하고 있자니 조금 머리가 아파오는데, 대결을 마치고 부모님 운운하며 앞으로 착실하게 살라고 일장연설 하는 장고의 뒤로 구슬프게 흐르는 ‘어머님 은혜’를 듣고 있으면 결국 효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차오르며 결국 다른 생각은 모두 잊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후다닥 스크린에 차오르는 엔딩 크레딧. 이상하게 슬픈 크레딧이다. 몇 번을 돌려봐도, 감독 이름이 안 나온다... 한국에도 ‘알란 스미시’ 같은 이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알란 스미시’는 미국에서 제작자의 간섭 혹은 스태프와의 불화 등 영화가 의도대로 제작되지 않아 연출자가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 거부할 때 대신 올리는 이름이다. 대표작으로는 <헬레이저4>가 있다.)
 
Directed by Alan Smithee
Directed by Alan Smithee

최영철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주로 액션영화에 치중되어 있다. 간간이 다른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곤 했는데, 이번에 소개한 <삿갓 쓴 장고>를 포함해 , <백백교>와 같은 괴작들이 있다. 특히 < A*P*E 킹콩의 대역습>은 이 분야에서 국내외 모두 알아주는 작품이라 굳이 소개하지 않았을 정도다. 그래도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으로 꾸준히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인데, 사업 파트너의 배신으로 수익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92년 이후 작품 활동이 중단되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김인문
이승현
한무

감독: 최영철
각본: 최영철

개봉극장: 명보(서울)
관람인원: 573명


삿갓 쓴 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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