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라이언 크리스 랜드레스, 2004

by.한승태(애니메이션박물관 수석학예연구사) 2018-04-16조회 4,566

피폐한 삶을 어떻게 보여줄까?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흔적을 어떻게 보여줄까? 예를 들어 우리 몸의 상처를 얘기할 때는 보여주면서 이건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거고, 이마의 상처는 친구들과 싸우다 난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남은 상처를 어떻게 보여줄까. 그래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영상이거나 글로 묘사하는 문학이거나 우리는 그런 예술가를 천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라이언 라킨
라이언 라킨

어떤 예술장르이거나 그런 천재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천재들의 삶이 그렇듯 예술적 비범함만큼이나 삶을 과감하게 탕진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애니메이션계에서는 라이언 라킨(Ryan Larkin)이 그런 천재 중 한 명이다. 보통 그의 천재성을 말할 때 10살부터 유화를 그리고 13살에 미대((Montreal School of Fine Arts)에 입학한 사실을 거론한다. 또한 19살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음에도 전 세계 애니메이터들이 꿈꾸는 캐나다국립영상위원회(NFB)에서 거장 노먼 맥라렌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자신만의 독창적인 제작기법과 표현 방식을 개발하여 주목받았다. 

그는 영감에 의해 작업을 해왔던 애니메이터로 첫 작품부터 재능을 단번에 드러냈다. 마지막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메타모포시즈metamorphosis 기법(나비가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화여 가듯 한 사물이 조금씩 변하여 전혀 다른 사물로 형상화하는 기법)을 최대한 활용한 걸작이었다. 그럼에도 라이언 라킨은 바라던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했다. 오늘 소개하는 애니메이션 <라이언>은 라이언 라킨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다. 이를 제작한 크리스 랜드레스는 2004년 라이언 라킨의 삶을 그린 14분짜리 <라이언>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과연 누가 표현의 천재일까?   
 
라이언 라킨(좌) 캐릭터와 감독 크리스 랜드레스(우) 캐릭터
라이언 라킨(좌) 캐릭터와 감독 크리스 랜드레스(우) 캐릭터

<라이언>은 첫 장면부터 사람이 약물과 마음으로 입은 상처를 효과적으로 그려내며 관객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감독인 크리스 랜드레스가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로 직접 출연, 인터뷰어의 역할을 하고, 라이언 라킨 역시 인터뷰이로 출연하여 자신이 캐릭터에 직접 목소리를 입혔다. 애니메이션은 공중화장실의 어둠 속에서 물 내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크리스 랜드레스가 첫 장면부터 등장, 거울 앞에서 과거의 상처를 애기하며 분열된 내면과 작가로서의 불안을 자조하듯 중얼거린다. 

인터뷰는 노숙자 급식소 같은 곳에서 진행된다. 라이언의 인터뷰지만 그와 관련 사람들이 소환된다. 첫 번째로 한 때 애인이었던 펠리시티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컬러의 선으로 표현되어 라이언이 그녀와 행복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라이언이 인생에서 항상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었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주목받던 작품 <걷기Walking>과 <거리음악Street Musique>이 소개되는데, 그의 애니메이션은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하는지 보여주는 필름이다. 라이언은 거울 앞에 서기를 좋아했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자신의 몸과 살이 움직일 때 어떤 상태인지 관찰하며 그림을 그려왔다. 그는 회화만이 아닌 음악과 결합된 움직임을 창조하고 싶어 했다. 
이어서 그가 잘 나가던 시절 프로듀서인 데렉 램이 소환된다. 그는 라이언이 자신감을 잃고 분노만 남은 사람으로, 코카인의 힘으로 뭔가 대단한 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그를 파괴했다고 증언한다. 이후 인터뷰어인 감독은 라이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상실감이 가장 파괴적인 것이라며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라이언에게 술과 담배를 끊고 재기했으면 좋겠다고 권한다. 급식소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흡사 라이언이 지나온 모습 같다. 라이언의 모습을 보며 감독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알코올중독을 떠올리고, 마지막은 라이언의 거리 구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라이언 뒤의 배경(상점 유리)에는 잘 나가던 시절의 라이언이 비춰지며 암전된다.
 
