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재 극장인 단성사에서 1920~30년대 조선인을 대상으로 발행한 극장 소식지 《단성주보》 (제297호 / 1929. 1. 26.)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환한 조명이 빛나고, 한껏 치장한 배우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다. 모두에게 주목받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눈부신 자태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우리는 종종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 무대와 은막의 ‘스타’들이 내ᄈᆕᆷ던 빛은 정작 객석의 조명이 모두 꺼진 순간, 즉, 광막한 어둠이 그들을 온전히 감싼 후에야 발현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예술가가 늘 ‘꽃길’만 걸을 수 없다는 점이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겠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배우로 사는 일은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는 일과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 영화인이 되려면 먼저 “밥 굶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는
이규환 감독의 자조섞인 고백처럼, 배우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경제적 곤궁함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처지는 최소한의 예술적 자율성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본과 필름 검열은 물론이고, 현장검열에 나선 임석경관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배우와 변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는데,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불온한 언사로 낙인찍히면 꼼짝없이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던 일도 다반사였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배우의 삶을 동경하여 신문사 질의응답란에 ‘배우 되는 법’을 문의했던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되돌아온 답변은 대개 헛된 꿈을 깨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식의 충고였다. 그만큼 배우를 둘러싼 전망들은 열악하고 어두컴컴했다.
먹고 사는 일과 직결된 현실적 문제 못지않게 식민지 조선의 배우들을 괴롭혔던 것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이었다. 급격하게 밀려들어온 문명의 산물들을 받아들이며 세상은 빠르게 개화되었지만, 광대를 천시해왔던 해묵은 인습만큼은 쉽게 개선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자 결심한 이들은 집안의 필사적인 반대에 부딪혀 아예 가출하는 일이 빈번했고, 여배우들은 화류계의 기생과 동일시되기 일쑤였다. 인간이 타자의 시각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존재라고 할 때, 식민지 조선의 배우들은 자기비하에 가까운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우리 영화 사상 최초의 풍자적 희극영화 <멍텅구리>(이필우, 1926) 중 배우 이원규, 김소진 등
반면, 배우들이 관객들과 만나던 장소인 극장은 새로운 공론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극장의 공리성에 주목하는 시각은 ‘희대’가 설치되고 그 운영을 관장하던 ‘협률사’가 설립된 1900년대 초반부터 드러난다.
*주1 최초의 실내극장이자 상설극장의 출현 이래 재래의 ‘구경꾼’들은 ‘관객’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때 극장을 출입하기 위해 요청되었던 입장료는 구경꾼의 무제한적 접근을 차단하는 요인이었지만 동시에 이것은 일정한 입장료만 지불하면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극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했다.
*주2 극장은 관객의 문식력에 따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 감각을 총체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 힘입어 메시지의 전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관객의 학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든 관객들은 극장의 파급력을 방증하고 있었고, 극장의 공리적 가치에 주목한 이들은 바람직한 극장 프로그램의 내용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한다. 오늘날 ‘
연극개량론’으로 불리는 대한제국기의 극장담론이 바로 그것이다. 즉, 친일적인 관점에서 문명개화를 내세웠던 이들은 일본의 신파극을 조선에 이입하려는 방식으로 ‘연극개량’을 강조했고, 반대로 ‘애국계몽’적 관점을 견지하던 이들은 연극이 저항적 민족성을 형상화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연극개량론’은 극장문화의 가치를 철저하게 사회적 공리성의 틀로 해석하면서 당대의 배우들에게 ‘계몽’과 ‘교화’라는 과도한 책무를 부과해 왔다. 결과적으로 식민지기의 배우들은 자신들을 천시하는 사회적 시선을 감내하면서도 사회를 교육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인식론적 간극은 연극인들에게 괴리감을 안겨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은 하나의 변곡점을 형성할 만한 사건이었다. 비록 미완의 혁명에 그쳤지만, 3.1운동은 조선인의 역량을 한 곳에 집중시킨 대규모 사회운동이었으며, 그 여파는 사회 개조와 변혁의 열망으로 번져나갔기 때문이다. 이후 제국은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지만, 사실 이는 감시의 고도화를 목표한 기만전술에 불과했다. 광장의 정치가 제약당한 상황에서, 극장은 집단화된 조선인을 합법적으로 모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기에 극장에 대한 공리적 기대는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배우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인정욕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신파극단 예성좌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윤혁의 글 “
신극배우 제군아”는 시대적 변화를 체감했던 이의 소회와 감격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기에 눈길을 끈다.
우리는 일찍이 인자한 부모와 사랑하는 형제를 이별하고
그리운 고향을 떠나 반도극계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였으며 얼마나 고생을 하였느냐.
아니 사회의 동정을 다소간 얻었느냐? 무엇 동정? 동정이 다 무엇이냐? 어림도 없다.
동정은 그만 두고 그네들이 과거 십년 동안 우리를 대한 태도는 어떠하였느냐?
