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사실을 먼저 환기해야 할 것 같다. 로베르트 비네의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첫 번째 표현주의 영화가 아니다. 순서대로 따라가야 한다면 1913년 파울 베게너의 <
프라하의 학생>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미 이 영화에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 보여줄 거의 모든 것을 선취하고 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소설과 <파우스트>를 느슨하게 각색한 시나리오, 도플갱어의 등장,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명암대조법(chiaroscuro) 촬영, 환상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오가는 진행. 그러면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왜 영화사의 순간을 건너뛰었나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독일 영화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표현주의에 대해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칸딘스키, 파울 클레, 프란츠 마르크,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것이다. 파울 힌데미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물론 그 배경에는 저 멀리는 독일 낭만주의가 자리 잡고 있고, 배경에는 바이마르 문화가 음산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몇 번이고 영화사의 섬광 같은 순간으로 뛰어들고 싶다고 말했다. 내 목표는 체계적인 영화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사에는 가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전혀 훌륭하지 않다. 이 영화를 연출한 로베르트 비네는 영화사에서 이 영화 단 한편으로만 기억된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영화사의 섬광이 되었다. 일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온 칼 마이어와 한스 야노비츠는 두 사람은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썼다.
모두 6개의 막(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공원 벤치에서 시작한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마지막에 스포일러가 있다. 원치 않는다면 여기서 다음 문단으로 건너뛰기를 바란다) 한 청년이 곁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그 앞을 지나간 여인이 자신의 약혼녀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긴 이야기를 한다. 청년과 그의 친구는 약혼녀를 사이에 놓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중인데 마을에 칼리가리 박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조수 체자레를 이끌고 나타난다. 칼리가리 박사는 체자레에게 최면을 걸어서 예언을 요구한다. 체자레가 죽음을 예언하면 다음 날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해서 발견된다. 청년은 이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칼리가리 박사와 조수 체자레를 뒤쫓는다, 그리고 그들의 은신처인 정신병원에까지 따라간다. 거기서 알게 되는 건 청년이 정신병원 환자라는 사실이다.
이 각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독일 영화사들의 경제적 연합인 Ufa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영화사 데클라(Decla)를 운영하던 에리히 포머였다. 그는 다른 영화사들과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원했다. 그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각본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에리히 포머와 두 명의 시나리오 작가 사이에서 의견 일치를 본 것은 아니다. 제작자 에리히 포머는 돈을 벌기를 기대했고, 칼 마이어와 한스 야노비츠는 자신들이 예술적인 무언가를 썼다고 믿었다. 이 시나리오의 세트를 지어야 했고, 그때 프라하에서 온 세트 디자이너 알프레드 쿠빈에게 제안했을 때 관심을 보였다. 이 도시에서 공무원 프란츠 카프카가 퇴근하면 밤마다 소설을 쓰고 있었다는 생각을 함께 떠올려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에리히 포머가 제작비를 받아들고 일부만 세트를 짓고 배경은 그림을 그려서 대신 하자는 제안을 했다. 회의는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프리츠 랑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찍었을 것이다. 프리츠 랑은 이 영화의 테이블에서 빠져나갔다, 영화사의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다. 배경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슈트룸' 그룹의 헤르만 바름이 가세하였다. 혼자서 그 많은 벽화(!)를 그릴 수는 없었다. 그의 동료인 발터 뢰리그와 발터 라이만이 함께 작업하였다. 그들은 이 세트를 그리면서 자신들의 '표현주의' 그림 속을 몽환적인 시나리오의 영화가 산책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그린 그림은 미술관의 벽에 걸려서 멈춰 서 있었다. 이제 그림 속을 미친 영화가 최면에 빠져 유괴를 하고 살인을 저지르면서 홀린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할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위한 세트 제작을 준비하면서 참고한 영화는 아벨 강스가 1915년에 연출한 실험영화 <튀브 박사의 광기>였다. 아벨 강스는 이 영화에서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이용한 '요술 거울의 방' 효과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알프레드 쿠빈과 헤르만 바름은 렌즈에 의한 이미지 왜곡을 만들어내는 대신 세트 자체를 왜곡해서 디자인 하고 그걸 바탕으로 벽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제작비를 절감하려는 에리히 포머의 결정과 그 한계 안에서 세트를 자신들의 인스톨레이션(이 도착도 하기 전에 그런 미술관)처럼 만들어버린 세트 디자인 팀은 그저 불합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차원으로 갑자기 도약시켰다. 이제까지 꿈속에서 만나는 불안과 두려움은 문장 속에 있거나 그림을 바라보면서 상상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이미지가 펼쳐지고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관객들이 본 것은 기기 묘묘한 이야기, 액자 형식의 서사. 빛과 그림자. 굴곡지어지고 왜곡된 세트,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배우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영화가 갑자기 내면의 형상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제까지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서 멈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영혼의 삶에까지 밀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을까. 영화는 역사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멈추지 않으면 다음에는 현실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찍고 있을 때 빈에 있던 프로이트는 "(...) 어떤 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이 결코 살아있는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경우"(정잔진 옮김) 에 관해서 정식화시킨 <친숙한 낯섦(Das Unheimliche, Uncanny)>를 발표했다. 한 가지를 더 부언해야 할 것 같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해 국가방위군의 명령으로 독일 노동자당을 감시하기 위해 위장 가입하였다. 독일 노동자당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되었다. 간단하게 줄여 부르는 말. 나치 정당.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사의 순간은 역사의 순간과 헤어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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