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청소년 제작 영화의 한때를 떠올리며 <D-?>, <애드벌룬>, <잠자리 구하기>

by.김예솔비(영화평론가) 2024-09-27조회 2,275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초등학생 때 면접을 보고 들어간 방송반에서 나는 영상 송출 담당이었다. 아나운서 선발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당시 여자애들은 전부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방송반에 들어갔다). 영상 송출 담당이란 조회 시간에 타이밍에 맞춰 애국가 제창 화면을 틀고, 교가 비디오를 틀고, 다시 화면을 전환해 강단을 비추는 일이었다. 특별활동 시간에는 방송실 안에서 함께 영화를 보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던 기억. 고등학생 때는 영상제작 동아리 활동을 했다. 집에서 안 쓰는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영상을 찍었고 이런저런 공모전에서 나름 성과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학교에 가서도 영상제작 동아리에 들어갔다. 학내방송국도 아니고 영화동아리도 아닌 영상제작이라는 모호한 분과만을 노렸던 행보에 대해서는 늘 약간의 해명이 필요했다. 영화는 멀고 어렴풋하게 느껴졌던 반면, 영상은 지금 당장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대상처럼 친밀하고 가까웠다. 영화를 의식적으로 챙겨보거나 영화 비평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그러니까 영상제작 활동을 했던 시기와 영화를 좋아하게 된 시기가 다르다는 점은 내내 의문이었다. 그 두 가지는 다른 걸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일단 찍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나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


2.

글 쓰는 사람의 손 위에서 시간은, 마감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는 카운트다운으로 대체된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밀려나는 리듬이 있을 뿐. 이건 마감의 불안으로 또 다른 층위의 불안을 지우는 일. 불안으로 불안을 다시 쓰는 일. ‘다시 시작해보자’라는 주춤거림 없이 글쓰기가 어렵다. 그건 글쓰기에 가로막힌 사람이 쓰던 원고를 거칠게 구긴 뒤 새 종이를 꺼내면서 뭔가를 새로 시작하고 있다는 착각을 통해서만 글을 시작할 수 있다고 느끼는 아주 상투적인 장면인 동시에, 대부분의 내 글쓰기가 출발하는 장소다. 눈치 챘겠지만, 글을 시작하기 위해 쓰나 마나한 말을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자꾸만 미루게 된다. 곤란한 일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만큼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나’여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이 든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까지 내가 썼던 모든 글은 불순하다고 말해야 한다.

종종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의 경우, 특히 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책상 위가 아니라 책상 아래에서(Under The Table-‘불법적인 일’을 뜻하는 관용 표현) 이루어지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종종 영화 전문 매체에 글을 쓰고, 힘을 북돋아주고 싶은 어떤 영화에 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의 효력을 따질 새도 없이 글이 공적인 경로로 유통된다는 사실은 특권적인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줄곧 이런 불안이 따라붙었다. 왜 정녕 영화여야만 할까?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을 읽으며 이보라 평론가가 쓴 구절에서 멈칫했던 기억도 난다. “글을 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만 할 수 있나?”*주1

비평은 단순히 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다. 『비평철학』에서 저자는 기술과 해석이 서로 다른 작업이며 기술은 명백한 요소들에 대한 증언인 반면, 해석은 명백한 요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해석은 결코 최종 진술이 될 수 없는 미완의 작업이다.*주2 어떤 것이 명백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지 선택하기 위해서는 관습적인 것이라 여겨지는 공통의 합의들에 대한 감각을 키워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 대한 가장 새로운 이야기조차 사실은 통속적인 것의 배후에 있다는 깨달음이 글쓰기의 날카로운 기쁨이라면, 나는 그 순간을 연장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다.

결코 최종 진술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매혹적인 동시에 끝나지 않는 악몽 같다. 불만족스러운 마감을 했다는 불안이 들 때면 어디에도 없던 평론가 데이비드 매닝*주3(일명 ‘데이비드 매닝 사건’)의 유령이 나타난다. 이 자리는 언제 백지화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허구가 아닐까. 그 누구로도 대체 가능한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어느 날 꿈에서는 내가 데이비드 매닝으로 판명 난다. 그리고 깨어나면,

…이 세계는 꿈이라고 해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간단한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주4
 
   
'데이비드 매닝'의 평을 실은 영화 광고 (사진: "Dave Manning", The Museum of Hoaxes)


3.

