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원로배우 나카다이 다쓰야를 만나다 ‘3K, 3인의 일본거장전’ <할복> GV 및 숙소 인터뷰

by.민병현(한국영상자료원 경영기획부) 2011-09-08조회 1,181
지난 7월 중순, 일본의 대배우 나카다이 다쓰야가 한국을 찾았다. 지난해 영상자료원에서 열린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에 이은 두 번째 한국 방문이다. 그가 한국을 다시 찾은 이유는 7월 1일부터 20일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3K, 3인의 일본 거장전’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2박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는 한국 팬을 위해 관객과의 대화를 두 차례 진행했다. 이번 「영화천국」에서는 지난 7월 14일 <할복> 상영 후 김홍준 감독의 진행으로 열린 관객과의 대화와 행사 다음 날인 7월 15일 김홍준 감독이 그의 숙소를 찾아가 한 시간가량 나눈 대화를 요약해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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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관객과 <할복>을 다시 본 소감이 궁금하다.

지난 3월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우선 이 자리를 빌려 당시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한국인들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오늘 <할복>을 보기 위해 찾아주신 관객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영화는 50년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내 나이는 29살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텐데, 그냥 할아버지라고 해두자.(웃음) <할복>이 만들어진 1962년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의 서부극과 같이 오락 요소가 풍부한 시대극이 인기를 누렸다. <할복>은 일본 시대극 중에서도 이색적인 작품으로 꼽히는데, 당시 칸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 프랑스 여성 몇 분이 충격적인 장면을 보다가 기절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 <할복>에서 50대 아버지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극 중 액션 장면도 많았다. 어려움은 없었나?

어린 나이에 손자가 있는 역할을 맡았다. 처음 경험한 일이라 당황했는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내가 할아버지로 분장하고 있었다.(웃음) 그리고 극 중 칼싸움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소품 칼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고바야시 감독은 이 영화에서 진검을 사용했다. 따라서 관객이 볼 때 속도감이 떨어진다고 느낄 수 있지만, 진검이 갖는 무게감이 영화에서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 연극배우 출신이다. 당시 영화계에서 신인이었던 당신을 고바야시 감독이 주연으로 발탁했다. 고바야시 감독에 대한 기억은?

영화배우로 데뷔한 것은 고바야시 감독의 <검은 강>(1956)이었다. 이후 4년간 <인간의 조건>을 촬영했다. 그리고 1962년에 <할복>을 함께 했다. 현재에도 배우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고바야시 감독 덕분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권력에 저항했던 인물이다.

> 고바야시 감독뿐 아니라 4년간 <인간의 조건>(1~6부)의 촬영을 맡은 미야지마 요시오 촬영감독과의 인연도 깊다. 미야지마 감독은 어떤 인물이었나?

미야지마 감독은 <인간의 조건> 촬영 당시 나에게 “영화는 아무리 좋은 연기를 해도 앵글 안에서 해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었다. 즉 연극배우인 나에게 ‘앵글 속 연기’를 처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미야지마 감독이다.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함께 도호영화사 소속이었는데,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내가 구로사와 감독에게 미야지마 감독의 ‘앵글 속 연기’에 대해 말했더니 구로사와 감독은 “아니다. 배우가 연기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따라가주는 것이 촬영감독의 역할이다.”라고 반박했던 일이 기억난다.(웃음)

> 야외에서 대결하는 장면은 <할복>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신을 촬영할 당시 구름 때문에 며칠간 촬영이 지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바야시 감독의 철저한 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인데, 배우의 입장에서 그는 어떤 감독이었나?

고바야시 감독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매우 조용한 분이었다. 내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한 번 더”라고만 얘기했다. 심지어 일주일간 아무 말 없이 “한 번 더”라고 한 적이 있다. 고바야시 감독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에 대해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감독이었다.

> 상대 배우인 미쿠니 렌타로에게서 성량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렇다. 영화는 마이크가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목소리로 거리 조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난 실제 스크린에서 멀리 있는 두 배우가 대화를 주고받을 경우 관객에게 그 거리감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의견차이로 인해 촬영이 이틀간 지연되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영화를 보니 당시 미쿠니의 주장이 맞는 것 같다.(웃음) 당시 배우들이 촬영장에서 연기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의견이 맞지 않자 고바야시 감독이 “그래, 한번 해봐라.”하면서 우리를 두고 철수한 적이 있다. 그날 스태프가 모두 떠난 후 우리는 하루 종일 연기에 대해 토론했다.(웃음)

이튿날 김홍준 감독은 나카다이 다쓰야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찾았다. 나카다이 다쓰야는 짧은 방한 기간 중 촉박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객관적이고 정확한 인터뷰를 위해 사전에 당시의 영화 전단과 신문기사를 준비해두었다. 이를 통해 그의 치밀한 면을 엿볼 수 있었다.

> 조금 민감할 수 있지만, 미야지마 감독은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한국은 반공 분위기가 만연해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낼 수 없는 환경이었다. 당시 일본은, 예를 들어 <인간의 조건>을 찍을 당시 진보적인 성향의 영화인과 보수적인 성향의 영화인이 조화롭게 영화 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었나?

