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촬영 현장에서 안성기 선배에게 백 번도 넘게 인사를 드렸지만 긴 인터뷰를 해본 것은 단지 두 번뿐이다. 첫 번째는 1990년이었고 두 번째는 2015년이었다. 그때 내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그 두 번의 인터뷰 사이에서 시간적 간극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배우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배우들은 영화마다 다른 연기를 보여주고 다른 감독들과 일을 할 때마다 다른 인물이 된다. 물론 안성기도 다른 연기를 보여주고 다른 인물이 된다. 그러나 매번 안성기는 그 무언가를 거기에 지워지지 않게, 지울 수 없게, 지워지지 않은 채로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무언가’를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배우들은 픽션 안에 들어가서 현실적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를테면 <괴물>의 송강호, <밀양>의 전도연. 반대로 안성기는 현실적 존재감을 느껴보기 위해서 픽션을 이용한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의 덕배, <안개마을>(임권택, 1982)의 깨철,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의 백호빈, <인정사정 볼것 없다>(이명세, 1999)의 장성민, <라디오스타>(이준익, 2006)의 박민수, <부러진 화살>(정지영, 2011)의 김경호. 그래서 배우들이 이야기 안의 인물이 되고자 자기에게 맞는 가면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면 안성기는 가면 그 자체인 그 자신이 인물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가면을 찡그린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안성기가 모든 역할에서 성공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과도하게 찡그려 가면 자체가 부서져버렸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성공시대>(장선우, 1988)의 김판촉, <성 리수일뎐>(이석기, 1987)의 리수일, <흑수선>(배창호, 2001)의 황석,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의 자운, <사냥>(이우철, 2015)의 문기성.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 순간 가면이 벗겨졌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대신 그 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공백 그 자체라는 것이다. 안성기는 실패할 때 증거를 남기는 대신 텅 빈 공허감을 안겨준 다음 유유히 떠난다. 이러한 해결책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란 힘든 일이다. 게다가 항상 같은 방법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안성기는 영화 안에서 인물과 가면 사이의 일치와 분리라는 서로 대립하는 모순된 자리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것을 <축제>(임권택, 1996)에서 보았다. 누군가 내게 안성기의 연기는 무엇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이 영화로 대답을 대신할 것이다.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모친의 제사를 치르는 소설가 이준섭을 연기하면서 안성기는 감정적으로 거의 동요하지 않는 가면을 쓴다. 그런 다음 그걸 일그러뜨리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면 뒤의 (숨겨진) 얼굴이 열심히 연기를 하는 것만 같은 순간들이 나타난다. 그때마다 가면과 얼굴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틈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나는 <축제>에서 안성기의 연기가 한국영화사에서 하나의 기적과 같은 경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안성기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반대로 수없이 다른 가면을 바꿔 쓰면서 가면이 점점 얇아져 갔고 그 과정에서 가면에 표정이 비쳐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게다가 그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를테면 그걸 잘할 수 있게 되자 마치 매너리즘을 겁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킬리만자로>(오승욱, 2000)에서 그것을 의식적으로 연기하고 있다. 여기서 안성기는 연기하는 자신을 연기한다. 이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안성기의 가면은 충실한 재현으로 향하는 리얼리즘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위에 무언가를 덧칠해놓은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나는 내적 형식, 이라는 투의 무책임한 단어를 꺼내 들고 싶지 않다. 반대로 그 가면은 어떤 사실 앞에서 대부분의 연기가 회화가 느껴보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할 때 마치 조각이 그 앞에서 견뎌내고 있는 것과 같은 존재로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잠자는 남자 眠る男>(오구리 고헤이, 1996)의 쿠지, 그리고 <화장>(임권택, 2014)의 오상무와 같은 가면을 달리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나는 그걸 사실적 진리의 가면이라고 부르고 싶다. 안성기는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