영화를 둘러싼 불안과 수치심, 글쓰기의 곤란함이 맞닿는 장소가 영화 비평이라는 밀실이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묘연하다. 미치더라도 이들과 함께 써나가야 하는데,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영화 비평을 수행적인 활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때 수행성이란 현실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개입이 아니라 ‘일단 가까운 곳으로 돌입하는 것’에 가깝다. 영화는 멀지만 영상은 찍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처럼, 지금 당장 무언가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최대한 현실이라고 감지되는 최전선을 향해 두드려보는 무모함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일단 돌입하고 나면 문제는 다음으로 미루면 된다. 문제는 다음이 항상 너무 빨리, 그리고 시시각각 찾아온다는 것뿐이다.

비평은 무언가를 걸치고 말하는 작업이기에 제로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다. 비평은 이미 나와 있는 것들의 재활용에 그치지 않으며 여전히 창조적인 활동에 가깝다. 두 진술은 양립 가능하다. 나는 비평과 픽션의 일치를 소망하고, 그런 소망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어렴풋한 예감 속에서 쓴다. 오히려 나를 쓰게끔 만드는 것은 그런 오래된 불가능성이다. 2년 전 언파운디드랩(areyoulost.xyz)의 초대를 받아 비평과 픽션의 상호 침투에 대한 글을 쓴 적 있다. 비평과 픽션을 이어주는 가능한 다리들을 다소 산만하게나마 떠올려보고자 했는데, 당시에는 비평의 픽션을 비평의 형식(적 다양성)으로 구현하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나는 비평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무용한 일을 벌이고 매번 실패하지만 형식적인 새로움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은 많이 내려놓게 되었다. 비평의 새로움이란(물론 매우 드문 확률로 형식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작품과 그것이 놓이거나 영향을 미치는 현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비평가의 수행성은 ‘담론 만들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밍 어드바이저 서동진은 한국단편영화 섹션의 특정 경향을 분류하며 영화들이 특정한 문화적 부족을 형성하고 있음을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쓴다.
 

작품의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나 이미지로 환원할 수 없는 영화 찍기가 갖는 수행적 측면에 주목하여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이미 만들어진 ‘작품’으로 간주하고 그 속에 재현된 이야기와 이미지의 언어적 측면이나 미학적 측면을 헤아리려는 것과,
영화를 하나의 수행적 언어, 즉 일종의 ‘하기(doing)’로 간주하고 영화를 사유하는 것은 다른 접근이다.*주5


서동진은 이 글에서 영화를 특정한 주제나 담론으로 분류하기보다는 단편영화 찍기라는 문화적 수행성과 그 활동의 가치를 중심에 둘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를 사유하는 것은 “제작된 작품에 연연하지 않고, 감독이라는 텍스트와의 관계를 특권화하는 용어에 불신을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주6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고 창조한다는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작품에 대한 논의는 그것의 주제나 의미, 의도 같은 것들에 의해 휩쓸려가기 쉽다. 반면 영화를 활동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영화를 이미 제작된 것이라는 한정된 텍스트가 아닌, 감독과 작품 사이에 놓인 관계의 완고함을 슬며시 흔들며 제작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반영되고 구성되는지를 조망하게 하는 다층적인 텍스트로 바라볼 수 있게끔 한다.

단편영화,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의 수행성이 공동체의 발견과 자기 구성의 쾌락에 있다면 이것은 비평의 수행성에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말이다. 특히나 영화 비평은 하나의 작품에 대해 논할 수도 있지만 그 작품을 둘러싼 믿음이나 애정을 그러모으면서 특정 집단을 호명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물론 영화의 수행성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성립하는 것과 달리 비평은 단순히 ‘나’를 등장시키거나 일상을 전시하는 것만으로 비평적 효용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비평은 영화를 완결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작품과 나’를 연루시킬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영화를 현실을 향해 연장시킬 수 있다. 비평은 담론의 부피를 가지지 않은 것, 지나치게 사소하거나 주변부적인 것, 일상과 비슷한 층위에서 간과되는 것들을 재발견하거나 다시 응시하자고 청할 수 있다. 비평의 수행성은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성의 속성을 재규정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비평적 차원에서 작품을 현실과 매개하는 일은 분명 픽션의 기능을 지닌다. 이는 ‘나’라는 주어를 등장시킬 때만 어떤 활동이 수행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과 비일상적인 것,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선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운용하는 것이 비평의 수행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비평가의 일상이 식별 불가능한 상태로 용해되어 있다.

