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를 빛낸 이 순간은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75년작 <바보들의 행진>의 촬영 장면이다. 고(故) 하길종 감독의 아내 전채린 교수가 2009년 기증한 감독의 유품 중 하나로 사진 뒷면에 “<바보들의 행진> 촬영 당시 신승수 조감독과 함께”라고 기입되어 있다. 하길종 감독과 신승수 감독, 그리고 카메라를 잡고 있는 한 사람이 장면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무슨 장면이 찍히고 있는 걸까.
께 사진 속을 들여다보자. 세 사람이 서 있는 배경을 살펴보면 캠퍼스 안인 것 같고, 선글라스를 낀 하길종 감독,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신승수 감독, 손바닥으로 렌즈에 그늘을 만들고 있는 촬영 스태프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맑은 날 해를 마주 보고 있는 듯하다. 신승수 감독의 손에는 손목시계와 필기구가, 하길종 감독은 무언가 의사 전달을 하려는 듯 허리춤에 손을 얹고 누군가를 부르는 듯 손짓을 하고 있다. 두 사람 뒤로 낮은 화단 턱 위에는 시나리오 같은 종이 뭉치가 올려 있고 뒤쪽으로 비슷한 종이 뭉치를 든 사람이 지나고 있다.
아무리 사진을 읽어봐도 어떤 장면이었는지 알기 쉽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든다. 영자가 병태를 만나러 가는 길인지, 영철이 교정에서 담배를 피우다 교수에게 따귀를 맞고 다른 쪽 뺨을 내미는 중인지, 그도 아니면 휴교령이 내려진 빈 캠퍼스에서 현실에 환멸을 느낀 듯 구토하는 병태가 있는 장면인지 궁금하다. 그래도 감독이 카메라 뒤에 있으니, 최소한 그가 의사 역으로 카메오 출연한 장면은 아니겠지.
하길종 감독에게 사랑받은 작품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대의 우울, 현실에 뒤덮인 젊은이의 그늘을 원작을 뛰어넘어 천재적으로 연출한 명작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