당시 도호영화사에서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도호쟁의’라는 노동쟁의가 있었다. 미야지마 감독이 대표적이었다. 반면 우익 성향의 감독과 스태프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가 커져서 촬영 거부도 있었고, 일본 정부가 미국에 요청해 전차까지 동원했던 사건도 발생했다. 결과적으로는 ‘신도호’라는 세력이 우익에서 만들어졌고,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도호에 남게 되었다. 구로사와 감독의 경우 우익에 가까웠기 때문에 미야지마 감독과는 거리를 두었다. 난 ‘배우좌’라는 극단에서 3년간 기초 공부를 했다. 당시 이 극단 소속단원 대부분이 공산당원이었다. 하지만 메이저 영화사들은 공산당원을 기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정치 성향을 숨기고 메이저 영화사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 <인간의 조건> 엔딩 크레디트에 연기자들이 ‘배우좌’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렇다. 나 역시 ‘배우좌’ 출신이지 않나? 당시 고바야시 감독은 연극배우 출신을 중심으로 기용했다. <인간의 조건>은 쇼치쿠 영화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쇼치쿠는 배급을 담당했고, 이 영화는 독립프로덕션에서 만들어졌다. 쇼치쿠에서 직접 제작한 영화였다면 ‘배우좌’ 출신이 그렇게 많이 기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에서는 감독의 의견이 지배적으로 반영되었다. 다시 말해, 감독이 배우를 정하면 영화사는 이를 용인해주는 일이 흔했다. 감독이 배우를 보호하는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 <인간의 조건> 1, 2부 개봉 당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가지’(극중 나카다이 분) 캐릭터가 너무 평범하게 그려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1, 2부에서 ‘가지’는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보고, 전쟁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사랑, 특히 인간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는다. 4년 동안 <인간의 조건>을 함께 하면서 이 영화는 어떤 의미가 있었나?

<인간의 조건>은 소설을 원작으로 했고, 이미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에 배역을 맡기 전 소설을 읽었었다. 1, 2부의 ‘가지’를 연기하는 데 특히 힘들었다. 이전까지 난 악역이나 부정적인 캐릭터를 맡았기 때문에 젊은 인텔리겐치아 역할을 과연 내가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됐었다. ‘가지’는 순진하고 순수한 반전주의자이지만 만주에 가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용소 소장을 맡게 되는, 표현하기 무척 어려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1, 2부에서 ‘가지’라는 인물이 잘 표현되어야 다음 시리즈를 보는 관객이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조건>을 통해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에 두려워하지 않는, 일종의 자신감이 생겼다.

> 4년간 전쟁영화를 찍었다면, 이것은 전쟁영화를 ‘찍었다’라기보다 전쟁을 ‘경험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그렇다.(웃음) 극 중에 “미츠코! 미츠코!”를 외치면서 걸어갈 때는 연기의 지경이 아니었다. “이제 끝이다! 이제 끝이다!”라는 생각뿐이었다.(웃음) 배우로 활동하면서 등골이 오싹한 경험을 두 번 했다. 하나는 구로사와 감독의 <란>이고, 다른 하나가 <인간의 조건>이다. <란> 촬영 당시 세트로 만든 성 제작비용이 무려 4억 엔이었다. 8대의 카메라가 불타는 성을 찍고 있는데, 난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야 했다. 만약 내가 넘어지는 등 실수를 하면 4억 엔이 고스란히 없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조건>에서는 참호(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내 옆으로 탱크가 지나가는 신을 촬영할 때였다. 만약 탱크 운전자가 2cm라도 잘못 움직이면 난 깔려 죽는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스턴트맨이 없어서 모든 위험한 연기를 배우가 직접 해야 했다. 이렇게 두 번의 위기를 겪고 담력이 생겼다. 두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으면 확인해보라. 그 신(scene)들에서 내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다.(웃음)

> 1975년 부인과 함께 ‘무명학원’이라는 배우학원을 만들었다. 배우 양성 학원을 만든 동기는 무엇인가?

당시 일본에는 국가가 정식으로 운영하는 배우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배우를 전문적으로 키우는 학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뉴욕의 연기학원을 견학했는데, 그것이 자극이 되어 학원을 설립했다. 이후 다른 배우학교가 설립되기도 했지만 입학금이 비싸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들어가지 못했다. 난 연기자이지만 멋진 연기를 하는 배우를 보는 것을 직접 연기하는 것만큼이나 좋아한다. 따라서 내 학원을 통해 단 한 명이라도 멋진 배우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보통 배우들은 차를 2대 소유했는데, 난 차를 1대만 갖고 나머지 돈을 배우 양성에 투자했다. 지금도 운영 중이다. 35년 동안 학원을 운영했는데 학원을 나온 배우 중 현재 먹고살 수 있는 배우는 10명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웃음) 배우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말해주는 사례인 것 같다.

GV진행 및 인터뷰: 김홍준/ 영화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 정리: 민병현/ 경영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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