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는 <길소뜸>에서 임권택과 12년 만에 새로운 영화를 찍고 난 후 연달아 함께 작업했다. <티켓>(1986)은 자기 분야에서 거의 절정에 이른 두 명의 대가가 펼쳐내는 일종의 세션과도 같은 영화다. 말 그대로 세션. 그들에게 시나리오는 있었지만 그것이 이루어져나가는 대로 그저 내버려둔 상태. 그들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서로를 믿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자유자재로 김지미가 그저 자기가 원하는 순간에 손을 들어 올리고 혹은 때로 자기 주변에 놓인 소도구들을 그렇게 건드렸을 리가 없다. 임권택은 즉흥연기를 믿지 않는 연출자다. 하지만 분명히 여기서 어떤 대목들은 어떤 연기 지시도 없이 그저 김지미의 퍼포먼스를 지켜보기만 했을 것이다. 김지미는 어떤 순간 동선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그것이 연기의 문제였을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임권택은 이 영화가 기나긴 삶의 막장에 이른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강원도 속초에 자리한 허름한 지하 다방을 운영하는 마담 민지숙은 계속 추락하면서 살아왔고 이제 더 추락할 곳이 남아 있지 않다. 그때 김지미는 어느 순간 감정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자기 이야기임을 문득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자기가 연기하는 인물의 감정을 느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느낌의 리듬을 따라간다. 물론 임권택은 그걸 음미하듯이 곁에서 함께 삶을 연주한다. 단 한마디로 위대한 세션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