영화의 수행성을 중점에 둔다는 것은 감독의 지위를 특권화하는 관점으로부터 떨어져나왔을 때 더욱 잘 보이게 되는 작품들의 층위가 있다는 말이다. 덜 만들어진 것 같은 영화, 조악한 영화, 그럼에도 사로잡는 영화. 카메라를 다루는 치기 어린 몸짓에서 순간적으로 묻어나는 광채가 있다면 그를 이야기해 봄 직한 것으로 부풀리고, 영화의 담론적 영토를 재구성하는 것은 비평가의 수행이 아닐까? 비슷한 관점에서 다시 보기를 청하고 싶은 것은 청소년 제작 영화들이다.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만든 영화들과 영상 제작 문화를 단지 아마추어적인 것이나 미성숙한 단계로 한정시키는 것에 대한 묘한 반감이 있다. 그 시기의 기억이 수치스럽다면, 수치심이라는 바로 앞에 놓인 경험으로부터 출발해 청소년 영화의 한때라는 비가시적인 기억을 담론이라는 공통의 영토로 구제할 수 있을까? 어쩌면 청소년 영화의 스타일을 논해 볼 수도 있을까?
 
   
<D-?> 중

유소라의 <D-?>(2003)은 수험생이었던 유소라 감독이 직접 자신과 주변을 기록한 사적 다큐멘터리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인 유소라 감독은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며 본인의 일상을 기록한다. 주변 친구들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화면 안에 등장해 가상의 청중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학교생활과 가정에서의 일상, 충분히 사사롭지만 문제적일 정도로 내밀하지는 않은, 개인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고3 수험생의 나날들. 입시제도에 대한 심정이나 수험생활의 고충, 장래에 대한 고민을 친구들에게 묻고 답하는 인터뷰는 짧은 호흡으로 리드미컬하게 쪼개어지고 재조합되면서 특정 무리의 집단적 고백으로 조성된다. 이때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식하는 동시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신의 동급생을 바라보고 있다. 유소라는 철저하게 카메라에 매개된 존재로 등장한다. ‘셀프 카메라’라는 형식이 충분히 어떤 문법으로 자리잡지 않았던 때에 스스로와 스스로의 일상을 향해 카메라를 드는 것은 분명 어색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형식이 이미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사후적인 자리에서 그것이 최초로서 유효했을 풍경을 생생하게 가늠해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동시에 많은 것이 당연해지거나 진부해졌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스타일화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일상의 기록이 자연스러워졌지만 2002년에 카메라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동급생들의 반응에는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다. 아마도 유소라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어서 누구도 특별히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2014년 독립영화 기획전의 GV에서 유소라 감독은 학생이었던 당시 이미 영상 제작에 관해 여러 성과가 있었기에 제지를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학교의 지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실 유소라 감독은 청소년 영화 제작 문화의 붐을 이끌었던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이선희 외 9인, 1998)를 제작한 영파여중 방송반의 일원이었다. 제1회 서울 YMCA 청소년영상페스티발(주제: ‘오늘, 우리의 모습: 우리의 자화상’)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던 이 영화는 실제 일진회 무리였던 학생들을 연기자로 섭외하고 그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수정하기도 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당사자가 직접 폭력을 재연한다는 측면에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러한 작품의 분류와 계보를 의식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실제 비행 청소년들이 등장인물로 분한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1997)에 대한 청소년들의 응답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의 설립자이기도 했던 김종현 선생이 영파여중 방송반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지도하에 함께 제작된 것이기에 어른들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의 형식은 어떤 미학적인 방법론이라기보다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제도가 문제적인 것으로 낙인찍거나 방출시키려 하는 대상의 이야기를 주체화함으로써 제도와의 마찰을 일으키기 위한 사건에 가깝다. 실제로 이 영화가 발표된 뒤 방송반 담당이었던 김종현 선생이 학교에서 퇴출당했다는 일화가 설명해 주듯. 그리고 몇 년 뒤 선생은 다시 영파여고로 복직하게 된다. 이는 청소년의 영상 제작이라는 문화가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며, 동시에 이는 더 이상 ‘포스트 서태지 세대’가 가진 문화적인 정체성의 공유지대를 내보이는 수행성이 갖는 반격이 이전만큼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D-?>는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처럼 문제적인 아이들을 다루지 않는다. 다만 수험생이 학교에 캠코더를 들고 다니면서 다소 위험한 장면(수업하는 장면이나 체벌하는 영상 등)을 촬영하는 데도(비록 이것이 녹화 중이라는 카메라 신호를 가리고 몰래 찍은 것이라 하더라도)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영화는 같은 학급 친구들이 교실 컴퓨터에서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한 기록을 발견하는 장면을 보여주거나 계속 비슷한 설명을 동어 반복하는 선생님의 수업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기도 한다. 남자가 너무 궁한 나머지 담임 선생님을 보며 윤계상을 떠올린다는 지극히 소녀적인 차원에서 도발적인 고민들도 담겨있다.

