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맛있는 ‘망가니쿠’의 세계 ⑵

by.캐롯(웹툰 작가) 2018-05-08
월레스와 그로밋
이제 뻔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일은 그만하고, 진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이나 감상해보자. 사실 애니메이션 속 먹방은 그 가짓수가 일만 오천육십 개까지나 되니(세어 보진 않았지만 하여튼 엄청 많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밀가루’에 관련된 먹방만 감상해보겠다.

첫 번째 이야기해 볼 애니메이션은 바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이다. 나는 사석에서 지브리 스튜디오를 ‘셰프 지브리’라고 부르곤 한다. 마치 감각 있는 셰프가 그날 날씨와 제철재료들을 고려하여 선보이는 ‘오늘의 추천 요리’ 메뉴처럼,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의 먹방에서는 작 중 분위기와 상황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요리 메뉴를 선보인다.

먼저, 밀가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애니메이션인 <마녀배달부 키키>를 감상해보자. <마녀배달부 키키>는 꼬마 마녀 키키가 빵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소동을 담은 따뜻하고 귀여운 성장 드라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키키가 화덕에서 파이를 굽는 부분인데, 그 파이의 모양이 적잖이 낯설었다. 생선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청어 파이’였기 때문이다. 이 청어 파이는 모두에게 몹시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는지, 지금도 청어파이, 즉 생선 파이는 영국의 괴랄한 미식 문화를 조롱하는 의미로 통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셰프 지브리의 탁월한 센스를 엿볼 수가 있다. 생선 파이는 사실 역사가 오래된 영국 전통 요리다. 신선한 생선을 구하기 어려운 영국의 서민층들이 조리해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하튼 영국 서민들의 전통 홈 푸드인데, 현재는 여기저기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마녀배달부 키키>의 청어 파이 역시 마찬가지 신세다. 손녀의 파티에 따뜻한 파이를 보내주고자 했던 할머니가 오븐이 고장 난 상황에서, 오래된 화덕을 수리하는 고생(물론 고생은 키키가 다 하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키키에게 넉넉한 금전적 보상을 해주었지 않은가?)을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구워낸 것이지만, 신세대 손녀에게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셰프 지브리의 특기인 ‘상징’이 빛나는 대목이다.
 
키키의 눈빛을 보면 맛있게 먹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움직이는 성안, 하울의 식사는 어떨까? 베이컨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개척자들의 필수아이템이었다. 여행 작가이자, 개척자인 랜스포드 헤이스팅스는 1845년, 오리건을 향하는 이민자들에게 150파운드(약 68kg)의 베이컨을 필수적으로 챙겨가라고 조언했다. 개척자들은 매일 아침으로 커피와 베이컨을 먹고, 저녁엔 베이컨 기름을 빵이나 비스킷에다 발라 먹었다.1) 그 유명한 베이컨&달걀의 유행은 사실 하울이 원조가 아니다. 그 역사는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이어트가 필수덕목인 이 시대에야 고열량인 이 조합은 사실 죄책감까지 불러일으키지만, 1920년대에 ‘베이컨&달걀’은 아주 ‘건강하고 가성비 좋은’ 아침식사였다. 그야말로 피로와 긴장에 찌든 여행자들에게 걸맞은 고영양 메뉴인 것이다. 게다가 셰프 지브리는 베이컨 기름으로 모든 조리를 해결한다. 올리브유나 향료같은 많은 부재료들을 챙겨 다니기 어려운 여행자들에게 아주 요긴한 재료다. 다만 계란 후라이를 저렇게 예쁜 ‘써니 사이드 업’으로 만들려면 약불로 인내심있게 구어야 하는데, 저렇게 화력이 센 불에 조리하니 타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뭐, 보기 좋기는 했다. 이 부분에서 서론에서 말했던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의 장점이 빛을 발한다.
 

왜 밀가루 이야기를 하다말고, 고지방 고단백 메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겠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베이컨과 달걀과 함께 식탁 위에 나란히 놓여있던 빵, 깜빠뉴다. 절대 사심으로 베이컨&에그를 끼워 맞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약간 그래요. 뭐 어쨌든… 이 고열량, 고단백의 조합의 목 멜 듯한 기분은 탄수화물이 녹여준다. 깜빠뉴는 오래 보관하기 쉽고, 재료가 단순하고 맛이 담백하여 어느 메뉴와도 잘 어울린다. 식사빵이라는 카테고리답게 묵직하고 든든하다. 여러모로 먼 길을 떠날 때 아주 적합한 메뉴다. 사실 ‘베이컨과 에그 게다가 단순 탄수화물인 빵’은 비만 인구 상승에 힘을 실어줄 조합이기는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막강한 적과 싸워야하는 하울 무리에게는 더없이 걸맞은 메뉴였다.