<걷기>(1968)
<걷기>(1968)

<라이언>에는 라이언 라킨이 그린 독특한 작품도 맛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유튜브에 올라 있으니 전편을 보면 좋겠다. 특히 1968년 작 <Walking>은 단순하지만 다양한 걸음을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마치 로토스코핑(rotoscoping)을 사용한 듯 실감나는 인체 묘사와 다양한 포즈, 액션이 인상적이다. 수채화로 채색한 그림과 선의 움직임은 음악의 비트에 맞춰 라이언 라킨의 독특한 타이밍 감각을 보여준다.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한 육신으로 연신 술을 들이키며 예술적 영감으로 넘쳐났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노쇠한 남자, 라이언 라킨.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표현방식을 제시하며 당시의 애니메이터들을 놀라게 했지만, 거리의 노숙자로 살아가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감독은 라이언 라킨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걸 드러낸다. 부서지기 쉬운 사람,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들은 연결된다. 그들에게 세상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뭔가 유동적이고 왜곡되어 있다. 예술가로서의 동질감을 크리스 랜드레스의 애니메이션은 보여준다.     

이 작품은 3D 그래픽만이 표현할 수 있는 소재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 렌드레스는 <라이언>이 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 정확하게 답했다. 3D그래픽은 감독 자신의 캐릭터는 물론 라이언의 절망감과 생애, 특히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의 특징과 상처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라이언>의 캐릭터 디자인은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보통 파편화된 삶이라는 표현을 쓸 때, 파편화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여기저기 벗겨진 피부와 앙상한 뼈대 사이로 텅 빈 내부가 고스란히 보인다. 감독은 라이언 라킨을 뒤틀린 신체의 일부만으로 표현한다. 파격적이고 기괴한 캐릭터를 통해 라이언의 분열되고 상처 입은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관객은 이러한 시각적 표현과 기이한 이미지를 접하며 강렬한 충격에서 영화를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한다. 또한 끝나고 나서도 파격의 이미지가 던져주는 시각적, 기술적 새로움을 넘어 두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동질감에 감동받는다. 

라이언
 
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우연히 라이언과 어울리게 된 감독 크리스 랜드레스는 부랑아 정도로 여겼던 라이언에게서 비범한 예술적 재능이 있음을 알아채고, 4년여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라이언 라킨의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기록했다.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 그의 삶은 여러 가지로 상징적이었어요. 그의 삶은 예술가라면 가져야 할 열정과 나이를 먹으며 어떻게 삶을 마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모두를 의미했습니다. 그는 예술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서 살고 있었지요. 최악의 상황에 처한 한 남자의 삶은 어떠할까? 저는 이것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은 비극이지만 유머나 인간미 역시 담고 있습니다.”감독의 말처럼 <라이언>은 그저 불행했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좌절한 애니메이터 라이언 라킨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감독 자신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예술가, 라이언 라킨과 크리스 랜드레스의 공허감은 채워질 수 없는 예술적 완성에 대한 욕망으로 보인다. 드로잉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던 라이언 라킨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 움직임을 만들었던 전통적인 애니메이터였다. 그런 그가 노숙자로 전락한 그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피폐한 라이언의 모습과 그것을 재현하는 크리스의 3D 표현력은 마치 컴퓨터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전통적인 애니메이터의 현재를 보여주는 동시에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도 삶의 현실을 담고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보들레르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매우 일상적이고 처연한 실생활과 순간적이고 소멸되는 성격의 현대 도시의 삶 속에서 독특한 것과 개인적인 것을 통해 새로운 미(美)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새로운 미를 보여준다. 

<라이언>은 2004년부터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과 아카데미 등의 굵직한 시상식에서 앞서 소개한 박세종의 <축생일>과 경쟁하며 주목을 받았다. 인물에 내재된 욕망과 트라우마까지 형상화한 독특한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은 시각적 충격과 탄탄한 서사로 강력한 매력을 뽐낸다. 후일담이지만 <라이언> 성공 이후 라이언 라킨은 여성 감독 로리 고든과 함께 2008년 <한 푼 줍쇼Spare Change>라는 7분짜리 애니메이션으로 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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