영화는 수능을 두 달 넘게 앞둔 D-70부터 수능 당일을 거쳐 졸업식, 그리고 졸업 이후 대학에 입학한 정황까지 시간을 내림차순으로 충실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유소라 감독이 수험생활 당시 촬영한 푸티지를 편집한 것은 성인이 되고 난 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공개 당시 이토록 사소한 내용이 정녕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의아함과 더불어 영화가 청소년 섹션인지, 성인 섹션인지 판단하기 모호하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이 영화가 졸업 이후의 시점에서 회고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기록을 촬영한 자가 수험생 당사자이며, 자신을 둘러싼 현장을 증언하고 있고, 카메라가 학교라는 제도의 규칙과 규율을 얼마나 침범할 수 있는지 의문에 부치는 식으로 제도의 윤곽을 드러내는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려 이 영화는 성인이 된 시점에서 청소년기의 기억을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과 청소년기를 단순히 입시라는 제도의 전환점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기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수능이 끝나고 처음 합법적으로 술을 마시는 날? 대학 입시 결과 발표를 듣거나 재수를 결정하는 순간에? 졸업식 날 어설프게 화장한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릴 때? 어쩌면 청소년기는 한번도 끝난 적이 없는 게 아닐까?

시스템 내부에서 그것과의 마찰을 통해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표현하는 <D-?>는 영화의 수행성이 청소년이라는 지위와 범주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 영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제작 주체의 나이가 청소년에 해당한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그 영화가 바탕으로 하는 수행성의 범주에 따라 청소년 영화라는 스타일을 정의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나치게 조악하거나 서툰 화면이 일정 부분 청소년기 특유의 풋풋함과 열기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굳어진 것은 사실상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흥했던 청소년 영화 제작 문화가 끼친 영향이 아니었을까? 디지털이 보편화된 전환기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세대의 갈급함이 맞닿는 지대에서 탄생한 스타일. 특정한 영화적 실천의 계보나 아카데믹한 것을 의식하지 않(못하)고 그저 찍겠다는 충동이 자제할 길도 없이 먼저 앞서나가서 이상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영화들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을까? 교육과 창작, 반발심과 순응 사이에서 지글거리는.
 
<D-?> 중

이우정 감독의 <애드벌룬>(2011)을 다시 살펴보는 게 하나의 답이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단출하다. 평범한 아파트에서 정신없이 등교 준비를 하는 여고생의 아침으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는 두 여자애의 혼란스러운 친밀함과 한밤의 일탈이라는 비일상적인 소동극으로 향한다. 아파트 옥상의 애드벌룬 안에서 술을 마시던 아이들이 질식사했고, 주인공은 운 좋게 사고를 면한다. 그러나 거기 휘말린 지봉이라 불리는 여자아이의 죽음은 누군가의 청소년기에서 영영 불가해한 추문으로 떠돌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보다도 이야기가 이미지화되는 방식이다. 2011년에 제작된 <애드벌룬>은 의도적으로 열화된 화질로 촬영되었다. 윤성호 감독은 <애드벌룬>이 ”요새 안 쓰는 베타캠(정식 명칭은 베타캠betacam 비디오 캠코더. sony에서 개발한 방송용 ENG 카메라, 설명은 필자)을 굳이 대여해 특정 시기의 스탠다드(1990년대 교육방송 청소년 드라마와 중고등학교 영상제작반의 의욕적인 과업 사이 어딘가)를 일부러 서툴게 재현한다”*주7라고 말한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장면 또한 캠코더로 촬영된 푸티지를 활용한다. 몰래 교실을 촬영한 듯한 영상과 함께 또래 여학생들을 둘러싼 소문을 무심하게 읊조리는 나레이션이 들린다. 이 푸티지는 사실상 영화 전체의 이야기와는 무관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촬영했는지도 알 수 없으며, 그 사실이 중요하지도 않다. 이유리와 김애숙, 한혜정이 누구인지도. 오히려 영화와 상관 없어 보이는 오프닝을 영화와 접속시키는 것은 출처 미상이라는 이미지의 익명성과 화면의 질감이다. 정제되지 않은 캠코더 화면과 서사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 이미지 자체의 활력, 저화질의 푸티지는 베타캠으로 촬영된 장면과 큰 낙차 없이 어우러진다. <애드벌룬>의 오프닝씬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여자 청소년기라는 특정한 시기의 혼란스러움, 잔인함, 기억과 감각에 대한 인용이다. 영화는 효정이라는 인물과 친구 지봉(지연)을 중심으로 벌어진 하루의 해프닝이라는 특정한 이야기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굳이 영화의 앞과 뒤에 기록 푸티지를 삽입해 드라마를 공적인 기억으로 확장시키려 한다.
 