예술이 무엇인지 극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물론 통틀어 놓고 연극하는 배우라고 하면 덮어놓고 '신광대'라고 하고 저급 인물로 인정하여
가까이 대해 주지 않고 경원(敬遠)하는 주의를 가졌었다.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1~1922』, 233쪽.
《조선일보》, 1921. 9. 23., 4면
참으로 무정 세상이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석금 영웅이나 성현이라는 사람들의 역사를 보자.
고통과 고독이 없이 영웅이 된 자가 있는가.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지금으로부터는 낙원의 꿈을 꿀 기회가 돌아왔다.
보아라. 저 굉장한 건축물을-다시 보아라. 소위 유식계급에서 새로 나오는 저 신극단을
-이렇게 극장이 생기고 고상한 극단이 봉기하는 것은 실로 치하할 만한 일이다.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1~1922』, 234쪽.
《조선일보》, 1921. 9. 23., 4면
우리는 오직 이때에 쿡 찌르는 것 같은 감상으로 고치고 깨달아 분투하고 노력함이 없을진대
과거 십년간 노력과 재래에 우리의 관객은 모두 새로 나오는 신극단에게 빼앗길 것이요
종래야 극장다운 극장에는 들어가 볼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맹연히 몸을 멈추고 있을소냐.
모쪼록 이를 갈고 어떻게 해서든지 분투하고 노력하여 참혹한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제군과 더불어 같이 힘쓰고 더욱 더욱 매진하고자 이렇듯 임리한 붓을 들었으니
*임리한: 흠뻑 젖어 뚝뚝 떨어지는 모양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1~1922』, 235쪽.
《조선일보》, 1921. 9. 25., 4면
윤혁은 자못 격정적인 어조로 ‘신극배우 제군’을 호명한다. 비록 그가 자신과 동료 배우들을 ‘신극배우’로 칭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신극’이란 ‘구극(전통연희)’에 대응되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기에 이 글은 신파극이 성행하던 기성 연극계에 보내는 전언이라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윤혁은 동료 배우들에게 ‘분투’와 ‘노력’을 당부하는가?
주목할 것은 그가 “
ᄉᆡ로 나오ᄂᆞᆫ 신극단(새로 나오는 신극단)”의 활약을 다분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글의 발표 시점인 1921년 9월은 동우회순회연극단의 공연이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직후였다. 동경유학생들이 결성한 ‘극예술협회’는 재일본 노동자와 학생들을 돕기 위해 조직된 동우회의 의뢰를 받아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게 되었고, 방학 기간을 이용해 전 조선을 순회하며 공연을 이어나간 바 있다. 관객들은 기존 연극과 차별화되었던 주제와 형식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냈으며, 그 반응은 기성 연극인들에게 분명한 위협으로 느껴질 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해 봄의 담론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신파극-신극’ 논쟁이 가로놓여 있었다. 논쟁을 주도한 현철은 신파극을 포함한 조선의 연극 전통을 모두 부정하며, ‘신극’의 요건들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 실체가 동우회순회연극단의 공연을 통해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동아일보의 전폭적 후원을 받고 있었던 동우회순회연극단 공연의 여파는 저널리즘을 통해 빠르게 확대 재생산될 수 있었다.
토월회 공연 관련 기사 지면 (사진: “토월회의연극일막”, 《조선일보》, 1923. 7. 6., 3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윤혁에게 분명한 위기의식을 환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동우회순회연극단의 사례를 자극제 삼아 동료들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었는데, 이는 ‘신파극-신극’ 논쟁 당시 신파극계를 대표하던 이기세가 보여 준 수세적 입장에서 한발 나아간 태도라 할 수 있다. 즉, 윤혁의 초점은 그가 느낀 ‘감격’을 이야기하고 ‘각성’의 의지를 표면화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신광대”라는 표현이 함축하듯 오랜 기간 동안 모멸적 시각을 견뎌야 했던 그에게 있어 새로이 부각된 신극 집단은 배우에 대한 사회 전반의 시각 전환을 예증하는 징표로 인식되었다. 이제 그는 광대에게 베푸는 값싼 동정이 아닌 예술의 담당자에게 응당 부여되어야 할 존중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다만, 그가 “낙원의 ᄭᅮᆷ”이라 이야기했던 기회는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윤혁이 경계했던 것과 같이, 재래의 배우들은 부단한 자기갱신을 위한 노력이 없다면 언제든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인정투쟁의 장에 진입하게 된 배우들은 관객에게, 더 나아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분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피부에 고이던 임리(淋漓)한 어둠을 잉크로 삼아 새로운 연대기를 써나가기 시작한다.
***
주1.
조영규는 협률사가 일종의 연희회사였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협률사 자체를 극장으로 보고 ‘최초의 관립극장’이라거나 ‘국립극장’이라 표현했던 기존의 학술적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조영규, 『바로잡는 협률사와 원각사』, 민속원, 2008, 95쪽.)
주2.
박노현, 「극장의 탄생」, 『한국극예술연구』 19, 한국극예술학회, 2004.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