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났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뤼미에르 형제에게서 시작한 영화를 다시 한 번 시작하게 하였다. 내가 조금만 이야기를 우회하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멜리에스의 부친은 그가 신발 사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단지 소망이 아니라 에콜 데 보자르 학교를 다니면서 진지하게 수업을 받았다. 그러자 부친은 경제적 지원을 중단했다. 사태는 좀 엉뚱하게 흘러갔다. 멜리에스는 사업을 배우라고 보낸 런던에서 무대 마술사들에게 매혹되었다. 마법 수업을 받았고 자신의 독창적인 레퍼토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은 상자 속에 들어간 남자가 목이 잘린 채 계속 수다를 늘어놓는 퍼포먼스였다.
독창적인 마법사, 영화에 뛰어들다
문헌에 따르면 조르주 멜리에스는 독창적인 마법사였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찾았다. 어떻게 알았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멜리에스는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공식 상영하기 전날인 1895년 12월 27일 저녁 리허설을 보러 갔다. 아마 새로운 마법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신기한 발명품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뤼미에르 형제에게 촬영 장비를 1만 프랑(옛 프랑스 화폐 단위)에 사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거절했다. 멜리에스는 포기하지 않고 런던까지 가서 에디슨 컴퍼니의 카메라를 구입한 다음 변형하여 1896년 5월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석 달 뒤 몽퇴이유에 스튜디오를 차린 멜리에스는 마법사 일을 그만두고 영화 제작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뤼미에르 형제처럼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찍었지만 멜리에스를 매혹시킨 것은 (사실상 기술적 에러에 가까운) 특수효과가 만들어내는 마법적 효과였다. 그러면서 멜리에스는 자신의 작업에 야심적인 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를 실내로 끌어들였고 촬영을 위한 무대는 점점 스타일을 갖추기 시작했다. 1902년 5월 멜리에스는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와 H. G. 웰즈의 「달의 첫 방문자」를 느슨하게 각색해 <달세계 여행 Le Voyage Dans la Lune>을 촬영했다. 이 촬영을 위해 시나리오를 썼고, 13개의 거대한 무대 디자인을 했으며, 1만 프랑을 들여 이례적으로 석 달 동안 촬영했다. 이 영화의 주연은 조르주 멜리에스 자신이 연기했다. 촬영이 끝난 영화의 필름 길이는 무려 260m에 이르렀다. (상영 시간을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초당 몇 프레임으로 상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14프레임으로는 16분, 24프레임으로는 9분이 된다.) 무엇보다 <달세계 여행>을 오늘날 다시 보면 이제까지 고정되어 멈춰 있던 카메라가 트래킹 운동을 하는 순간 마침내 영화가 운동을 시작한 순간과 마주한다는 흥분에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쇼크를 준다.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총천연색 영화의 탄생
<달세계 여행>은 흑백 판본과 프레임 단위로 일일이 손으로 색칠을 한 컬러 판본이 있다. 그리고 단언컨대 <달세계 여행> 컬러 판본은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총천연색 영화 중 한 편이다. 그렇게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계보와 결별하고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을 선언했다. 나는 이 두 개의 시작을 좀 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영화사 안에서 멜리에스의 영화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 사람은 장-뤽 고다르다. 그는 <중국 여인 La Chinoise>(1968)에서 장 피에르 레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뤼미에르가 화가라면 멜리에스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지. 나는 멜리에스를 브레히트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해.”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세기말 풍경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판타지라면, 멜리에스는 세기말 관객들의 판타지를 찍은 다큐멘터리라는 고다르의 변증법적 역전은 우리에게 두 개의 시작에 대해 어떤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이 연재는 다시 한 번 시작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