<애드벌룬> 중

화면과 편집, 대화를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이 영화의 의도적인 서투름은, 윤성호의 말대로 청소년 드라마의 외피를 차용해 그것을 비트는 방식으로 ‘고유한 것’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전략일 수도 있다. 허나 이러한 고유함은 청소년 드라마의 스타일과 영상제작반 과업의 활기를 연상시킨다는 공통의 기억지대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영상제작반의 활동은 묘사되지 않으며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어딘가 미숙한 듯한 연출과 편집, 방송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질감은 분명 아마추어적인 활동을 상기시키고 있다. 어쩌면 뉴진스의 디토(ditto)식으로, 이 영화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캠코더를 든 여자 청소년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고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영화의 앞뒤로 삽입된 익명의 푸티지를 다시 떠올려보자. 지나치게 밀접하고 실시간적인 이미지는 이것이 촬영되었을 방식의 내밀함을 은연중에 연루시킨다. 영상이 암시하는 것은 손에 카메라를 들고 학교를 관음하는 내부자적 시선의 은밀함이며, 이는 <애드벌룬>을 보는 내내 이상한 불길함으로 달라붙어 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 영화의 서브 장르는 공포다. 나레이션이 덤덤하게 들려주는 괴담 같은 소문, 과고에 진학했던 한 여학생이 아버지의 압박에 못 이겨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는 청소년기 특유의 잔인함과 서늘함을 증폭한다. 학원물에 등장하는 캠코더 영상이 노스텔지어뿐 아니라 공포를 자아내기도 한다는 사실은 이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김태용, 민규동, 1999)가 보여준 적 있다. 무분별한 일상의 순간을 충동적으로 기록하는 캠코더의 조작 방식과 그렇기 때문에 거기 무엇이 찍혀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유령을 불러들이기에 좋은 환경이다. 아는 만큼 알고 모르는 만큼 모르는 청소년들의 직설은 충분히 잔인하다. 정제되지 않음은 실은 매우 사실적인 동시에 장르적인 감각이다.

<애드벌룬>은 성인 연출자(청소년들이 제작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가 만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기의 학교라는 시스템 내부의 생태계와 그 혼란을 거의 피부로 맞닿아 있는 듯한 감각을 준다. 이 영화가 진짜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리얼리즘 영화의 수사를 애써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영화라는 수행의 아마추어적인 특징을 전유해 서사로 편입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서사와 무관하지 않은 어떤 불안의 정체를 성공적으로 표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툴고 미숙한 것을 부족함에 그치지 않고, 담론적 부피로 만드는 것.


4.

