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전설이 된 한국영화 1 전설이 된 무성영화 시대의 명작 <아리랑>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1-01-07조회 4,989

실체 없는 명성

오늘날 나운규의 <아리랑>(1926)은 실체(필름) 없이 예전에 본 사람들의 기록이나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그들조차 이미 고인이 되거나, 생존해 있다고 해도 그 잔상만 겨우 간직할 뿐인, 노년에 이르고 있다. 이제 <아리랑>은 제목만 남은 전설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영화에 대한 환상만 잔뜩 키워놓은 꼴이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학계 일부에서는 차라리 필름이 발굴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기대에 따를 실망감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 내세울 만한 고전 한 편 제대로 지키지 못한 우리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가의 탄생>(1915)이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19), <전함 포템킨>(1925)과 같은 외국의 고전영화가 보존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아리랑>의 필름이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실체가 없는 상황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아리랑> 개봉 당시의 신문 보도와 남북한이 내세운 영화의 내용, 곧 문일이 재구성한 영화소설 「아리랑」(서울 박문출판사, 1929)과 북한이 「조선영화문학선집」(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64)에 수록한 시나리오, 영화 초창기의 관계 영화인들이 남긴 평가나 증언 등을 통해 실체 앞에 다가서는 일이다.

<아리랑>은 어떤 영화인가

<아리랑>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나운규를 믿고 내놓은 두 번째 작품이다. 조선키네마는 1910년 초부터 서울 충무로에서 요도야(淀屋)라는 모자점을 경영하고 있던 일본인 여성 요도 도라조오(淀虎藏)가 설립했다. 그는 1926년 2월 초, 청진에서 영화 배급업에 종사하던 대조(大朝)키네마 대표인 조카사위 쯔모리 히데가쓰(津守秀一)를 지배인 겸 제작 부장으로 불러들여 <농중조(籠中鳥)>(이규설 감독.주연, 1926)를 처음 선보였다.

<아리랑>은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과 함께 주인공 최영진과 악덕 마름인 오기호가 서로 노려보는 클로즈업 장면으로 시작된다. 서울에서 떨어진 어느 농촌 마을.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청년 영진(나운규 분)은 분명치 않은 이유로 실성한 후 마을 사람들의 놀림감이 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아버지의 빚을 빌미로 누이동생 영희(신일선 분)를 유혹하는 지주 천상민(홍개명 분)의 앞잡이 오기호(주인규 분)만은 유독 원수처럼 여긴다. 기호는 이런 영진에게 하인을 풀어 끌어다가 매질을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미친 자식 놈을 보내 주인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협박한다.

영진의 아버지(이규설 분)는 원래 중농이었으나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논밭을 처분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지주의 돈까지 빌려 쓰는 소작농 신세가 된다. 영진은 어느 사립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중도에 퇴학당하고 귀향한다. 이런 그를 보고 주위에서는 철학을 공부하다가 미쳤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영진의 친구인 대학생 윤현구(남궁운 분)가 돌아온다. 그는 어느새 처녀로 성장한 영희에게 끌리고 영희도 현구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추수가 끝나고 마을에 풍년놀이가 한창 벌어진 날, 영희에게 위험이 닥친다. 평소 영진의 아버지를 찾아와 빚을 갚든지 딸과의 혼인을 승낙하라고 협박하던 기호가 혼자 집에 있는 영희에게 들이닥친 것이다. 야욕을 채우기 위해 맹수같이 달려드는 사나이에게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려는 순간, 현구가 나타난다. 하지만 현구는 기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만 있던 영진이, 기호가 땅바닥에 깔린 현구를 향해 도끼로 내려치려 하자 들고 있던 낫으로 그의 가슴을 찌르고 만 것이다. 졸지에 살인범이 된 영진은 영희와 현구, 그리고 급보를 받고 달려온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순사에 이끌려 한 많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800여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 3개월 만에 완성한 <아리랑>은 서울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1926년 10월1일 이 영화가 개봉되자 단성사는 관람객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영화관 앞에 기마 순사가 동원되기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관객이 밀려든 단성사는 문짝이 부서질 정도였다. <아리랑>이야말로 구극(舊劇) 구조를 탈피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미주1) 이 작품은 마치 어느 의열(義烈) 단원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미주2)

“대체로 보아 이 일편은 별로이 흠잡을 곳이 없는 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촬영 기술이라든지 감독술이 특별한 독창적 성공은 없다 할지라도 재래의 몇몇 작품 중에 서투른 곳이 보이지 아니하도록 꽤 묘하게 가리웠다. 극의 내용에 들어가서는 쇠퇴하여 가는 조선 농촌을 배경 삼은 만큼 우리에게 느낌을 주는 바가 많으니 특히 ‘논과 밭을 다 팔아서 나를 공부시킨다.’는 것과 이렇게까지 공부시킨 아들이 의외에 광인이 되었다는 것은 농촌의 중산 계급이 실히 맛보는 처지라 하겠고 아리랑 고개 밑에서 땀과 피를 흘리며 논 김 매는 촌민과 그곳의 다 쓸어져 가는 초가집에 청년회 간판이 붙어 흙내 나는 농촌 청년이 모인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더욱 그 사이를 아무 물질 명예의 욕구 없이 순진한 청춘을 위하여 분주하는 박 선생이란 이 시골 선각자를 스토리 쪽에 둔 것이 매우 고마웠다. (하략)”
- 포빙(抱氷 : 본명 고한승), 매일신보, 1926년 10월 10일-

“이 영화는 첫째 역할이 적재적소를 얻은 것이 성공의 큰 원인을 지었으니 감독자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라운규, 신홍련(신일선), 주인규, 남궁운, 리규설 등은 다 각기 독특한 별다른 동작과 개성이 표현되었다. 장면은 거의 다 선명하였으며 특히 사막의 장면은 전 조선 영화를 통하야 가장 우수한 장면이라 하겠다. (하략)”
- 김을한(金乙漢, 영화동호회), 동아일보, 1926년 10월 7일-

이상은 당시 일간신문에 게재된 영화평이다.

