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샤 기트리가 위대한 19세기의 예술가들을 찍은 다큐멘터리 <우리 집의 그들>을 공개하다  1915년 11월 22일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9-08-20조회 11,038

사샤 기트리가 영화에 도착했다.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샤 기트리는 프랑스영화의 위대한 이름이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시네필들에게 잘 언급되지 않는 이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시네아스트들의 연옥(煉獄)의 왕자라고 불린 사람. 오손 웰즈, 알랭 레네, 프랑소와 트뤼포가 한결 같이 찬사를 바쳤던 감독. 아마 나는 이 연재를 하면서 몇 번이고 그를 이 자리에 다시 초대할 것이다.
 
사사 기트리는 영화가 발명도 되기 전인 1885년 2월 21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연극을 했고, 그래서 태어나서 무대를 바라보면서 자라났다. 5살에 아버지의 극단에서 무대에 데뷔하였고, 그 무대에서 단지 귀여운 소년이 아니라 그가 타고난 연기자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모는 사샤 기트리가 좋은 교육을 받기 원했지만 16살에 빨리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는 단지 연기만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다음 희곡을 직접 쓰기 시작했다. 사사 기트리는 자기가 쓴 모든 희곡. 모든 시나리오에 배우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주연으로 배역을 맡았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위해 쓴 대본들. 자신이 쓴 희곡으로 첫 무대에 오른 작품은 <페이지>였다. 1902년 4월 15일 마튀랭스 극단의 공연이었다. 멜리에스의 공상과학영화 <달에로의 여행>이 상영된 해이다. 그런 다음 그는 아버지의 극단인 르네상스 극단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사샤 기트리는 천재적인 연기와 대중적으로 성공한 대본, 그리고 몰리에르의 전통을 이어받은 연출이 파리의 주목을 끌면서 예술가들의 사교계에서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하나의 세기가 끝나가면서 새로운 예술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사샤 기트리>

사샤 기트리에게서 희곡 작가이자 무대 연출가로서의 경력의 절정은 아마도 1910년대였을 것이다. 1912년에 <야간 간병인>과 <멋진 결혼식>, <스코틀랜드 순례자>를 한 번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1914년 <두 개의 식탁>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사샤 기트리는 이미 모두가 존경할만한 예술가의 자리에 올랐다. 

이상하게도 연극에 몰두하던 사샤 기트리가 어떤 계기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때 연극계의 사람들은 영화가 자신들의 예술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으며, 대중 관객들을 뺏어가는 적이라고 공격했으며, 애써 영화는 천박한 구경거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샤 기트리가 그때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분명히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하나의 가정. 아마도, 아마도 그때 사샤 기트리는 연극무대를 찍은 ‘필름 다르’ 영화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가 보여주는 어떤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 집의 그들 - 클로드 모네>

사샤 기트리는 이상한 영화를 찍었다. 이미 초기 영화의 편집이 하나의 규범이 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정확하게 동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 태도에서) 마치 뤼미에르처럼 영화를 찍었다. 그 영화가 <우리 집의 그들>이다. 두 가지 놀라운 점. 첫 번째, 사샤 가트리는 19세기의 위대한 예술가들을 자기 카메라 앞에 세웠다. 누구보다도 위대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그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조각을 다듬는다. 인상주의 풍경화의 대가 클로드 모네가 수련 앞에서 자기 캔버스에 무언가를 그리는 중이다. 파리의 풍경을 담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캔버스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그때 그 곁에 아직 21살이었던 그의 아들(이자 훗날의 프랑스 영화의 대가) 장 르누아르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쾌하게 웃는다.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쓴 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책상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 출연한 20세기 초 프랑스 연극무대의 전설인 사라 베르나르가 편지를 읽는다. <실베스트 보나르의 죄>, <티아스>를 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아나톨 프랑스도 찍었다. <동물사육제>를 쓴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도 볼 수 있다. 사실주의 연극 무대의 창시자인 앙드레 앙토완느를 만날 것이다. 우리들이 그저 사진으로만 알고 있는 이 위대한 이름들이 어떻게 살아 숨 쉬었는지를 알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기록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때 이미 유명했고, 지금 그들은 예술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사샤 기트리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이 영화를 찍은 것 같지는 않다. 두 번째 놀라운 점. 이 영화를 찍으면서 사샤 기트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예외 없이 화면 속의 예술가들, 카메라 앞의 예술가들이 말하는 쇼트를 포함시켰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이고 영화는 아직 소리를 ‘찍을 수’ 없었다. 마치 그걸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집의 그들>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거기서 이 위대한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집의 그들>은 마치 목소리를 들으려면 영화관이 아니라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으로 오라고 알려주려는 것처럼 찍은 영화이다. <우리 집의 그들>이 사샤 기트리의 첫 번째 영화이긴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토키영화가 시작된 다음의 일이다. 
 

<우리 집의 그들 - 사라 베르나르>

그럼에도 <우리 집의 그들>에 안타까운 심정을 가진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1915년에 공개된 22분 버전을 바탕으로 사샤 기트리가 책상 앞에 앉아서 후시녹음을 하듯이 장면별로 해설을 하고 내용을 설명하는 44분 버전을 1952년에 다시 작업하였다. 물론 그 내용이 정확한 지에 대해서는 사샤 기트리 외에 아무도 알 수 없다. 게다가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목소리, 클로드 모네의 목소리, 로댕의 목소리, 생상스의 목소리, 아나톨 프랑스의 목소리(...)이다. <우리 집의 그들>은 한편으로는 기이한 영화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안타까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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