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준비 없이 <길소뜸>(임권택, 1985)을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김지미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 좀 더 정확하게 김지미가 입을 여는 순간, 어떤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건 우리가 김지미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본 순간이기 때문이다. 김지미는 후시녹음 시대의 배우였다. 분리된 얼굴과 목소리. 그런 다음 영화라는 조합. 김지미에 대해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김지미는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쇳소리. 약간 철판을 스치는 것 같은 낮은 허스키. 무언가 어긋나버린 듯한 얼굴과 목소리. 임권택은 여기서 긴 세상을 살아온 한 여자, 화영의 몸이 견뎌온 세월이 그 얼굴 위의 주름과 그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것만 같은 목소리에서 보이기를 원했다. 그렇게 카메라 앞에 선 김지미. 임권택은 김지미에게 어떤 과장도 요구하지 않았다. 거의 변화가 없는 목소리, 분명히 아들인데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소름 끼칠 만큼 냉랭하게 “정말 제 아들인지 확인할 수 있나요” 라고 유전자 검식을 한 의사에게 물어볼 때 김지미의 목소리는 분명히 세월의 심연을 건드리고 있었다. <길소뜸>을 보고 나면 오히려 줄거리는 잠시 옆으로 미루어놓고 김지미라는 한 배우의 리얼리티를 담은 영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동시에 이미지를 찢어버리고 그 사이로 자기의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