<아리랑>은 민족의 저항을 담은 그 내용과 함께 당시로선 생각하기 어려운 영화적 기법을 구사, 관객을 사로잡았다. 미주3) 조선인 고유의 감정, 사상, 생활을 그린 이 영화는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유와 암시, 상징의 몽타주 등 특유의 기법을 보여주었다.

첫째, 비유의 예로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을 들 수 있다. 서로 앙숙인 개와 고양이를 내세워 영진과 지주의 앞잡이 오기호를 대립 관계로 만듦으로써, 지배자인 일본 제국주의와 피지배자인 한민족을 상기시키고 있다. 둘째는 미친 영진으로 하여금 반복하게 한 독백의 암시다. 주인공은 누구에게인지 “아 배고파! 목이 말라 죽겠다. 물을 물…”을 하며 갈증을 호소하는가 하면 “진시황도 죽었다지.” 하고 중얼거린다. 이는 갈증을 통해 나라를 빼앗긴 비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시사하고 일제의 패망을 암시한 것이다. 셋째는 상징적인 사막 장면의 몽타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설정한 사막과 물은 1920년대 우리나라 현실을 함축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그 유명한 환상 장면은 영희를 범하려던 기호가 영진의 낫에 찔려 죽는 현실 상황과 절묘하게 연결된다. 멀리서부터 아라비아 상인의 모습을 한 험상궂은 기호와 나그네인 영진이 걸어오고, 화면 앞에 다가선 나그네는 목을 쥐며 물을 달라고 애원한다. 무정하게도 상인은 물을 주기는커녕 나그네를 발길로 걷어차버린다.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젊은 남녀가 나타나, 상인에게 역시 물 한 모금을 마시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들은 현구와 영희다. 상인은 물병을 들어 모래 바닥에 쏟아 보이며, “저 사나이를 버리고 나를 따른다면 물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갈증을 견디다 못한 영희가 상인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자, 분개한 현구가 상인에게 달려들면서 격투가 벌어진다. 먼저 상인에게 물을 간청했다가 발길에 차여 쓰러졌던 나그네(영진)도 일어나 공격을 가한다. 기세 좋게 대응하던 상인은 어느새 나그네가 휘두른 칼날에 맞아 목숨이 끊긴다.

이 사막 장면에서 검은 옷을 입은 탐욕스러운 아라비아 상인은 일제의 경찰을, 흰옷을 입은 나그네와 젊은 여인은 백의민족인 조선 사람임을 암시한다. 몽타주나 포토제니에 대해 알 턱이 없는 나운규는 여기에 ‘대조적 몽타주’를 구사하고, ‘개와 고양이’를 작품의 첫머리에 내세움으로써 ‘유도 모티브’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주4)

이상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리랑>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잇따른 포빙(신영화 「아리랑」을 보고)의 말처럼 결함도 적잖이 드러나고 있다. “현구가 황마차일망정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왔던들, 그리고 농사의 정령! 그것과 같은 처녀 최영희와 좀더 조선식으로 러브신이 있었던들, 이 영화는 이것 이상의 성공을 보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그런 한 예다.

그럼에도 <아리랑>은 부인할 수 없는 걸작이라는 데에는 견해가 거의 같았다. 심훈(沈熏)은 ‘<아리랑>은 명편’(조선 영화인 언퍼레이드: 동광, 1931년 7월호)이라고 평가했고, 김유영 역시 ‘관중의 가슴에 폭풍우와 같은 고동과 감명을 준 명작’(명배우 명감독이 모여 조선 영화를 말함 : 삼천리, 1936년, 11월호)이라고 과찬했다.

그러나 <아리랑>은 홍보 과정에서 경찰 당국에 의해 전단 1만 매를 압수당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개봉 전날 돌린 팸플릿 내용 가운데 노래 가사가 ‘공안을 방해’하여 법에 저촉된다는 이유였다. 미주5) 이 사실을 명백히 나타낸 것은 조선일보(1926년 10월 1일)와 매일신보(1926년 10월 3일)에 실린 전 3단 광고였다.

먼저, 조선일보 3면에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라는 <아리랑> 노래 가사 5절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3일 뒤 발행된 매일신보에는 이 가사가 삭제된 자리에 대신 ‘근사 초일 대만원(謹謝 初日 大滿員)’이라는 만원사례 문안이 들어가 있다. 약소민족의 비애가 담긴 표현이 문제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6.25 이후에도 상영된 영화

<아리랑>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서울을 비롯한 지방 각처에서 재상영되었다. 1950년 6.25 전쟁 직전까지 서울에서만 아홉 차례나 흥행에 부쳐졌고, 6.25사변 이후 1952년 9월 대구 만경관에서 1주일간 재상영(영남일보 광고)된 바 있다. 이 필름은 15년 전 일본의 아베 요시시게(阿部善重)씨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상자료원 등 몇 군데서 현지로 찾아가 존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마저 아베의 사망으로 이 필름에 대한 궁금증은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주
1) 신일선 「무성영화시대/ 아리랑과 나」 중앙일보, 1970. 11. 24
2) 이경손 「무성영화시대의 자전」 신동아, 1964년 12월호
3) 이규환 「영화60년/태동기」 중앙일보, 1979.12.22
4) 안종화 「춘사 나운규」 사상계, 1962년6월호271쪽
5) 매일신보「아리랑 선전지 압수」192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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