이번엔 일본을 벗어나, 영국의 훌륭한 스튜디오로 넘어가 보자. 아드만 애니메이션은 <월레스와 그로밋> <치킨 런> <플러쉬> <아더 크리스마스> <허당 해적단> <숀더쉽> 등 정말 재미있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대거 제작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아드만의 애니메이션들은 진짜로 웃기고, 재밌다. 그리고 먹음직스럽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먹방으로써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장점들을 고루 갖출 수 있다. 만져질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오버액션도 ok. 멋진 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월레스와 그로밋>을 살펴보자. 월레스는 발명가이자 빵집사장이다. 그로밋은 그가 기르는 강아지. 하지만 이 강아지 그로밋이 월레스보다 약 두 배가량 현명하다. (하긴 역마살 붙은 것 마냥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동네를 휘젓는 이웃집 개도 집만 잘 찾던데, 10년 산 동네에서 한번 낯선 길로 가보자고 했다가 돌아오는 길을 한참 헤맸던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둘은 아무리 바빠도(사실 별로 바빠 보이지도 않지만) 늘 시간을 내어 치즈&크래커와 홍차를 즐긴다. ‘빵이냐 죽음이냐’ 편에서, 파이엘라는 늘 정시에 티타임을 즐기는 월레스의 습관을 이용하여 살인을 계획할 정도로 그들에게 티타임은 무척 중요한 의식이다. 사실 이런 문화는 영국인이라면 아주 익숙하다. 영국인들의 티타임 사랑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도버해협을 건너는 기차 안에서도 전용 도기로 애프터 눈 티를 즐겼다고 하며, 영국의 유명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환상의 세계에서도 티타임은 빠지지 않는다. 이런 영국인의 홍차사랑에 대한 결실은 현재 티타임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찻잎들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찰스 그레이 백작의 이름을 딴 ‘얼그레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같이. 

영국이 구움 과자 분야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이 ‘차사랑’에 원인이 있다. 음식문화가 취약하다고 정평이 난 영국도 비스킷, 스콘 등 티타임에 곁들일 메뉴를 개발하는 데에는 꽤나 열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인류 최고의 발명가는 사랑이라고 했던가. 월레스와 그로밋이 여기에 곁들이는 비스킷 역시 지극히 영국적인 과자다. 비스킷은 1588년 스페인과 영국이 영불해협에서 맞붙었던 전투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었다. 해전 시 배에 실을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어 칼로리가 높지만 가볍고 부피가 작아야 했는데, 비스킷이 그에 딱 걸 맞는 메뉴였다. 영국군은 최대한으로 수분을 없앤 딱딱한 비스킷을 있는 대로 보관해 둔 덕에 굶주릴 일없이 전쟁에 임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세계최강이라 자부하던 스페인 함대는 몰락했고, 영국은 세계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2)
 

어쨌거나 월레스와 그로밋의 티타임은 달로 향하는 우주 비행선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용감한 개척자들은 출발하기 직전까지 티타임 도구들을 챙기기 바쁘다. 바삭하고 퍽퍽한 비스킷에 부드러운 치즈를 곁들인 티푸드에 맛있는 홍차,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 즐기는 티타임이라니, 우주 한가운데 더없이 영국적인 풍경이다.

위 거론한 예시들 말고도 애니메이션 속 먹방에 대한 이야기는 밤새도록 나누어도 모자람이 없다. 언젠가 또 기회가 닿는다면 <너의 이름은>의 팬케이크 이야기나, <검정고무신>의 크림빵에는 생크림이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크림의 비밀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애니메이션 속에도 현실 세계 만큼이나 먹음직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득 숨어있다. 행복한 이야기다.

먹는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답게 나의 첫 데뷔작도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했던 음식 만화(<삶은 토마토>)였다. 주로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나 상황들이 스토리의 전부다.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는 게 별건가 싶다.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밥먹기’를 원하며,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들이 ‘식사자리’에서 거론된다. 나는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들이 먹고 마시는 게 좋다.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진중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허기짐을 느껴, 혹은 기운이 달려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순간 거리를 두고 감상하던 이야기들이 삶의 차원으로 넘어온다. 게다가 음식 만화를 연재하며 먹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 즐겁지만, 번거로운 일임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빼버려도 상관없는 먹방 장면을 굳이 삽입한 애니메이션 감독에게는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기까지 한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이 더 먹고 마셨으면 좋겠다. 더 많이, 더 맛있게, 더 오버액션으로 먹어주면 좋겠다. 언젠가 여러분, 제가 엄청나게 맛있게 먹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거 거든요? 얼마나 맛있게 먹나 한번 보러와 주세요. 어설픈 글을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나도 난생처음 칼럼이라는 걸 써본 기념으로 오늘은 맛있는 걸 좀 먹어야겠다.


1)『아침식사의 문화사(Breakfast: A history-Heather)』 (헤더 안트 앤더슨 저, 니케북스, 2016) 참조
2)『양과자 세계사』(요시다 기쿠지로 저, 비앤씨월드, 20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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