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버스데이 보이

by.한승태(애니메이션박물관 수석학예연구사) 2018-06-12조회 1,754
버스데이 보이

흑곰아, 내 쉴 곳은 어디메뇨? 

박세종의 <버스데이 보이(Birthday Boy)>는 2004년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Annecy International Animated Film Festival)에서 첫 상영을 하였다. 당시 단편 경쟁 작품을 보면서 익숙한 캐릭터와 배경 때문에 드디어 한국에도 제대로 된 작가가 나왔구나, 이렇게 잘 짜인 작품을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카탈로그에서 작품정보를 찾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작품은 호주 국립영상학교 것이었다. 나는 분명 주요 상을 받을 거로 생각했다. 그만큼 애니메이션의 동작과 구성이 탄탄하고 뛰어났으며 영화적 장치와 주제가 돋보였다. 작품은 2004년 안시(Annecy)의 신인상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34개의 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단편부분 후보작으로도 올랐다. 

그때 박세종 감독과 나는 안시에 같이 있었다. 그러나 만난 건 박 감독이 아닌 그의 호주인 아내와 어린아들 그리고 시누이였다. 그때 나는 스위스에 갔다 오려고 버스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안의 여자가 우리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는 이리저리 장난을 치며 엄마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의 작품에 대해 강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버스데이 보이>는 1951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애니메이션에서 실제 전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기찻길이 있는 어느 마을, 사람들이라곤 보이지 않는 폐허를 보여준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마을은 고적하지만 따뜻해 보이기까지 한다. 기와지붕의 추녀마루에 앉은 잠자리가 쇠 부딪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날아가고 카메라의 시선이 지상으로 내려오면 집을 뚫고 추락한 전투기의 잔해 안에서 “흑곰아, 내 쉴 곳은 어디냐”는 노랫소리와 볼트와 너트를 주워 모으는 어린 주인공이 보인다. 이렇게 첫 시퀀스(sequence)를 통해 영화의 배경과 스토리 세계, 주인공 소개와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버스데이보이

버스데이보이
영화는 첫 시퀀스를 통해 전쟁을 통해 파괴된 가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시퀀스에서 주인공 만욱은 전투기 부품인 볼트를 철로 위에 올려놓는다. 이윽고 기적소리와 함께 기차가 빠르게 지나고 지켜보던 만욱의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만욱이 만들려던 장난감 탱크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탱크가 기차에는 실려 있다. 만욱의 눈빛은 환하게 빛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차의 굉음이 압도적이다. 이에 비해 정적 속의 마을에서 혼자 상상의 전쟁놀이를 하는 주인공, 그의 상상은 아빠와 함께 전쟁을 하는 것이다. 
버스데이보이

버스데이보이
폐허의 마을에서 혼자 전쟁놀이를 하는 어린 소년

만욱의 가슴 리본에는 한자로 ‘祝生日’이라 쓰여 있다. 오늘이 만욱의 생일인가 보다. 만욱이 돌아온 집 마루에는 군사우편으로 온 소포가 놓여있다. 만욱은 그것이 아버지가 보내온 자신의 생일 선물이라 여긴다. 소포는 아버지의 유품인 지갑, 군번줄과 군화다. 소포의 의미를 모르는 만욱은 자신의 발보다 큰 군화를 신고 군번줄을 목에 걸고 군인 흉내를 낸다. 햇살이 들이치는 방안에는 만욱이 볼트로 만든 탱크와 무기들이 즐비하다. 새로 만들어온 볼트로 탱크를 만들다 잠든 아이, 그리고 벽에는 가족사진이 보이고 암전되며 아들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버스데이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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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보이
죽은 아버지의 유품을 생일 선물로 생각하는 어린 소년은 전쟁놀이하다 잠든다.

전쟁영화에서는 전쟁의 가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어린 소년 소녀들이 종종 캐스팅된다. 그만큼 흔한 주제여서 전쟁을 다루기는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뻔한 결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소년은 전쟁의 의미를 잘 몰라야 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와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것이 이런 영화의 전략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서 주제를 증폭시키는 방법에 주목했다. <버스데이 보이>의 스토리는 위에 보여주었다시피 아주 간단하다. 만욱이 전쟁의 폭력, 즉 자신에게 다가온 폭력의 실체를 모른 채 아이러니하게 전쟁 기계들을 끊임없이 복제한다는 것이다. 

첫 시퀀스에 집을 관통하여 추락한 전투기는 가정을 파괴한 전쟁의 상징이다. 그리고 친구와 어울려야 할 만욱은 전투기의 부품으로 혼자 전쟁놀이를 한다. 세상을 모르는 순수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전쟁의 폭력과 상처는 미래 세대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은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만욱의 상황만을 보여줄 뿐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다. 

애니메이션이 이렇게만 끝났다면 어딘가 싱겁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디테일을 담고 있다. 바로 햇살에 대한 표현이다. 영화의 전반에 충만하게 차 있는 것이 햇살이다.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영화 속에는 너무도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어린 ‘만욱’이 혼자 전쟁놀이하는 폐허의 골목길은 물론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선물로 오해하는 장면에도 어머니를 기다리다 잠이 든 방안에도 햇살은 애니메이션이 주는 무거움에도 역설적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감독은 생일 선물의 아이러니를 통해 전쟁의 폭력을 배치하고 햇살이라는 하나의 장치를 가지고 주제를 무한 증폭시킨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은 햇살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작품의 무거운 주제와 상반되게 표현된 햇살에 관객은 따스한 마음을 얻는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조차 모르는 천진난만한 만욱과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생일선물로 착각하는 만욱의 고통은 햇살에 의해 무한 증폭된다. 

제목은 아버지의 죽음과 중첩하여 축복받지 못하는 탄생이라는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엔딩은 전쟁놀이에 지쳐 잠든 만욱의 모습에서 페이드 아웃되지만 정적을 깨며 들려오는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 하나로,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이라는 상징을 완성한다. 어쨌든 돌아올 사람이 있어서 그의 생일은 축복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가슴에 ‘祝生日’이라는 리본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그건 사족으로 보인다. 제목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 대한민국은 60년 전 시작된 전쟁이 끝나려 하고 있다. 그때 시작된 전쟁으로 현재까지도 850만 명의 이산가족이 아픔을 겪고 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나는 살리라」(1949)를 변용하여 결론을 대신한다.

일촉즉발의 공포 가득한 오늘 / 난 민중을 향해, 삶을 향해 떠난다, / 총잡이들이 옆구리에 미국문화를 / 끼고 어슬렁거리는 오늘, / 나 여기 굳은 결의 되새긴다. / 중동에서 살육을 자행하는 손들 /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교수대 / 한국을 지배하는 치욕 / 나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리라 / 나 여기에 머물리라. / 또다시 나를 기다릴, 별처럼 빛나는 / 손으로 나의 문을 두드릴 / 말과 민중, 그리고 길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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