청소년이 제작 주체가 된 영화들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오세섭은 청소년들이 주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반영된 논픽션을 제작하면서 자기 재현의 효과를 얻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청소년 제작 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주8 이들이 묘사하는 내용은 학교폭력과 성적, 진로문제, 가족 관계와 사회에 대한 관심 등이라는 주제의 큰 경향 안에서 반복된다. 1998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청소년 제작 영화에서는 초창기의 관행이 반복되고 있으며 입시 위주의 교육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이러한 경향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주9 확실히 청소년들의 가장 내밀한 목소리는 입시 제도에 대한 경험과 문제의식을 자주 경유할 수밖에 없다. <D-?>과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입시 생활의 부조리함으로부터 출발하는 홍다예의 <잠자리 구하기>(2024) 또한 수능을 얼마 앞두지 않은 수험생인 감독 자신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추후에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 시절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본능적인 예감, 그리고 반쯤은 입시 제도에 대한 반발심으로 촬영된 것들이다. 유소라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홍다예 감독도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 기록을 다시 들여다본다. <잠자리 구하기>가 보여주는 현실이 지나치게 가깝다는 감각은 대상과의 영점조절을 의도적으로 실패함으로써 내가 너를, 우리가 우리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한다. 주제와 내용을 중심으로 영화의 경향을 범주화하는 관점의 부작용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충돌이 그 안에서 어떻게 분화하는지,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기입하는지 추상화한 채 단순한 치기 어림으로 노이즈와 아우성을 뭉뚱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 비평이 언제나 상대보다 많이 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일이라는 세간의 오해에 따르면 비평은 항상 성인의 시점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비평의 청소년성이 가능한지 묻고 그 치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잠자리 구하기>에서 입시에 실패한 감독은 재수를 택한다. 사람들은 이 기간이 유예기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답답함과 분노, 우울감은 입시라는 사건으로부터 멀어진 뒤에도 여전히 그 사건의 후유증과 싸워야 하는 과업으로 남는다. 감독의 나레이션처럼 우리는 “아직 유예기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도 바깥에 놓인 시간이 있을지언정 삶 바깥으로 잠시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삶의 일부란 없다. 청소년기와 아직 끝장을 보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기분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잘못된” 사람이 가진 우울의 궤적을 표면화하는 기록들, 그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고 편집해야겠다는 충동으로 남아서 영화의 수행성과 접속한다. 그러니까 청소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건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다는 식의 낙관이 아니다. 청소년기를 제도적 나이가 아니라 스타일로 확장될 수 있는 특정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할 때 종종 불가해한 활력을 띤 영화들을 수용할 수 있는 지반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소음과 신음, 반발심, 특정 시기가 지나면 부끄러운 것으로 판명 날 어떤 충동들, 미래에 무감한 투신을 마주하는 기쁨이 있고 그 충격이 글을 쓰게 한다면 기어이 그렇게 할 것이다.

왜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나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앞으로도 나는 너무 모르고, 모를 거라는 예감 속에서 쓰겠지만, 모르면서 일단 앞서나가는 마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음을 부정하거나 배신하고 싶지 않다.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이 아는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발각될 미래의 수치심을 감수하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수치심을 기다리는 일. 부정확함을 견디는 것. 글쓰기는 언제나 불안이라는 뒤축을 밟고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일이니까. 거의 넘어지듯이.
 
<잠자리 구하기> 중


***
주1.
이보라, 「쓰러진 활자들을 일으키기. “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하지 않는가.”」,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 2023, 106쪽.

주2.
노엘 캐럴, 이해완 옮김, 『비평철학-On Criticism』, 북코리아, 2015, 159~164쪽.

주3.
2001년, 소니 픽쳐스 엔터테인먼트는 데이비드 매닝이라는 평론가가 작성한 <기사 윌리엄>(브라이언 헬거랜드, 2001), <애니멀>(루크 그린필드, 2001) 등의 영화에 대한 호평을 인용한다. 코네티컷주의 소규모 신문 릿지필드프레스의 필자라고 알려진 이 데이비드 매닝이라는 평론가는 그러나 가상의 인물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평론가의 이름으로 영화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게재하고 이를 광고에 활용한 것이다. 어디에도 없던 평론가 데이비드 매닝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유령적일뿐 아니라 영화 비평이 산업의 가장자리에서 니콜 브레네즈의 표현대로 ‘부역자들’로 과대 대표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온전한 의미의 비평 활동이 수용될 장소가 희박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주4.
스즈키 이즈미, 최혜수 옮김, 『여자와 여자의 세상』, 문학과 지성사, 2024, 407쪽.

주5.
서동진, 「전주국제영화제가 소집한 19편의 한국 단편 영화」, 《독립영화》 통권9호, 2001, 10쪽.

주6.
같은 책, 7쪽.

주7. 
윤성호, “[초이스]애드벌룬”,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2012. 3. 6.

주8.
오세섭, 「청소년 제작 영화에 나타난 자기표현으로서의 재현의 의미」, 《씨네포럼》 제35호, 2020, 89쪽.

주9. 
같은 책, 94쪽.



김예솔비(영화평론가) l 영화를 중심으로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이따금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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